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때 있었던 전투.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과 더불어 조선군에게 치욕을 안겨준 전투이다. 4만의 조선군이 팔기군 300명에게 패배한 유명한 전투이다.
1. 쌍령 전투의 전개
1637년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북상한 경상도 속오군 4만명은 1월 3일 아침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기병 위주의 청군과 마주치게 된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은 경상 우병사 민영과 경상 좌병사 허완이었으며 4만 군사의 대부분이 조총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이 중에 실제 투입된 병력은 8천으로 이들이 허완, 민영의 지휘하에 전투에 참여했는데, 한번에 4만 명을 다 동원할 수 없어서 먼저 집결한 병력으로 추정된다..
청나라군의 선봉 33명이 나무 방패를 들고 돌격해왔는데, 지휘권도 없는 경상 감사 심연의 종사관 도경유가 제멋대로 비장 박충겸을 참수하고 총포 사격을 명한다. 총포 사격으로 청군은 100보 떨어진 지점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포수들이 공명심에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떨어지고 만다.
그 덕분에 화약을 더 달라고 소리치고 경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청군이 낌새를 알아채고 다시 돌격하여 목책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안동의 영장 선세강이 직접 지휘하여 화살 30여 발을 쏘았지만 나무 방패에 맞고 나중에는 화살이 다 떨어지자 결국 적의 칼에 사망하고 만다.
청군이 목책 안으로 들어오자 조선군은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져 달아나고 허완은 겁을 집어먹고 3번이나 말에서 떨어진 끝에 도망치던 아군에게 밟혀 죽었다. 일설에선 허완이 말에서 3번 떨어지고 분전하다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는 말도 있고 다른 설에선 청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좌군은 완전히 무너지기에 이른다. 그나마 평지였기 때문인지 다수가 도망치는 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지휘부가 전멸하여 부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참고로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허완은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 출병을 할때 눈물을 흘렸고, 그 주변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며 통곡을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오른쪽의 민영이 지휘하는 군은 그나마 허완 부대에 비해 군기가 잡혀 있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지급된 10발의 탄약을 모두 소모 한 탓에 다시 탄약을 나누어 주고 있는데 종사관 도경유에게 처형당한 비장 박충겸의 아들이 원한을 품고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
결국 탄약을 보급하던 수령 2명과 군사 수십이 폭사하고 조선군은 동요하게 된다. 이 때 팔기군 300기가 공격을 감행하자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은 그대로 붕괴됐고, 진을 친 곳도 후퇴에 불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 부대는 확실하게 전멸을 당했다. 한편 경기도 여주 부근에 주둔하던 경상 감사 심연은 쌍령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자 전의를 잃고 조령으로 후퇴한다.
청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조선군의 전열을 붕괴시키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과 확대전을 벌였기에 조선군 지휘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용인 전투 때와 달리 적어도 2,600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7만의 병력 중 1천이 전사한 용인 전투 때보다 훨씬 큰 피해이다. 나머지는 생환했으나 용인 전투 때와 달리 지휘부가 전멸한 상황이라 수습되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져버렸다. 경상도 근왕군은 건재했으나 이 패배를 접하고 사기가 꺾여 반격을 하지 못하고 조령에서 대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 직후 인조가 항복하게 된다.
2. 쌍령 전투에 대한 평가
a) 4만 병력 패퇴설
이 전투가 유명해진 이유는 4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고작 300기의 청나라 기병에게 패퇴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인데, 이 청나라 기병 300명이 당시 전투에 참여한 모든 청군의 숫자라고 단정할 근거는 희박하다. 물론 전체 청나라 병력 수는 300명이 아닌 6,000여명 정도로 추정이 되지만, 민영이 이끄는 조선군 부대와 교전한 청나라 팔기군의 숫자는 300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인조 34권, 15년(1637년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2월 26일 2번째 기사).
