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역산이 위치 미상의 지명으로 등재돼 있습니다
저는 당 태종 2차 원정 당시 오호도의 고신감이 바다를 건너 고구려군과 싸운 장소인 역산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易山이 曷山이고이 曷山이 碣石山인 것을 파악하였습니다 당 시대를 다룬 사서 기록에서 고구려의 경계로 언급된 산은 갈산(은 역산)과 갈석산이 유이합니다
가. 사실 정보
1. 삼국사기(고려, 1145 년) 고구려본기 보장왕 7년(서기 648년) 기사 : 易山
夏四月 烏胡鎭將古神感 將兵浮海來擊 遇我步騎五千 戰於易山 破之 其夜 我軍萬餘人 襲神感舡 神感伏發 乃敗
ㅡ 오호도의 오호진을 지키는 장수 고신감이 바다를 건너 역산에서 고구려군과 전투
2. 자치통감 주(남송, 호삼성, 1285 년) : 易山 = 曷山
烏胡鎮將古神感 將兵浮海擊高麗,遇高麗步騎五千,戰於易山,破之。〔「易山」,新書作「曷山」。將,即亮翻。麗,力知翻。騎,奇奇翻。〕
ㅡ 오호도의 오호진을 지키는 장수 고신감이 바다를 건너 역산에서 고구려군과 전투
ㅡ 역산은 갈산(曷山)
3. 신당서(新唐書, 북송, 1044~1060) : 曷山
二十二年,詔右武衛大將軍薛萬徹為青丘道行軍大總管,右衛將軍裴行方副之,自海道入。部將古神感與虜戰曷山,虜潰;虜乘暝襲我舟,伏兵破之。
ㅡ 오호도의 오호진을 지키는 장수 고신감이 바다를 건너 갈산(曷山)에서 고구려군과 전투
ㅡ 갈산은 역산
4.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청초 한족 학자 고조우 저, 1659~1678) : 曷山 = 易山 = 在高麗界
鎮將古神感浮海擊高麗,破之於曷山。曷山在高麗界,或作易山。
ㅡ 오호도의 오호진을 지키는 장수 고신감이 바다를 건너 갈산(曷山)에서 고구려군과 전투
ㅡ 갈산은 역산으로 고구려 경계에 있다
5. 통전(通典, 당나라 재상 두우 편찬, 776년부터 착수, 30여 년에 걸쳐 초고 완성, 이후에도 계속 보필) : 碣石在今髙麗舊界
<通典卷一百七十八>
盧龍
〔 漢肥如縣有碣石山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晉太康地志同秦築長城所起自碣石在今髙麗舊界非此碣石也
① 노룡은 한 비여현으로 갈석산(碣石 - )이 있다.
②
ㅡ 해석 1안 : 진(晉) 태강지리기에서 이르기(同)를 진(秦)이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된다 했는데 지금 고구려 옛 경계에 있으며 이 갈석산이 아니다
ㅡ 해석 2안 : 진(晉) 태강지리기에서 이르기(同)를 진(秦)이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된다 했는데 지금 고구려 옛 경계에 있는 것은 이 갈석산(노룡 갈석산)이 아니다
漢遼西郡故城在今郡東又有漢令支縣城臨閭闗今名臨榆闗在縣城東一百八十里盧龍塞在城西北二百里〕
③ 한 요서군 옛 성이 지금 북평군 동쪽에 있다. 또 한 영지현성이던 임여관, 지금의 임유관이 노룡현성 동쪽 180리에 있고 노룡새가 노룡현성 서북 200리에 있다.
