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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03 04:37
[한국사] 송사 열전 외국편에 실린 고려에 대한 기록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787  

고려 관련 기록을 이리저리 찾아읽다가 이 기록을 발견하여 공유하고자 올립니다.

부정확한 사실내용도 일부 보입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의 내용과 유사한 것이 많아서 고려도경의 축약본이라고 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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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史』卷487 列傳246 外國3 高麗

경원(慶元) 연간(1195~1200)에 조서를 내려 상인(商人)들이 동전(銅錢)을 가지고 고려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였으니, 무릇 〈고려와의 관계를〉 끊은 것이다.

일찍이 고려의 사신이 들어오면 명주(明州)와 월주(越州)는 그들의 대접으로 곤란하고, 조정(朝廷)은 관우(館遇), 연회(燕會), 하사(下賜) 등의 비용이 수만(數萬)을 헤아리는데, 〈여기에〉 고려왕(高麗王)에게 하사하는 예물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사신이 〈고려에〉 가면 매번 두 척의 신주(神舟)를 탔는데, 그 비용 역시 막대하였다. 삼절(三節)로 〈임명된〉 관리(官吏)들이 자기 관직에 따라 봉록(俸祿)을 덜어서 모두 縣官에게 맡겼다.

예전에 소식(蘇軾)이 선조(先朝)에 고려가 들어와 조공하는 것은 다섯 가지 손해만 있다고 말한 것이 이것이다. 생각하니 나라가 오회(吳會)에 있은 후부터는 상황이 동도(東都) 때와 달라졌다. 예전에 고려가 사신을 들여보낼 때에는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를 거쳐서 길이 매우 멀었지만, 지금은 바로 사명(四明)으로 오니 사명(四明)에서 행도(行都)까지의 거리는 절수(浙水) 하나만이 경계일 뿐이다.

바닷길로 사행이 고려에 가자면 바다가 망망하고 섬들이 험하여 폭풍이라도 만나면 배가 암초(暗嶕)에 부딪쳐 파손되고, 급수문(急水門)을 나가 군산도(群山島)에 닿아야만 비로소 무사히 도달하였다고 하니, 수십 일이 걸리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한다. 배가 남쪽이나 북쪽으로 운행하여 순풍(順風)을 만나면 험한 곳을 평지처럼 통과하여 며칠 안 걸려서 도달한다.

고려는 동서의 거리가 2천리이고 남북의 거리는 5백리이며, 서북쪽은 거란(契丹)과 접하니 압록강(鴨綠江)을 견고하게 여겨 의지하는데 강의 너비는 300보(步)이다. 고려의 동쪽은 가는 곳마다 바닷물이 맑아 물 속으로 10길이 보이며, 동남쪽에서는 명주(明州)가 바라보이는데 물이 모두 푸르다. 왕은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 사는데, 개성부(開成府)라 한다.

큰 산에 의지하여 궁궐을 짓고 성을 쌓으니 그 산의 이름을 신숭산(神嵩山)이라 한다. 백성들의 거처는 모두 띠집으로서 큰 집이면 2칸 정도이며, 기와로 이은 집은 겨우 열에 두 집이다. 신라(新羅)를 동주(東州) 낙랑부(樂浪府)로 삼아 동경(東京), 백제(百濟)를 금주(金州)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아 남경(南京), 평양(平壤)을 진주(鎭州)로 삼아 서경(西京)이라고 부르는데, 서경(西京)이 제일 번성하였다. 통틀어 모두 3경(京), 4부(府), 8목(牧)이며, 군(郡)이 118개, 현(縣)과 진(鎭)이 390개, 섬이 3,700개이다. 작은 군읍(郡邑)은 간혹 100가(家)이다.

인구는 총 210만명으로, 병사, 백성, 僧侶가 각각 3분의 1이다. 기후는 춥고 산이 많으며 토질은 소나무나 잣나무에 적합하고, 메벼[秔], 기장[黍], 삼[麻], 보리[麥] 등은 있어도 차조[秫]가 없어 멥쌀로 술을 빚었다. 누에[蠶絲]가 적어 비단[縑] 1필(匹)이 은(銀) 10냥(兩)이므로 삼베나 모시, 베를 많이 입는다.

王이 거동할 적에는 멍에를 맨 소의 수레를 타고, 험한 산을 넘을 때에는 말을 탄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앞에 서서 『호국인왕경(護國仁王經)』을 받들고 인도한다. 명령을 내리는 것을 교(敎)와 선(宣)이라고 하였다. 臣民들은 〈임금을〉 성상(聖上)이라 부르고 사사로이는 엄공(嚴公)이라고 불렀으며, 후비(后妃)를 궁주(宮主)라고 불렀다. 백관(百官)의 명칭과 계(階), 훈(勳), 공신(功臣), 검교(檢校) 등은 자못 중국과 비슷하였다.

