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왕릉/황릉을 조성한 조선과 명ㆍ청의 고분은 그 위치가 제각각이어서 도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예사이다
그러나 그 이전 시대의 두 나라의 왕/황릉은 대개 국도나 국도 주변에 무덤이 조성되었다
고구려 고분은 주로 집안과 평양에 집중돼 있는데
특히 평양 지역 고분은 고구려 하대인 5 ~7 세기의 것들이다
이 때문에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현 평양임을 뒷받침 하는 강력한 근거로 자리한다
본인은 현 평양지역의 고구려 고분을 모용선비의 두 차례의 도굴에 따른 고구려의 자구책이었다는 가설을 처음 세운 바 있다
296년 서천왕 무덤, 342년 미천왕 무덤이 파헤쳐진 무덤으로 특히 미천왕 무덤은 시신까지 가져가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 때문에 모용선비 등을 상대하여 고구려의 후방 지역인 현 평양지역에 무덤이 조성되기 시작했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현 평양지역의 고분 가운데에 왕릉이라고 밝혀진 곳은 한 곳도 없다. 단지 왕릉급이라고 취급돼 왔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뿐만 아니라 장수왕 무덤조차 현 평양이 아니라 집안에 있으며 5~7 세기 고구려 왕릉급 무덤이 현 평양에서만 나타나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왕릉급 무덤이 서북한과 남만주에 집중돼 있는 것은 여러 사서를 교차 분석하여 기존의 강단주류학설에 반하는 사실들을 밝혀내며 열심으로 탐구하는 연구자들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이다
현 조양시를 모용선비의 3연의 룡성이 아니었다고 볼 근거가 유물, 유적으로서는 부족하고 오히려 모용선비의 왕릉/왕릉급 무덤이 내몽골 동부에서 현 요서에 산재한다
특히 조양시 북표현 사관영자에서 발굴된 풍소불 무덤은 이곳이 북연의 땅이었고 중심지였음을 웅변한다
해안선의 변화상을 쫓아가다 보니 고구려의 역사강역의 비정에 큰 혼동이 오는데 이러한 불변고정의 유적들 역시 안티테제를 쫓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는 큰 고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기존 강단주류학설에서 고구려 강역의 주장들은 많은 면에서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