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삼국의 역사서는 지금도 열도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 일부를 일제시대때 남당 박창화라는 분이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필사해 왔고, 10여년 전에 국사편찬위에서 pdf파일로 공개한 적이 있지요.
구글에서 '화랑세기'나 '高句麗史略' '高句麗史抄' '芻牟鏡' '乙弗大王傳'등으로 검색하면 그 원문과 번역문들을 볼 수 있을겁니다.(오역투성이긴 하지만)
이 문서들을 위서나 소설로 치부하는 건, 읽어보지도 않고, 원문 독해도 안되는 사람들의 주장일 뿐이죠.
삼국사기에 기록된 봉상왕의 이름 '歃矢婁'를 남당의 해당 사료에서는 모두 '矢婁'로 적고 있는데 을불대왕전에 보면 '揷矢婁'의 유래가 나옵니다.
“......그 때에 경도(京都)에도 역시 큰 눈(大雪)이 내렸는데 도성사람들이 모두 눈사람(雪人)을 만들어서 “을불태자(乙弗太子)”라 말하며, 혹은 수레에 싣고 거리를 행진하니 시민(市人)들이 다투어 절을 하면서 “우리 천자(吾天子)”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를 체포하려한즉 뿔뿔이 흩어져 간곳을 모르고, 다만 수백개의 큰 눈사람(大雪人)을 궁안(宮中)에 잡아다 놓았다.
왕이 노하여 그것을 불사르도록 명했다.
역부(役夫) 수백명으로 하여금 각기 큰 횃불(大炬)을 들게하고 “을불은 마땅히 이 눈처럼 사라져라.”하고 빌게 했다. 그 중에 몇 사람이 크게 외쳤다.
“을불이 마땅하지 않은가? 을불이 마땅히 왕이다! 연태자(椽太子)가 마땅히 이 눈처럼 사라져라.”
그러자 무리(衆)들이 모두 일제히 따라 외쳤다.
왕이 노하여 그 선창(先呼)한 자를 체포토록 명하자 무리들 모두가 횃불을 든 채 뿔뿔이 달아나므로 화연(火烟)이 궁안에 가득 차서 궁인(宮人)들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갑자스런 와중(忽閒)에 잘못하여 궁중에 실화(失火)하니 불길의 기세가 매우 급하였으나 불을 끄는 자가 없었다. 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그 체포를 중지시켰다.
그 눈사람들을 보니 혹은 ‘椽太子’ ‘顔太子’라 써 있고, 혹은 ‘揷矢婁’라 써 놓았는데 팔을 자르거나 눈을 뚫고, 혹은 머리를 끊고 가슴을 파고 코를 깎거나 입을 지졌으며 또한 ‘主上可殺(주상을 죽일 것이다)’라고도 써놓았다..........(을불대왕전 중에서)”
위에서 ‘揷矢婁’는 ‘矢婁에게 화살을 꽂(揷)아라.’ 즉 ‘주상을 죽여라’의 뜻을 矢婁라는 이름 앞에 ‘揷’자 하나를 붙여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죠. 촌철살인입니다.
아마 이 揷矢婁가 유명해지다보니 역사에서 본명 矢婁 대신 아예 ‘揷矢婁’라는 이름이 전한 것이고, 이것이 또 와전된 것이 삼국사기의 ‘歃矢婁’라 할 수 있겠지요.
3월, 왜주(倭主)가 그 아들 맥수(麥穗)를 보내어 딸을 후궁(後宮)에 납(納)하고 (표를 올려) 가로되 “신(臣) 인덕(仁德)은 멀리 바다 위(海上)에 있어 해(日)와 더불어 구존(俱存)하나, 아직 황화(皇化)에 젖지 못하여 길이 마음(長心)이 결연(缺然)하였습니다. 얼핏 풍문에 듣건대(仄聞) 황제폐하(皇帝陛下)의 덕(德)은 삼황(三皇)을 겸(兼)하고, 공(功)은 오제(五帝)를 넘으니(過), 5부 8맥(五部八貊)이 자래첩복(子來妾伏)하여 남(南)으로는 삼한(三韓)을 삼키고(呑) 서(西)로는 두 진(二晉)나라를 제압하였습니다(壓). 신(臣)에게 딸을 바칠 것을 명하사, 길이 신(臣)의 나라(邦)를 주재(主)하며 세세(世世)토록 친척이 되라(作親)하시니 신(臣)은 두렵고도 기뻐서 몸 둘 바(所措)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규전(嬀典)을 따라 감히 두 딸(二女)을 바치오나 아름다운 구의(媾儀)가 못되어, 실(實)로 부끄러운 도습(島習)이오니, 버리지만 않으면 다행(幸)이겠습니다.”하였다. 상(上)이 누가 지었는가 묻자 사신이 답하기를 “맥군(貊君) 문장(文藏)이 지었습니다.”하였다. 대개 우리 사람이 들어가 그 스승(師)이 되었던 것이다. 상(上)이 연도(淵鞱)에게 말하기를 “왜(倭)가 우리에게 배운 것이 불과 50년인데 그 진보가 이러한데 우리나라는 문(文)을 닦은지 3백년이나 오히려 이보다 못하지 않은가?”하자 연도(淵鞱)가 말하기를 “문(文)에 주력(主)하면 무(武)가 흐트러지고 무(武)에 주력(主)하면 문(文)이 흐트러지니 바로 양난(兩難)입니다. 신(臣)이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에 가서 한인(漢人)들의 문자를 해득하는 자를 보면 백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금수(禽獸)의 행동엔 차이가 없으니 백년대계는 초초(草草)하게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하였다. 三月, 倭主遣其子麥穗送女納後宮, 曰 “臣仁德, 遠在海上 與日俱存 未霑皇化 長心缺然 仄聞 皇帝陛下 德兼三皇 功過五帝 五部八貊 子来妾伏 南呑三韓 西壓二晋 命臣納女 永主臣邦 世世作親 臣惧且喜 不知所措 謹從嬀典 敢献二女 不腆媾儀 實愧島習 不棄是幸” 上, 問其誰作. 使曰“貊君 文藏作也.” 盖吾人之入為其師者也.” 上謂淵鞱, 曰 “倭學于我不過五十年, 其進與此. 我國修文三百年反不如是耶.” 鞱曰 “主文則武觧, 主武則文觧. 以是兩難. 臣徃幽 冀, 漢人之觧字者百無一焉. 禽獣之行無有差焉. 百年大計, 不可草草為也.” 《고구려사초- 영락대제기 12년 기묘 -》
↑ 위와 같은 내용들이 남당의 창작이라면 참 대단한 천재지요. 아마 톨스토이 백명이 와도 못 당할 겁니다. 총 30종이 넘는 남당 문서의 내용들을 읽어보면 그것이 인간 대가리로 창작할 수 있는 문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왜 이런 사료들이 이 땅에서 완벽히 말살될 수 밖에 없었는지도 알게 됩니다.
넘사벽이 아닌 넘륜벽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