어사대(御史臺)를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려야 하며. 이를 위반한 사람은 탄핵하였다. 사인(士人)들은 족망(族望)이 높은 것으로 견주어서 유(柳), 최(崔), 김(金), 이(李)의 4성(姓)을 귀종(貴種)으로 여긴다. 환관(宦官)이 없고 세족(世族) 자제들로 내시(內侍)와 6위(衛)를 삼는다. 매년 12월 초하루에 왕이 자문(紫門)의 작은 전(殿)에 앉아서 관원들을 임명하고, 외관(外官)은 재상에게 맡겼다. 국자감(國子監)과 사문학(四門學)이 있어 학생이 6,000명이다. 공사(貢士)에는 3종류가 있는데, 왕성(王城)은 토공(土貢), 군읍(郡邑)은 향공(鄕貢), 외국인(外國人)은 빈공(賓貢)이라고 하였다. 해를 건너[間歲] 소속된 곳에서 시험을 치르고, 다시 태학(太學)에서 시험을 보이는데, 선발된 사람은 3~40명을 넘지 않고, 이런 뒤에 왕이 직접 시(詩), 부(賦), 논(論)의 세 가지 제목으로 시험보는데, 이를 염전중시(簾前重試)라 하였다. 또한 제과(制科)와 굉사과(宏詞科)라는 명목은 있었으나 다만 문구일 뿐이다. 선비들은 성률(聲律)을 숭상하여 경전(經傳)에 통달한 사람은 적다.

왕성(王城)에는 중국인이 수백 명 있는데, 장사 때문에 배타고 간 민(閩) 지방 사람들이 많았다. 〈고려는〉 몰래 그들의 재능을 시험하고 벼슬을 주어 유혹하거나 강제로 일생을 머물게 하기도 한다. 조정(朝廷)에서 사신이 갔을 때에 첩(牒)을 올려 하소연하는 사람이 있으면 데리고 돌아왔다.

백관(百官)에게 쌀로 봉록(俸祿)을 주고 모두에게 밭을 지급하여 〈생산된〉 곡물을 받아 절반을 지급하고, 〈관리가〉 죽으면 바로 거두었다. 나라에는 사전(私田)이 없고, 백성들에게 식구를 계산하여 직업을 맡겼다. 16세 이상이면 충군(充軍)되었으며, 6군(軍)과 3위(衛)는 항상 관부(官府) 머물러 있고, 3년마다 군사를 뽑아 서북 지방을 지키도록 하여 반년마다 교체시켰다. 변란이 있으면 무기를 잡고, 일이 생기면 노역(勞役)에 종사하다가 일이 끝나면 복귀하여 농사를 지었다. 王도 분배된 토지가 있어 사사로운 비용에 충당하고, 왕모(王母), 비주(妃主), 세자(世子) 모두 탕목전(湯沐田)을 받았다.

상하의 백성들은 모두 장사하여 이익을 보는 것을 일삼아 한낮에도 〈자리를〉 비우고, 쌀이나 베로 교역하였다. 땅에서 구리가 생산되나 돈을 주조할 줄 모르고 중국에서 준 돈을 부고(府庫)에 간직하고는 때때로 꺼내어 돌려가면서 구경할 따름이다. 숭녕(崇寧) 이후에 비로소 돈을 주조하는 기술을 배워 해동통보(海東通寶), 중보(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등 세 종류의 돈을 주조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그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무기는 간단하여 강노(强弩)나 대도(大刀)가 없었다.

불교(佛敎)를 숭상하여 비록 임금의 자제일지라도 항상 한 사람은 승려가 되었다. 귀신을 신봉하고 음양설(陰陽說)에 얽매여 병을 앓으면 서로가 보지도 아니하고 염습(歛襲)할 때에는 관(棺)을 어루만지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이 죽으면 들판에 그냥 버려두었다. 해마다 건자월(建子月)이면 하늘에 제사지냈다. 나라 동쪽에 구멍[穴]이 있어 수신(禭神)이라고 부르고, 언제나 10월 보름이면 〈수신을〉 맞이하여 제사지냈는데, 팔관재(八關齋)라고 이름 하였다. 그 의식(儀式)이 매우 성대하여 왕은 비빈(妃嬪)들과 함께 루(樓)에 올라 크게 풍악을 울리면서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고, 상인(商人)들은 비단으로 장막을 만드는데, 100필이나 연결하여 부유함을 과시하였다. 3년마다 크게 제사를 지내는데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이를 기회로 백성들에게 재물을 거두어 들이고는 왕과 신하들이 나누어 가졌다.

 〈왕실〉 조상 묘(廟)는 도읍(都邑)의 성문 밖에 있어 대제(大祭)에는 수레와 의복, 관, 규[車服冕圭] 등을 갖추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 도성에 사찰은 70곳이 있으나 도관(道觀)은 없다. 대관(大觀) 연간에 조정에서 도사(道士)를 보내자 비로소 복원원(福源院)을 건립하여 우류(羽流) 10여명을 두었다. 풍속이 의술(醫術)을 모르다가 고려왕 왕오(王俁)가 〈송나라에〉 醫員을 요청한 이래로 비로소 의술(醫術)에 통한 사람이 있었다.

