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 모용희 재기에는
卷一百二十四 載記 第二十四
會高句驪寇燕郡,殺略百餘人
때마침 고구려가 연군을 침범하여 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위 내용 관련한 기존의 주장과 반론을 간단히 살펴보면
1. 주장- 연군은 조양(朝陽)의 동쪽이다. 신당서 구당서를 보면 연군(燕郡) 연군성(燕郡城)이 나오는데, 가탐도리기에 영주 동 180리에 연군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은 대릉하(大凌河) 하류 방면이다.
반론-신당서 구당서에 연군 연군성이 나오지만 그 이전 시기 북위 동위 북제는 그런 군을 설치한 적이 없다. 신당서 구당서의 지명 연주(燕州) 연군(燕郡) 연군성(燕郡城)은 당나라 때 설치된 것이 명확하다.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2. 주장- 연군은 북경(北京) 지역의 한나라 유주 광양군(廣陽郡)이고 진나라(晉) 때는 연국(燕國)이라 했고, 북위 때는 연군(燕郡)이라 했는데, 진서 모용희 재기에는 연군(燕郡)을 고구려가 공격했다 하고 모용황 재기에는 연국(燕國)이 나온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은 북경지역 연군이다.
반론-연군 공격 기록이 진서 모용희 재기에 나오는데, 모용희는 후연 마지막 왕. 제위 401년- 407년으로 이 시기 북경 지역은 397년부터 북위가 장악하고 있었다. 시기도 맞지 않고 모용희 재기에 기록되어 있어서 고구려가 모용희 시기 후연을 공격한 것이지 북위를 공격한 것이 아니다.
3. 주장- 연군(燕郡)은 그냥 연나라(燕)의 군(郡)이라는 뜻이다.
반론-한자만 보면 그런 뜻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막연히 연나라 군이라고 기록할 의도라면 연군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필요가 없이 會高句驪寇 또는 會高句驪寇燕이라고 하면 되는데 뭐 하러 연군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나. 문맥상 후연의 특정 군을 지칭한 것이다.
4.주장-연군은 후연이 북경지역을 상실하고 교치한 것이다. 모용희 때도 유주자사가 영지에 있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용희의 유주자사가 관할하는 지역에 연군을 교치하였다.
반론-모용성 모용희의 자사 직은 관직명 작위(爵位)에 해당하고 유주자사 관할하에 상실된 유주의 속군을 교치하지 않았다. 모용희의 자사는 유주자사 -영지(令支)/ 청주자사- 신성(新城)/ 병주자사- 범성(凡城)/ 영주자사- 숙군(宿軍)/ 기주자사-비여(肥如)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 자사가 있던 지명들은 다 모용희 시기 또는 그 이전부터 모용희 영역 안에 있던 지명이다. 상실된 주(州)의 지명으로 해당 자사가 있지만 상실된 주의 속군을 교치한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또 그 이전 자사들도 마찬가지, 게다가 작위에서도 하간왕(河間王) 장락왕(長樂王) 고양왕(高陽王) 등이 보이지만 하간군 장락군 고양군 등을 모용희 영역에 교치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주장들이 더 있기는 하지만 대략 위의 주장들이 많다.
저의 주장은 이렇다.
위서와 진서에 나오는 연국(燕國) 연군(燕郡) 후고(猴固)라는 군(郡) 명칭이 보이는데, 모두 모용선비의 당국군(唐國郡)을 다른 이름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림으로 주장을 보면 이해하기 더 쉽다.
해당 사서에 연국 연군 후고는 각각 한 번씩 나온다.
연군 하나만 보고 그 성격을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유사하게 언급된 모두를 보고 판단하면 더 쉽다.
먼저 모용희 시대와 북연의 군을 알면 좋다.
10개군 체제는 후연의 모용성(慕容盛 398년~401년) 모용희(慕容熙, 401-407년) 시대에도 같다.
북연(北燕, 407년-436년) 고운(高雲)이 건국
북연 10군 |
군명 |
시기 |
중요 지명 |
위서 지형지 |
기타 |
당국군(唐國郡) |
294년 수도로 삼음 |
대극성(大棘城)
요사(堯祠) |
후 북위 창려군 광흥현(廣興縣) |
요순시대 요(堯)임금이 개국한 국가 이름(唐國)
또는 봉배된 지명 |
성주군(成周郡) |
341년 모용황(慕容皝)이 용성(龍城)으로 천도 |
화룡성(和龍城)
용상불사(龍翔佛寺) |
북위 창려군 용성현(龍城縣) |
요순시대 동도(東都)의 이름(成周) |
기양군(冀陽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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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현(柳城縣) |
447년 기양군을 북위 창려군에 병합 |
조양(朝陽)지역에 유성현이 나타나는 것은 북위가 447년 기양군을 북위의 창려군에 교치한 결과 |
창려군(昌黎郡) |
289년 도하현을 수도로 삼음 |
도하현(徒河縣)
청산(青山) |
북위의 창려군에 병합/도하현은 광흥현에 병합하고
북연의 창려군에는 북위의 요동군 설치 |
북연의 창려와 북위의 창려는 다름 |
낙랑군(樂浪郡) |
313년과 이전 병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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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현(朝鮮縣)-북평군 비여현에 교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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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군(帶方郡) |
313년 병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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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자현(含資縣)-요서군 양락현에 교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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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군(營丘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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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덕군(建徳郡) |
334년 병합 |
백랑(白狼)
백랑산(白狼山) |
건덕군 광도현(廣都縣) |
백랑산과 백록산은 다른 산.