우선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을 지휘했던 장수는 『청사고』와 『청태종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아이신기오로 요토'로 추정되는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성해응도 그의 문집인 『풍천록』에서, 쌍령 전투 당시를 '至如同時雙嶺之戰 虜帥岳託乃以三十三人'라 서술하여 적의 사령관을 요토와 33인의 장수로 책정한 바가 있다.
요토는 거의 바닥에 가까운 우리 나라에서의 인지도와는 달리 누르하치의 사실상 장남인 '다이산'의 장남, 즉 누르하치의 손자로 청 태종 홍타이지를 황제로 옹립시켜준 실력자이며, 당시 팔기군 중 한 부대인 양홍기의 대장이기까지 했다.
당시 팔기의 기군 하나 당 책정된 병사가 만주 팔기의 경우 7500명이 상한이라는 점, 『황조문헌통고』에 '(청 태종이) 숭덕 원년(1636년) 12월에 요토 등으로 하여금 3000명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는 기록과 이후 병력 증원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점을 고려해보면 쌍령 전투 당시 요토가 이끈 병력은 3000명은 넘겨도 최대치인 7500명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요토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철군할 때 후방 부대를 통솔하는 임무를 맡게된다.
그러나 의주 부윤 임경업이 요토를 백마 산성으로 끌여들여 술 잔치를 벌이는 척하면서 요토를 베었다.
또한, 지휘관이 요토 말고 1명 더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화 전투에서 지휘를 했던 유림이 훗날 병자호란이 끝나고 쌍령 전투에 참전한 군관에게 그 놈들 지휘관이 누구길래 우리 조선군은 그렇게 엿 먹은거임?라고 물어보았는데, 그 군관은 "오곽사라는 자와 왕족인 아이신기오로 요토입니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래서 요토 말고 오곽사라는 장수도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승정원 일기에는 허완의 아들 허장이 자신의 아버지가 도망쳤다는 사실에 대해 당시의 전투 상황을 술회하며 올린 상소가 기재되어 있는데, '날이 밝자 적기 수백이 진 앞까지 쳐올라왔는데, 이어 수천의 적기가 산성으로부터 엄습해오니, 바야흐로 산위에서 총탄과 화살이 서로 오고갔습니다.'
라며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이 수천 명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방 전사 편찬 위원회에서 나온 『병자호란사』도 비록 근거가 되는 사료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쌍령 전투에 6000명의 청군이 참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완의 반대편 진영에 주둔했던 민영을 사령관으로 하는 조선 병사들은 불과 팔기군 300명의 돌격에 허무하게 전열이 무너져내린 것은 사실이다. 애초 허완과 민영은 각각 집결한 조선군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쌍령 고개 양쪽에 진을 쳤는데, 그 중 민영이 이끌고 있던 수천 병졸들이 팔기군 300명의 돌격에 전투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허무하게 와해 및 전멸한 것인데, 실제 참전한 병력이 8천이고 그 중 절반이 4천이니까 무려 10배 이상에 달하는 병력차를 극복한 것이다.
b) 지휘관 무능설
정신적으로 잘 훈련되지 않고 머릿수만 불린 병사, 급히 출진하느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물자, 무능한 장교들의 형편없는 지휘와 갑작스레 이루어진 지휘관의 처형이 낳은 총체적 비극이란 인식이 있으나, 지휘관이었던 허완은 사람 보는 눈이 매우 깐깐한 이순신 장군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유성룡에게도 천거받아 여진족을 상대로 승전 경험도 있던 장수였다.
위의 글에서도 적혀있듯이 허완이 3번 낙마했단 사실 자체가 전열이 붕괴되는 상황에도 지휘권을 유지하기 위해 낙마를 했음에도 말에 세번씩이나 다시 탔단 이야기며 조총수들은 탄약과 화약을 부족하게 보급받은 것도 아니었다.