<通典卷一百八十六 (東夷下 髙句麗)>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於此山今騐長城東截遼水而入髙麗遺址猶存 〔 按尚書云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髙麗中為左碣石 〕
① 갈석산은 한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이 산에서 장성이 시작된다
② 지금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건너(끊고)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고구려에) 실제로 유적이 남아 있다
③
ㅡ 해석 1안 : 상서(서경)에서 말하기를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에 들어간다”라고 했는데 즉 황하가 바다에 다다른 곳에 있는 우갈석은 지금 북평군 남쪽 20여 리에 있으며 즉 고구려에 있는 갈석은 좌갈석이다
ㅡ 해석 2안 : 상서(서경)에서 말하기를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에 들어간다”라고 했는데 즉 황하가 바다에 다다른 곳에 있는 것은 우갈석이며 지금 북평군 남쪽 20여 리 즉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6. 통전 ㅡ 당 노룡현의 위치 : 北平郡 平州
<通典卷一百七十八>
北平郡
〔東至柳城郡七百里南至海一百里西至漁陽郡三百里北至塞百八十里東南到臨榆闗一百八十里西南到馬城縣一百八十里西北到石城縣一百四十里東北到柳城郡七百里去西京四千三百二十里去東京三千五百二十里戶三千三十一口一萬三千七百七十〕
平州
〔今理盧龍縣殷時孤竹國春秋山戎肥子二國地也今盧龍縣有古孤竹城伯夷叔齊之國也戰國時屬燕秦為右北平及遼西二郡之境二漢因之晉屬遼西郡後魏亦曰遼西郡隋初置平州煬帝初州廢復置北平郡大唐因之領縣三〕
7. 상서(서경) : 夾右碣石入于河
冀州:既載壺口,治梁及岐。既修太原,至于岳陽;覃懷厎績,至于衡漳。厥土惟白壤,厥賦惟上上錯,厥田惟中中。恆、衛既從,大陸既作。島夷皮服,夾右碣石入于河。
8. 사기색은(史記索隱, 저자 司馬貞 : 679~732) 주석(태강지리지 인용)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史記』, 「夏本紀」)
9. 진서(晉書, 648년) 지리지 평주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과 수성현(遂城縣)
朝鮮, 周封箕子地.
ㅡ 주가 기자를 봉한 곳이다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ㅡ 진(秦)이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10. 易水
易水의 발원지 易縣은 하북성 보정시 속현
11. 한서 지리지, 후한서 군국지, 진서(晉書, 648년) 지리지,위서(魏書, 북제 위수 편찬, 554~559 년) 지형지 교차
요동ㆍ낙랑 등의 군현은 북위에 의해 하북성 고죽국 지역인 평주의 영주 관할로 예속 됐다가 다시 6진의 난(六鎭之亂, 523 년)시기에 하북성 보정시 쪽으로 교치
나. 사실 정보 근거 본인의 추정 과정과 주장으로서의 추정의 확장
저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 당 태종 2차 원정 기사를 다시 유심히 살펴보던 가운데에 이 2차 원정의 전장터가 1차 원정의 요택ㅡ요수ㅡ요동/안시성과 다르다는 것과 당군이 주로 수군을 이용하여 고구려로 침략하였다는 것을 새삼 다시 파악했고 이들 침략 경로와 전장터 가운데에 지난 해에 그 경로와 위치를 고찰, 입증한 바 있는 가탐 도리기 바닷길 경로 상의 오호도, 그리고 오호도에 있는 오호진의 병력과 그 부장인 고신감이 바다를 건너 고구려군과 싸운 장소인 역산에 주목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산동 등/래주에서 요동 대련으로의 직항도해가 불가능했으므로 가탐 도리기에서 도서편에 이르는 여러 시대별 전근대 해당 항로가 등/래주를 출발지로 삼아 시계방향으로 연안항해를 하는 경로였습니다
따라서 오호도의 고신감이 바다를 건너 싸운 고구려의 역산은 그 가까운 곳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여 우선 주해도편의 지도를 통해 오호도와 도리진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서 오호도는 래주 연안, 도리진은 그 북쪽의 소청하(Xiaoping river)가 남쪽으로 감싸고 바다로 흘러는 드는 리진현 연안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오호도의 고신감이 바다를 건너 싸운 역산은 도리진이 있는 소청하 근처거나 그 북쪽 지역으로 황하와 소청하 사이일 것이라 추정하였습니다
한 편, 상기 <가>의 사실 자료 1~4의 기록을 통해 역산이 갈산이며, 또한 고구려의 국경지대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1) 역산은 갈산으로, 오호도/도리진과 가까운 곳
2) 고구려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당시 고구려 땅
이라는 사실이 도출되었는데
