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구체적 내용은 시간 날때 함 올리겠습니다만
잽의 근대화 과정을 고찰함에 오늘날 일반인이나 친잽매국파와 잽극우들
의 심각하고 왜곡된 논리나 혹은 시각이 잽은 마치 근대화를 완연히 이루고서 대한제국
을 강점했다는 식입니다.(이건 잽강점기 식민사학의 전형으로 마치 잽은 초
기부터 모든 면에서 압도적 사회발전상과 우위속에서 미개한 조선을 근대화
해주었니 하는 캐소리와 맞물려 심각히 왜곡된 선입견을 지금까지 낳고 있는)
뒷늦게 나마 본격적으로 급속한 근대화의 의지와 추진력을 가졌던 대한제국
이 도시 정비사업중에 이룩한 가로등 전기사업 및 특히나 근대적 교통수단
으로 1899년 처음 도입된 <전차 사업>만 보더라도 잽보다 3년을
앞서고 있습니다. 이런게 뭘 말하겠습니까?
잽은 미 페리제독에 의해 너무도 허약하리만치 강제개항을 당하면서 에도
막부의 무능과 권위가 실추되었고 무엇보다 이 당시 자작농의 붕괴나 질낮
은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고인플레이션등으로 에도 후기로 갈수록 농민의
반란횟수가 증가하고 급증하는 인구에 비해 식량생산은 이를 바쳐주지 못하
면서 대다수는 상당한 빈곤과 폭정에 시달렸습니다.(이에 따른
밀집 가옥으로 인한 대화재 빈번과 전염병도 만연)
이런 시대상황에서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이룩한 근대적 면모라는건
사회전반적 근대화가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저 북한같은 관치 주도 군수쪽
에 치우친 기형적 개혁이 압도적이였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전근대적 봉건적 잔재
와 사회전반적 발전과 국민의 생활 질 향상과 계몽보다는 앞다투어 이런 군
수몰빵에 주도했으니 이보다 본격적 근대화가 늦은 대한제국보다 사회의
여러 면에서는 도리어 뒤늦은 근대화상과 지금도 전국 수많은 곳에 천민부
락쿠같은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버금가는 전근대적 봉건적 차별 계급마을이
여전하고 왜왕제같은 영국과는 달리 거의 김일성 우상화에 버금가는
전범 극우의 다분한 정치적 의도성에 따른 신격화같은 전근대적 우상화도
여전하죠.(이런 상황에서도 이미 조선 후기에 가면 거의 유명무실해지는 조
선 자체내의 양반계급의 붕괴와 대한제국 시기 제도적으로 이미 양반 천민
의 구분이 없는 제도상에 전국 교육제도등은 쏙 빼버리고 21세기도 후진적
봉건 차별 사회를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 잽사회가 대한민국을 무슨 신분사
회에서 개화시켰니 캐소리 쳐하고 있는)
그리고 두번째 알아야 할 것은 잽의 난학이니 어쩌고를 대단히 크게 부과시
키고 과장하는 건 지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엄연히 에도시대에는 기독교 문제등으로 인해 쇄국주의가 에도 막부의 대외
정책이였음. 그나마 이런 종교 부분에 연연하지 않았든 네덜란드만 나카사
기 일부 지역 협소한 창구를 통해서 교류를 했다는 것이지
도리어 에도시대의 가장 큰 사회 영향력과 대외적 공식적 인지도는 우리의
<조선통신사>를 통한 정치,문화,경제 교류 정책입니다.(서구인과의 빈번
한 교류와 인적 대외 창구들은 저 청이 훨씬 다양하고 높았음)
도요토미가 전국을 통일해도 이건 전형적 불안전한 힘의 논리였고 이후 도
쿠가와가 들어서 에도막부가 조선 통신사를 통해 관료주의 중앙집권화를 추
진하지만 이것도 상당한 시간과 메이지 유신 이후의 번을 좀 더 타이트하게
묶기 전까지(현으로) 과도적 느슨한 형태라고 보면 됩니다.(물론 이런 메이지 유신
이후의 중앙집권적 강화도 에도의 이런 과도기적 관료사회 지향의 긍정적
정책과 과도적 사회시스템이 어느 정도 바쳐주었기 때문이겠죠)
하여튼 네덜란드라는 직접적 통로가 있었다는 정도이지 이것이 에도시대 잽
사회 전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보편적 수용 인식이였거나 어떤 상당한 성
과를 냈다는 식은 과장입니다. 도리어 어설프게 제조한 양약이 독에 버금가
서 죽는 황당한 경우도 있었고 이에 반해 조선의 한의학은 오랜 임상병리적 경
험과 안전성에서 훨씬 체계적이고 우위에 있었음.
잽극우들이나 빠돌이들이 난학하면 퍽 나오는 인체해부학서 어쩌고인데( 서
적정도가 들어왔다 뿐이지 실제 이들이 절개 외과수술을 했고 실질적 상당
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드라마에서 나온 마의의 경우처럼 이미 조선시대 실제 인물인 17세기 숙종
시기의 백광현같은 인물도 단순히 침 놓은 정도에서 벗어나 농침이라는 침
이란 단어를 사용했지만 엄연히 칼 모양을 하고 있었고 곡침은 끌개
모양으로 종기등이 전문이였지만 실제 절개의 시술로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이것도 이 양반이 시초가 아니라 앞선 선대의 임언국이라는 인물을 통해
전수 계승된 것이죠(고려시대에도 이미 존재)
그리고 백광현 이후 그의 아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더욱 진화했고 오늘날
양의학의 급속한 기술적 진보와 외과수술은 1,2차 대전을 통해 괄목
성장한 것이지 서구에서도 본격적 최초의 외과 수술은 겨우 19세기 중엽에
지나서 조금씩 본격화, 발전하고 있던 단계였음. (19세기 중기 이후부터는
외상의 치료 이외에 내장의 고장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수술적 치료를 시도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G. 시몬에 의한 신적출술(腎摘出
術: 1869), T. 빌로트에 의한 위절제술(胃切除術: 1881), C. 랑겐벡에 의한
담낭적출술(膽囊摘出術: 1882) 등이 연속하여 행해졌다.
잽이 서구 의학이나 외과부분에서 실질적 어떤 위치에 올라있었다는
식으로 묘사될 부분도 전혀 아닐 뿐더러 이미 우리도 19세기 말에 가면 제중
원이라는 드라마에서도 소개된 조선 최초의 공식적 해부학 강의는 1885년
알렌에 의해 실시되었고 우리의 대한제국 시기에 이미 서구식 대한제국 양
의사들도 자체 배출되고 근대적 서구병원도 자체 도입된 상황이였습니다.
한마디로 대한제국과 잽간의 사회 전반적 근대화 양상이나 발전상은
딱히 잽이 무슨 전반적 우위나 압도적 부분도 전혀 아니였고
단지 미국에 이른 강제개항으로 북한같은 관치 군수쪽에 기형적으로
집중된 서구의 근대적 무기를 빠르게 도입하면서 이런 무력을 통한 약탈 경
제식과 러샤에 대항하기 위한 미,영등에 의해 자본지원등이 되면서 도리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고서(인적,물적,자원의 대대적 수탈과정을 통해) 탄
력을 받아 근대화, 공업화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되는 양상이라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