속오군의 훈련도를 가지고 뭐라 그러는데 훈련도가 개판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걸 조선군 지휘관들이 몰랐던 것도 아니고 훈련도를 감안하지 않은 작전을 세웠다가 무너진 것도 아니다.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승전이었던 광교산 전투와 김화 전투도 속오군이 주축이 되어 이긴 전투였고, 훈련 수준이 낮지만 그래도 전의가 남아 있는 속오군을 어떻게든 추스려 그나마 사상자가 최소화되고 방어가 용이한 전장에 배치하고 지휘관이 적극적으로 지휘를 하니 비록 전투 직후 탄약이고 뭐고 다 떨어져 퇴각해야 하긴 했지만 우세한 청군을 적어도 한 번 막아낼 수는 있었다.
따라서 쌍령 전투의 가장 큰 패인은 군무에 무지한 문신이 제멋대로 지휘에 개입하면서 총 지휘관이 제대로 부대를 통제할 수 없어진 것에 있다.
승전이었던 광교산 전투와 김화 전투는 모두 지휘관이 무신이었고 지휘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었다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쌍령 전투를 고증해본 결과 패장인 허완의 지휘는 군사의 배치부터 지휘 요소에선 부족함이 없었다. 단지 최전선을 맡은 하급 지휘관이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군에게 목이 잘려 부대의 통제가 힘들어진 상황을 감안하지 못한것이 결정적인 원인인데 이 경우가 워낙 상식을 벗어난 일인지라 허완의 책임 요소는 없다고 봐야 한다. 부대 통제를 위해 만든 장교단이 아군에게 박살나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즉 군사에 무지한 문관이 정신나간 훈수질로 역사에 남을 패전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역으로 승리하거나 패했어도 상식적으로 패할 만해서 패한 전투는 다 지휘관이 제몫을 한 전투였다.
허완의 부대가 후퇴했더라도 다른 부대가 남아있었기에 방어는 가능했을 수도 있으나 민영 역시 문관인데다 적도 아닌 멍청한 문관에게 참수당해 죽은 박충겸의 아들이 탄약고를 날려버려 방어에 실패하고 남은 부대도 후퇴했다.
c) 여타 패인
참고로 근대 영국군은 다른 나라에 비해 속사를 추구하면서도 전투 경험 많은 부사관에 따른 사격 통제를 극도로 중시하였는데, 바로 위에서 좌군이 무너지던 것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적군이 다가오면 사람은 공포심이 일어나 자기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겨버리게 되고, 일단 옆에서 누군가 쏘기 시작하면 그 분위기가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경험을 통해 이를 알고 있었던 영국군은 적군의 눈에서 흰자가 보이게 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사격을 참도록 훈련시켰으며, 부사관의 지시보다 앞서 방아쇠를 당긴 병사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응징이 가해졌다.
사실 전열 보병 전술이 극대화되려면 가혹한 군기와 통제가 필수이다. 영국 전열보병 레드 코트가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두 가지 요인은 실탄 사격 훈련과 엄정한 군기였다.
쌍령 전투의 경포수들은 기본적으로 사냥꾼들이었던만큼 화승총을 다루는 데에는 익숙했으나 군기가 부족했다. 이런 군기를 잡는게 지휘관인데 전투 직전 목이 잘려나가고 교체되면 군기고 뭐고 없게 된다. 참고로 레드 코트들의 엄격한 군기는 엄중한 형벌에 기반했는데, 그 정도가 '확실하게 맞아 죽는 후퇴를 하느니 확률적으로 살 가능성이 있는 전열을 지킨다'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철저히 규정에 따른 것으로서 가혹 행위로 보아서는 안된다.
어떠한 행위에는 태형 몇 대라는 식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순신 장군 또한 해전에서 멋대로 포격을 감행한 장수들에 대해서는 최소 참수형을 시행하였다. 군대에 있어서 통제가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보인다.
3. 기타
병자호란 부분은 대략 어떤 전투들이(승전, 패전을 가리지 않고) 벌어졌는지 지도로 표기가 안되어 있기에 교과서에는 대개 실려있지 않다. 심지어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승리한 승전인 광교산 전투 와 자모산성 전투도 실려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