그 전까지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현 난하 일대일 것이라 추정해 온 차이기에 비록 사실 교차에 따라 도출된 결과라 할지라도 선뜻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조차 위치 미상으로 분류한 역산에 대하여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외의 자치통감, 신당서, 독사방여기요 등의 사서가 같은 사실 내용을 전하면서 역산은 갈산이며 고구려 경계ㅡ라 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어서 저는
1) 易山 = 曷山인데 비록 한자는 다르지만 曷山 = 碣石山일지도 모른다
2) 易山은 易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는 추가 가정을 하였습니다
상기 <가>의 사실 자료 5의 통전 기록은 비록 서로 모순된 내용을 적고 있음에도 모두 碣石이 고구려 경계에 있거나 고구려 영토에 있다고 진술함으로써 역시 <가>의 4의 독사방여기요 기록인 “曷山在高麗界,或作易山”과 상통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0) 고신감의 역산은 도리진~황하 일대 ㅡ 본인 추정
1) 고신감의 역산은 고구려 경계 근처 ㅡ 본인 추정
2) 그 역산은 갈산(曷山) ㅡ 자치통감주, 신당서, 독사방여기요
3) 그 갈산(曷山)은 고구려 국경에 있음 ㅡ 독사방여기요
A : 2)와 3)을 통해 1)의 추정이 입증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4) 갈산(曷山)은 갈석산(碣石山) ㅡ 본인 추정
5) 갈석산(碣石山)은 옛 고구려 국경에 있다 ㅡ 통전
6) 역산은 역수(이수)와 연관 ㅡ 본인 추정
B : 3)과 5)를 통해 4)의 추정이 입증가능해졌습니다
A와 B가 0)으로 되돌아와 수렴되면서 0)의 추정이 성립 가능해졌으며 6)과 연결됩니다
상기 <가>의 사실 자료를 보시면서 아래에 제가 다시 정리한 내용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 역수(이수)는 하북성 남부 보정시 역현(이현)에 발원하여 대청하, 또는 황하(의 물줄기는 수시로 변했습니다)로 흘러든다
2) 황하는 어느 시대든 현 보정시와 (도리진이 있는 )소청하 사이에서 바다로 흘러들었다
3) 상서(서경)에서 말한 최초의 원조 갈석산은 황하 하류에 있었다
4) 오호진의 고신감은 바다를 건너 고구려 경계의 역산에서 싸웠다
5) 어느 갈석산이든 간에 고구려 국경, 고구려 땅에 있던 어느 산의 이름이 갈석이었다
저의 주장은 다음의 추론에 근거합니다
1) 사실
易山 = 曷山
2) 추정
曷山 = 碣石山
4) 사실
易水의 발원지 易縣은 하북성 보정시 속현
5) 사실
易水는 대청하, 또는 황하로 흘러듦
6) 사실
최초의 갈석산(碣石山)은 황하 하류에 위치
7) 사실
갈산은 고구려 땅으로 그 국경에 위치
8) 사실
갈석산은 고구려 땅으로 그 국경에 위치
9) 사실 근거 추정
역산은 오호도에서 연안 항해를 하여 도달하는 곳으로 오호도와 가깝거나 최소한 도리진(소청하)에서 가까운 곳이어야 한다
하여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역산은 황하 근처
2) 역산은 갈석산으로 불린 산
3) 당 태종 2차 원정 당시 고구려 국경은 황하 일대
4) 고구려 국경선이 당 태종 2차 원정 당시 황하 일대였던 이유는 1차 원정에서 사서 기록보다 참패하여 오히려 고구려에 땅을 빼앗겼고 그것이 주로 수군을 이용한 전략 수정을 낳았으며
5) 산동 봉래시, 산동 즉묵시, 강소 숙천시, 강소 염성 정혜사(몽롱탑) 등의 전설을 낳았다
6) 이들 지역의 전설은 고구려군의 침략으로 황하 일대에서 피란 온 피란민의 전쟁 기억이 그 지역의 산하기물 등에 투사돼 형성되었다
다. 통전의 右碣石과 左碣石 문제
통전은 상서(서경)와 태강지리지(사마정이 사기색은으로서 사기에 주석으로 인용한)를 근거로 우갈석과 좌갈석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일단 상서의 갈석(원조 갈석)은 황하 하류에 있었으므로 황하의 입해 물길 위치 변화상과 당나라 두우 시기 북평군의 위치를 정확히 고증한다면 그 산의 위치가 간단히 해결될 일입니다
통전은 또한 갈석산의 위치에 대하여 모순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① 노룡현은 한 요서군 비여현으로 갈석산이 있다
② 한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태강지리지에 이르기를) 진 장성이 시작된다
③ 황하 입구에 있는, 상서의 갈석은 우갈석이고 옛 고구려 경내에 있는 갈석은 좌갈석으로 요수 건너에 있으며 유적이 남아있다
사실 현 중국(지리적 명칭으로서)에 남아있는 갈석산, 또는 갈석산을 별칭으로 지닌 산은 다수이다
1. 원조 갈석산 : 하북성 해풍현 ~ 산동성 무체현
우선 상서에 기록된 원조 갈석, 즉 옛 황하 하류에 있던 갈석은 도배시러님이 제시해주신 기록대로
海豐縣 馬谷山,〈縣北六十里。高三里,周六七里。山半有洞廣二丈餘,深不可測。
一名大山。或以爲即古之碣石。
으로 현 허베이성(河北省) 창저우시(滄州市, 창주시)에 소속된 하이싱현에 소재하며 이곳은 산동성과 인접하므로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빈저우시 우디현)에 걸쳐 있다.
