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 고려, 발해, 거란의 진흙탕 전쟁(요동의 주인을 찾아서)
1.요동의 원 주인 발해의 몰락의 시작
발해와 거란의 전쟁은 20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그 시작은 903년 요동 지역을 둘러싸고 발해와 거란 간의 전운이 돌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해의 가독부였던 대위해가 죽고 마지막 가독부인 대인선이 즉위하였다.
909년을 기점으로 발해와 거란은 요동을 둘러싼 치열한 혈전을 벌이게 되며 사실상 발해 - 거란 전쟁이 시작되었다. 918년 발해는 요양지역(현 요하서부-대릉하 사이)을 상실하고 요동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긴다.
이후 거란은 압록강(현 요하~태자하)까지 도달한다.
고려와는 990년경 국경을 맞닿게 된다
기록에는 발해의 대처가 없었다고 나오는데, 요동 지역을 둘러싼 전투에서 발해가 패배하면서 상당히 큰 전략적,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1)요동지역은 고구려 때부터 주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의 주도권까지 완전히 상실하건 아닌데, 919년, 요동을 병합한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것이다.
2)발해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923년, 거란은 요서의 평주에 노룡군 절도사를 설치하여 발해의 숨통을 쥐어오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말갈족들의 이탈을 가속화시켰기 때문이다.
평주 노룡(참조)
말갈족들도 발해의 행정 및 군사에 일정 부분 투신하고 있었던 만큼 발해로선… 결국 발해는 정국을 타개하고자 924년 5월,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서 요주 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요주를 박살을 낸다.
평주와 요주 지도참조
2.국제적 상황과 발해의 멸망
1)중요 요충지였던 요동이 오랜 전란으로 초토화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고 이로인해 발해의 국력이 한계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발해의 군주 대인선은 중국과 한반도의 국가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비록 상황은 다르지만 250여년 전 고구려가 멸망할 때처럼 발해를 도와줄 수 있는 국가는 사실상 없었다.
2)동북아의 정세를 보면, 몽골초원의 a)위구르 제국은 해체되고 b)해족과 습족은 거란에 병합되었으며 c)중원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10국 시대의 혼란기가 열렸으며 d)한반도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e)일본은 이 때부터 사실상 독자 노선을 걷게 되는데, 뭐 애초부터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안되었다.
발해로선 더욱 절망적인게 내부에서 말갈족(흑수말갈 부터)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3)924년 5월에 있었던 위의 요주전투는 그래도, 발해가 멸망은 면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멸망 때처럼, 요사 본기에 '내분,이심'이라는 표현대로, 924년 여름부터 발해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925년, 발해 장군 신덕이 휘하 병졸 500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5)이 후 발해의 관리 등이 필사적으로 고려로 망명하기 시작하는데 아마도 오랜 전란으로 인한 국력의 쇠퇴와 그로 인한 지배 계층의 분열과 민심 이반이 원인일 것이다.
6)여하튼 발해의 세기말적 상황을 파악한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몽골 초원 정벌을 마친 후 925년 음력 12월, 발해를 끝장내기 위해 2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발해를 침공하였다.
3.요동을 장악하기 위한 거란의 역습
1)거란은 요동을 침공했던 영주도가 아닌 거란도를 이용하여 발해의 심장부였던 부여부를 대규모의 병력으로 기습하는 결정적인 전략을 세우게 된다. 요동을 통해 올 줄 알았던 거란의 주력이 거란도를 이용해 올 줄 몰랐던 발해로선 의표를 강하게 찔렸다. 거란의 주력이 요동을 통해 왔다면, 서경 압록부와 중경 현덕부라는 거대한 방어선이 있어 막기가 수월했지만, 거란도를 통해 왔다면 발해의 수도 앞에 있는 중요 방어선은 딱 하나, 일직선상에 있는 부여부밖에 없었다. 발해의 의표를 찌른 거란은 부여부에 있던 발해의 정예군을 괴멸시키고 부여부를 함락하였다.
2)원래대로 라면, 오랫동안 버텼을 부여부는 도독 대문진이 왕권 다툼으로 인해 상경용천부에 진주하고 있었던 탓에 중요 군사력이 빠져 나가고 지휘관이 부재했던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함락당하게 된다.
3)발해는 증원군을 보내 거란군을 막고 부여부를 재탈환하려했으나 패배하였다. 노상장군 으로 하여금 3만(혹은 5천)의 군사를 주고 수도인 상경용천부로 진격해오는 거란군을 길목에서 막게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한편, 요동으로 진격한 거란군은 장령부에서 발해에 의해 막히게 된다. 결국 거란은 장령부를 돌파하여 서경 압록부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4)부여부를 돌파한 거란의 주력은 926년 음력 1월 9일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를 포위하였다. 발해의 군주 대인선은 항전하기 위해 총 동원령을 선포하였으나 이미 늦었고 결국 음력 1월 12일 성문을 열고 대인선은 항복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15대 22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