〈고려〉 사람들은 머리는 침골(枕骨)이 없고 등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남자들의 건책(巾幘)은 중국 것과 모양이 같고, 부인(婦人)들의 타계(鬌髻)는 오른쪽 어깨에 늘어뜨리고, 나머지 머리는 아래로 늘어 뜨려 붉은 비단으로 묶고 비녀를 꽂았다. 치마를 겹겹이 입고는 〈치마가〉 많은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남녀(男女)가 자기들끼리 부부(夫婦)가 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고 여름철에는 한 시냇물에서 목욕하였다. 부인(婦人)과 비구[僧], 비구니[尼]들이 모두 남자처럼 절을 하였다.

음악은 소리가 매우 저급하여 금(金), 석(石) 계통의 소리가 없으며, 〈송나라가〉 악기를 하사한 후에야 좌우 2부로 구분하여 만들었으니, 좌부(左部)는 당악(唐樂)으로 중국 음악이며, 우부(右部)는 향악(鄕樂)으로 옛날부터 익혀온 것이다.

마루 위에 자리를 깔고, 마루에 올라가면 반드시 거기에다 신을 벗어 놓는다. 어른을 뵐 때에는 무릎으로 다니고 반드시 꿇어 앉으며, 부르면 반드시 즉시 대답하였다. 절을 하면 모두 답배(答拜)하였으니 자식이 절을 하여도 아버지가 반절로 답하는 것이 예의였다. 성품이 인자하고 유순한 까닭으로 살생(殺生)을 싫어하여 짐승을 도살하지 못하고, 양고기나 돼지고기가 먹고 싶으면 그 짐승을 짚으로 싸서 불살라 먹었다.

형벌에 참혹한 조항은 없고 오직 역적이나 부모에게 욕한 자는 목을 베었으며, 그 나머지는 곤장으로 갈빗대를 때렸다. 지방의 군현(郡縣)이 사형수(死刑囚)를 모두 왕성(王城)으로 보내면 해마다 8월에 사죄(死罪)를 감하여 섬으로 귀양 보냈다가 여러 차례 사면(赦免)을 하고 〈죄의〉 경중(輕重)을 보아 석방하였다.

명주(明州)의 정해현(定海縣)에서 순풍(順風)을 만나면 3일 만에 큰 바다 가운데로 들어가고, 다시 5일이면 흑산도(黑山島)에 도달하여 고려 경계에 들어간다. 흑산도에서 섬들을 지나 암초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고 나아가면 배의 운행은 매우 빨라 7일 만이면 예성강(禮成江)에 다다랐다. 예성강은 양쪽 산 사이에 있는 석래(石崍)로 끼어있어 강물이 소용돌이치면서 흐르는데, 급수문(急水門)이라 부르고 제일 험악한 곳이다. 또 3일이면 연안에 닿는데,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객관(客館)이 있어, 사신은 여기에서부터 육지에 올라 험한 산길을 40여리쯤 가면 이에 국도(國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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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과 고려의 관계
두산백과 :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186746&cid=40942&categoryId=33382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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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시러 17-11-03 05:08
   
잼나네요
인류제국 17-11-03 07:30
   
고려가 왕으로 기록이됐다는것은

원나라때 편찬된거군요


고려는 황제국이었는데

원나라의 등장으로 황제에서 왕으로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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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의묘지명(1223년)

중성(中城)을 [?]해서 황도(皇都)의 울타리로 삼았다.
최항묘지명(12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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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황제가 첩장을 헌상했다고 대재수가 전했습니다.'
미나모토노 토시후사의 '수좌기 승력 4년(1080년)'

권지고려국사 왕순(현종)이 고주사 윤증고 및 여진장군 대천범 이하 무릇 78인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순이 표하여 말하기를
"거란이 도로를 막아 오랫동안 통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황제 존호와 정삭을 내려주십시요" 조하여 청을 따랐다.
속자치통감 대중상부 7년(1014년)
 
대금황제(大金皇帝)가 고려국황제(高麗國皇帝)에게 글을 부친다
제왕운기(1287년)
     
비좀와라 17-11-03 08:02
   
원래 역사책은 후대를 승계하는 왕조가 편찬함요.

그리고 현종때 5도 양계를 설치 하는데 5도가 고려왕 직할령이고 양계는 고려황제의 영토임.

그래서 양계의 군인들은 세습군인 으로 이 들의 수장은 지방영주가 되는것이고 이들을 정군사로 불렀음. 후일의 정방은 이들의 의회같은 것임.

고려는 원과 싸움에서 홍다구 등의 양계지역 영주들의 배신으로 이들 영토를 상실함.

이 시기 부터 황제가 아닌 왕이 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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