이곳의 갈석이 바로 우공의 갈석이며 상서에 기록된 “夾右碣石入于河”의 그 갈석이다
2. 진 장성 시작점 1안으로서의 갈석산
일명 대갈석(청 함풍 5년, 1866년에 명명)으로 하북성 노룡현 ~ 창려현 ~ 무녕현에 걸쳐 있는 갈석
3. 작은 갈석산
역시 하북성 창려현 서북쪽에 있으며 일명 소갈석으로 몽둥이를 닮아 봉추산이라는 별칭이 있다
4. 진 장성 시작점 2안으로서의 갈석산
하북성 진황도 갈석산으로 응각암, 협자와 등의 이칭이 있다
5. 의무려산
당 영주 유성을 현 조양시에 비정해 놓고는 <당육전>/<신당서 지리지>의 “갈석은 영주의 동쪽에 있다”/”영주 유성 동북진에 의무려사와 갈석산이 있다”는 기록을 근거를 들어 이곳 또한 갈석이라 한다
6. (심지어) 이병도의 갈석산
현 서북한 평양 인근
이병도의 학설과 통전 동이열전 고구려전의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於此山今騐長城東截遼水而入髙麗遺址猶存”을 근거로 하여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만리장성을 서북한까지 이어 표시하고 있다
통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盧龍漢肥如縣有碣石山碣然而立在海旁故名之晉太康地志同秦築長城所起自碣石在今髙麗舊界非此碣石也
① 노룡현은 한 요서군 비여현으로 갈석산이 있다
ㅡ 현 중국 하북성 창려~노룡~무령현의 갈석산
태강지리지 갈석산은 한 낙랑군 수성현
② [해석 1안] : 진(晉) 태강지리기에서 이르기(同)를 진(秦)이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된다 했는데 지금 고구려 옛 경계에 있으며 이 갈석산이 아니다
ㅡ 태강지리지 갈석산이 고구려 옛 경계에 있다
[해석 2안] : 진(晉) 태강지리기에서 이르기(同)를 진(秦)이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된다 했는데 지금 고구려 옛 경계에 있는 것은 이 갈석산(노룡 갈석산)이 아니다
ㅡ 태강지리지 갈석산이 고구려 경계에 있다는 말인지 노룡 갈석산이라는 말인지 알 수 없음
③ 당 노룡현(한 요서군 비여현) 갈석산 ≠ 태강지리지(낙랑군 수성현) 진장성 시작점으로서의 갈석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於此山今騐長城東截遼水而入髙麗遺址猶存 〔 按尚書云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髙麗中為左碣石 〕
① 尚書云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ㅡ 현 하북성 해풍현과 산동성 무체현 사이에 있는 원조 갈석산
②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於此山今騐長城東截遼水而入髙麗遺址猶存 = 髙麗中為左碣石
ㅡ 여기에서 말하는 요수가 어디인가?
ㅡ 요수는 갈석, 요동과 마찬가지로 수천 년에 걸처서 황하 일원에서 동북쪽으로 움직였다가 다시 돌아오며 무수한 곳에 그 이름을 남겼다
ㅡ 옛 고구려 땅 안에 유적이 실제로 남아있다고 두우는 적고 있는데 그게 지금 어디이며 어디에 그 유적이 남아있는가?
ㅡ 한 낙랑군 수성현인가 아니면 이 낙랑군 수성현이 끊임 없이 서쪽으로 교치된 경로상의 낙랑군 수성현인가?
라. 낙랑군 수성현 문제
1. 사기색은에서 사마정이 주석으로 달며 인용한 태강지리지 기록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史記』, 「夏本紀」)
2. 진서(晉 - )지리지 낙랑군
朝鮮, 周封箕子地.
