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스녠(1896~1950).중국 산둥지방 출신으로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영국, 독일 등에서 유학하고 1929년부터 베이징대 교수를 역임했다. 1949년부터 대만대학교 총장을 지냈다./사진출처=위키피디아
[물밑 한국사-59] 유사역사가들이 떠받드는 외국 학자들이 몇 명 있다. 사실을 알고 보면 거의 다 오독을 한 결과이다. 그 학자들이 주장하지 않은 학설, 또는 과장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학자 중에는 베이징대 교수 출신으로 중국 분리 후 대만대 총장을 역임한 푸스녠(傅斯年)도 들어 있다(우리나라에는 우리 독음대로 '부사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사역사학에서 푸스녠은 고조선의 실체인 동이를 인정한 위대한 학자 취급을 받는다. 정말 그럴까? 푸스녠의 '이하(夷夏)동서설'은 국내에 번역까지 되었다. 푸스녠이 주장하는 것은 동서로 대립한 이족과 하족이 다 중화족의 일족으로 현 중국의 모든 영역이 중국 것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임지현, '근대 국경의 역사' 7장 6절 영웅사변기와 근대 중국의 민족사).
이후 고고학의 발전으로 푸스녠이 주장한 이족과 하족의 대립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렇게 폐기된 푸스녠의 학설은 중국 쪽의 유사역사가들과 우리나라의 유사역사가들이 지지한다. 양국의 유사역사가는 목적이 완전히 대립 충돌하는데 서로 푸스녠이 자기네에게 유리한 말을 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중국 쪽의 유사역사가들은 이족은 중화의 한 갈래이므로 한민족이 은나라의 후손이기 때문에 다 자기네 족속의 한 부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기자가 조선으로 간 것이 바로 은나라 고향으로 간 것이라고 말한다(이성규, '고대 중국인이 본 한민족의 원류', 한국사시민강좌36).
▲ 2012년 상하이에서 다시 출판된 푸스녠의 동북사강
푸스녠은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역사학을 '구국의 역사학'으로 탈바꿈시키고 오늘날 동북공정의 단초가 되는 '동북사강(東北史綱)'을 내놓았다.
일본은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서 만선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학자들의 위기감도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서로 간의 적대적 에너지를 흡수하며 몸집을 불려나갔던 것이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푸스녠은 비분강개한 어조로 "서생들은 어떻게 조국에 헌신해야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들은 만주 지역이 본래 중국의 영토였다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구국을 위해 역사가들이 책임을 다한다고 생각했다(이병호, 동북공정 전사:부사년의 '동북사강' 비판, 동북아역사논총20).
푸스녠은 동북지방, 즉 만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걸 읽고도 유사역사가들은 푸스녠을 칭송할 것인가?
"발해를 둘러싼 3면은 모두 중국문화 발상지이며, 요동 일대는 영원토록 중국의 군현이었으며, 백산과 흑수 일대는 오랫동안 중국의 번병이었다. (중략) 2천년의 역사를 볼 때, 동북이 중국이라는 사실은 강소성이나 복건성이 중국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동북사강 2쪽)
오늘날 중국에서 만주 지방을 동북 지방이라 부르는 것도 푸스녠의 제안에 의한 것이다. 그는 선사시대부터 만주에 중국인들이 거주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내 유사역사가들이 '은=동이'로 동일시하는 것과 달리 그는 은과 동이는 다른 종족으로 파악했다. 푸스녠은 은나라가 만주에서 발원해서 산동지방에 있던 동이를 정복했다고 말한다. 고구려와 부여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부여와 고구려의 통치 계층은 중국의 북변에서 이주하여 온 자들이었고, 수백 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한 부여는 한·위 시기에 동북에 있었던 최대의 속국이었다."
신라에 대해서도 "당나라를 잘 섬겨 왜에 망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이다.
푸스녠이 원래 말한 동서의 대치, 즉 이족과 하족의 대립이란 중국과 비중국의 다툼이 아니라 중국 안에서의 대치일 뿐이다(이유진, 누가 왜 예를 말하는가, '동북아 활쏘기 신화와 중화주의 신화론 비판').
이하동서설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국 내 동서 간의 대립이기 때문에 푸스녠은 진(서)-육국(동), 유방(서)-항우(동), 조조(서)-원소(동)라고 삼국시대까지 동서 간의 대립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다 손권의 오나라 때부터 강남이 개발되면서 동서의 대치는 적어지고 남북 대치가 늘어난다고 말한다.
동북에서 일어난 한민족이 남하하여 은나라를 세우고 '동족'인 동이족을 정벌하는 등 위엄을 떨친 것으로 보면 되지 않느냐는 유사역사가들이 있다. 그러나 푸스녠은 이런 설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한무제의 정벌 이전에 이미 중국어를 사용하는 중국인 집단이 폭넓게 거주하고 있었다고 본다. 푸스녠은 중국인을 '한어(漢語)를 사용하는 한족(漢族)'으로 정의하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주장일 수 있다. 그는 '방언'에 나오는 '북연조선(北燕朝鮮)'이라는 말을 단서로 연나라와 조선은 같은 말을 썼다고 주장하고 한무제가 조선을 침공한 것은 다른 민족과의 싸움이 아니라 이 지역을 다스리던 중국인 통치 집단을 통제하기 위해 행한 전쟁이라고 판단한다. 위만조선 정복이 서역과의 긴 전쟁과 달리 1년밖에 걸리지 않은 단기간에 완수된 것은 원래 중국과 밀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푸스녠은 한족이 문화적으로 가장 우수했기 때문에 한족과의 접촉 빈도에 따라 문화적 우열이 가려진다고 주장한다. 가령 읍루는 한족과 많이 접촉하지 못해서 가장 열등했고 예족은 한족과 빈번하게 접촉해서 가장 우수한 문화를 가졌다고 말한다. 푸스녠의 '동북사강'을 영역한 리지(李濟)의 'Manchuria in History'는 훨씬 직접적으로 이런 점을 설명하고 있다. 비중국계 민족이 일시적으로 중국에 대해 자립할 수는 있지만 이들은 결국 우수한 중국 문화에 동화된 뒤에 다시 중국에 흡수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주사변을 맞아서 쓰인 책인 만큼 푸스녠은 동북 지방을 위해 수천만 명이 희생되어도 거리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와 민족의 흥망성쇠가 오직 동북에 달려 있다고 외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김창규, 부사년의 민족문제 이해와 동북 인식, 역사학보193).
푸스녠이 주장하는 만주는 본래부터 중국의 영역이었다는 것은 바로 동북공정의 논리와 동일하다. 그는 고구려와 삼한은 종족이 다르다고 주장하고 은나라의 후예인 고구려는 중국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에 맞선다고 입으로만 떠드는 유사역사학에서 이런 주장을 늘어놓은 푸스녠을 찬양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