백록산은 북연의 서북에 있음(진서 모용희재기北登白鹿山,東過青嶺,南臨滄海)
수경주는 북위 광흥현 석성을 한나라 석성현으로 비정한후 백록산과 백랑산이 같은 산으로 위작. |
석성군(石城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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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산사(白鹿山祠)
백록산(白鹿山) |
건덕군 석성현(石城縣) |
건덕군에 있는 석성현 또는 석성군과 북위 창려군 광흥현에 있는 석성 구분 필요. 수경주는 북위 광흥현 석성를 한나라 석성(石成)현으로 잘못 비정. |
요서군(遼西郡) |
338년 병합 |
비여현(肥如縣)
양락현(陽樂縣) |
대방군의 속현 함자현(含資縣)-요서군 양락현에 교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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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희 시기와 북연의 시기는 10개군 체제로 파악이 되는데, 당국군 성주군은 잘 언급이 되고 있지 않으며,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을 주장하는 글에서도 언급이 없다. 당국군 성주군 존재를 안다면 저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위서 세조기에 언급된 후고부터 하나씩 보자.
후고(猴固)
魏書卷四上 世祖紀第四上 연화 원년(432) 8월 기사
詔平東將軍賀多羅攻文通帶方太守慕容玄於猴固, 撫軍大將軍、永昌王健攻建德, 驃騎大將軍、樂平王丕攻冀陽, 조서를 내려 평동장군 하다라는 문통(馮弘 북연 마지막왕 재위 430년~436년)의 대방태수 모용현을 후고(猴固)에서 공격하게 하고,무군대장군 영창왕 건은 건덕을 공격하게 하고,표지대장군 낙평왕 비는 기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위의 문장을 보면 역사상 단 한번 언급된 후고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런데 후고가 군(郡)인지 현(縣)인지 성(城)인지 알 수는 없다.
같이 언급된 건덕과 기양은 둘 다 군(郡)이다.
이로 보아 후고도 군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어서 건덕군 기양군 보다 결코 중요도가 덜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매우 중요한 지명이지만 피휘처럼 군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판단된다.
그러면 북연의 군 중에 북위가 다른 이름으로 기록할 군이 있는가?
있다. 당국군(唐國郡)
당국군은 요순시대 요임금이 개국했다는 기록과 봉배된 지역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중국의 총칭으로 사용되고 종주국이라는 의미도 있다. 당연히 모용선비도 이와 관련된 주장을 하는데, 진서 모용외 재기를 보면
其先有熊氏之苗裔, 世居北夷 그 선조는 유웅씨(有熊氏)의 묘예(苗裔,후예)로 대대로 북이(北夷) 땅에서 거주하였다.
유웅(有熊)은 신화에서 황제가 건설한 나라/ 황제의 이름으로 나온다.
모용선비는 황제의 후예를 자처하였는데, 모용외 재기의 유웅씨에서도 알 수 있지만, 모용외가 만든 군에서도 당국군 성주군이 있다.
당국군(唐國郡)-요임금 건군 국가/봉배된 지역
성주군(成周郡)-요순시대 동도(東都) 이름
요사(堯祠)-요임금 제사 사당
북위의 입장에서는 모용선비의 종주국 개념이 들어간 당군군 군명을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위서 지형지에서 찾아보면 당국군과 성주군만 없고 다른 군은 모두 기록되어 있다.
북연의 군은 여기 참조
猴固
唐國
위 두 지명을 보면 피휘법에 익숙한 사람이 당국이라는 인정하기 어려운 단어를 피하여 후고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생각된다.
북위의 사가의 입장에서 당국을 후고로 만든 과정을 생각해 보면
唐國---侯國---侯固---猴固
연국(燕國)
[진서] 권109 모용황(慕容皝) 재기
以勃海人爲興集縣, 河間人爲寧集縣, 廣平·魏郡人爲興平縣, 東萊·北海人爲育黎縣, 吳人爲吳縣, 悉隸燕國.
발해(勃海)(군郡의) 사람들로 흥집현(興集縣)을 세우고, 하간(河間) 사람들로 영집현(寧集縣)을 세우고, 광평(廣平)과 위군(魏郡) 사람들로 흥평현(興平縣)을 세우고 동래(東萊)와 북해(北海) 사람들로 육려현(育黎縣)을 세우고, 오(吳) 사람들로 오현(吳縣)을 세우고는 (이 현들을) 모두 연국(燕國)에 속하게 하였다.
모용황 시대에 북경 지역에 연국(燕國)이 있었는데, 모용황이 침입한 일은 있어도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위 기사에 나오는 연국은 북경의 연국이 아니다.
그냥 보면 중국인의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역사 기술법이여서 식상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위 기사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선은 저 기사가 왜? 무엇을 위해 기록하였느냐를 생각해 보자. 모용외가 만든 군(당국군 성주군 건덕군 영구군) 속현은 기록된 것이 거의 없고 이 기사에서 나오는 것이 전부다.
기사 작성 의도가 모용선비의 속현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이런 기록이 남았을까?
북위의 기록을 당나라 시 차용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북위의 관점은 오로지 북연의 역사를 북위의 아류로 폄하하고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흔한 중국식 기록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북위의 행정구역의 역사를 위작하는 방식으로 기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