ㅡ 주가 기자를 봉한 곳이다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ㅡ 진(秦)이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저는 지난 해 겨울에 중국 역대 지리지를 비교하여 기존 한 요서ㆍ요동ㆍ낙랑군 등의 인구 변화상을 고찰하고 공손씨, 모용씨, 고구려의 활동상에 따라 기원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이들 군현이 기존의 위치에서 하북성 쪽으로 교치된 정황을 고찰하였습니다
또 도배시러님과 함께 이들 고찰을 공조하며 동시에 모용씨의 룡성이 현 조양이 될 수 없음과 수나라 요서 유성이 역시 현 조양이 될 수 없음을 추적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전하지 않는 태강지리지는 이름만 태강연호를 달고 있을 뿐 진서지리지와 동시대 같은 정보를 담고 있음을 가볍게 고찰한 바 있습니다
한서 지리지에는 장성 이야기가 없습니다 낙랑군 수성현에는 장성은 커녕 새도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진서지리지에 ‘진장성이 시작된다’는 설명이 붙었고
태강 연호를 근거로 3세기 말에 쓰여졌다고 추정되는 태강지리지에는 후대(648)에 쓰여진 진서지리지보다 더 자세한 설명이 붙어서 ‘갈석산’이 최초로 언급됩니다
후대의 사서보다 전대의 사서가 더 자세할 수 있습니까?
실제 요동ㆍ낙랑 등의 군현은 북위에 의해 하북성 고죽국 지역인 평주의 영주 관할로 예속 됐다가 다시 6진의 난(六鎭之亂, 523 년)시기에 하북성 보정시 쪽으로 교치되었습니다
즉 수ㆍ당 시기(를 다루는 사서)에 언급되는 낙랑군 수성현은 진의 수성현이거나 북위의 수성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강지리지(갈석, 진장성)와 진서지리지(진장성)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이 전하는 시대는 낙랑군이 하북성 고죽국 자리에 교치됐던 시기이며 이 시기의 지리정보가 후일 북위 때에 하북성 남부 보정시로 교치된 후의 정보에 합산돼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도배시러님의 견해와 같이 후세 사가들이 혼동했거나 일부러 혼동을 주기 위해 정보를 섞었다고 보여지는 것이죠
실제 통전의 기록 양상을 보면 갈석산이 고구려 땅 안에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이는데 이 사실을 토대하여 갈석과 진장성 시작점을 계속해서 동쪽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이들 기록을 정리하면
1) 한 낙랑군은 진 시기에 한 요서군 지역으로 교치가 됐으며 진(晉) 말, 늦어도 북위 시기, 특히 523년 6진의 난으로 인해 하북성 남부 보정시로 교치가 되었습니다
2) 따라서 수성현에 진장성이 시작된다(진서지리지), 진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산이 있다(태강지리지)는 지리정보는 당 노룡, 창려 자리에 있을 당시의 지리정보이며
3) 당나라 시기에는 이 자리에 북평군이 자리잡으므로 한 비여군과 갈석산만 언급할 뿐인 것이죠
4) 즉 태강지리지의 갈석산 정보는 낙랑군이 진(晉) 시대 노룡/창려, 혹은 그 근방에 있을 때의 정보
5) 통전의 노룡현 갈석산은 당 나라 시대 북평군 노룡현의 정보
6) 4)와 5)의 갈석산은 같거나 비슷한 위치(추정컨데 노룡/창려 갈석과 진황도 갈석 정도의 거리)
7) 상서의 갈석은 우공 시대의 정보로 현 하북 해풍/산동 무체의 갈석산
다시 정리할까요?
갈석 A = 원조 갈석(상서 우공)
갈석 B = 북위에 의해 보정시로 교치되기 전의, 원래 위치에서 진(晉) 시기의 위치로 교치돼 온 갈석 (태강지리지/진서지리지)
갈석 C = 당 북평군 노룡현 갈석(통전) = 주해도편의 노룡/창려 위치
갈석 D = 고구려 국경, 혹은 고구려 땅에 있던 갈석(통전, 독사방여기요)
갈석 B와 갈석 C는 같거나 지근 거리
갈석 A는 우갈석, 갈석 D는 좌갈석(통전 두우 주장)
역산易山 = 갈산曷山 = 갈석산碣石山 = 도리진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
(易山 = 曷山 = 碣石山)
역산을 역수와 관련 있는 어떤 산으로 상정하더라도 역시 황하 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