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으로 일본 기슈[紀州]유학의 창시자, 임진왜란때 의병활동을 하다가 왜장 아사노 유키나가[淺野幸長]의 포로가 되어 오사카로 끌려갔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기초가 확립되었을 때 데라고야[寺小屋:에도시대 서민교육기관]를 차려 조선의 유학을 가르쳤다.
본관 합천(陜川). 호 일양제(一陽齊). 일명 일노(一怒). 영산(靈山) 출생.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의령(宜寧) ·합천·창녕(昌寧)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593년 23세 때 왜장 아사노 유키나가[淺野幸長]의 포로가 되어 오사카[大阪]로 끌려갔다. 오사카와 기슈(현:와카야마[和歌山]) 등지를 전전하다가 1614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기초가 확립되었을 때 기슈의 가이센사[海善寺] 부근에 데라고야[寺小屋:에도시대 서민교육기관]를 차려 조선의 유학을 가르쳤다.
그의 학문이 깊다는 소문을 들은 번주 도쿠가와 요리노부[德川賴宣]가 시강으로 초빙하려 하였으나,“나는 조선왕의 신하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거절하고, 번정[藩政]은 민생을 우선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요리노부는 끝내 그를 시강으로 모셨으며 30석을 주어 예우하였다. 이후 조선의 성리학을 배운 번주는 이를 서정(庶政)의 근간으로 삼음으로써 기슈에 조선의 유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조선국이씨진영지묘(朝鮮國李氏眞榮之墓)’라 씌어 있고, 일가의 묘는 와카야마의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의 고국에 대한 사랑은 후손에게로 이어져 1984년 13대로 절손될 때까지 이씨(李氏) 성을 지키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