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우 북한학설을 접하기 전에도 낙랑 평양설이나 요서설이 타당하다고 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세 가지
1. 한나라나 신나라, 진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낙랑군이 고구려에 포위된 상태에서 몇 백년간 유지되려면 평양 위치는 불가...왜냐하면 본국과 떨어져 있으면서 교통로까지 막힌 상태에서 적국인 고구려 포위되면서 몇 백년간 군현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
2. 기원전 해로는 연안항로로만 이동하였지 원양을 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만약 평양에 낙랑이 있었다면 육지가 보이는 서한만의 연안을 따라 중원왕조와 소통하였을텐데 고구려 수군이 빤히 보이는 낙랑군의 배를 그냥 두고 볼리 만무했을 것임
3. 만약 우리 나라 재야 사학계에서 말하듯 요서지역에 낙랑 등이 위치한다면 중원가 붙어있었기에 낙랑은 중원의 직할지배를 받았을 것이 분명하였을 거임...그러나 낙랑군은 중원의 왕조가 바뀌었어도 오래 존치했다는 것은 중원의 구심력과 변방식민지로서의 원심력이 적절히 작용하는 위치여야 하는데...그런 점에서는 요서도 안 맞음
결국 가장 타당한 위치는 요동반도 끝단...여기는 산동반도로 이어지는 섬들이 열을 지고 있어 시계에 의한 항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넓은 바다를 건너는 것이 가능한 유일한 곳...그래서 낙랑군이 여기에 위치했다면 중원과 지리적으로는 떨어져 있고 고구려에 외곽이 포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해로로 용이하게 연락이 가능한 위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해방 이후 북한이 엄청나게 발굴한 평양의 유물이 평양이 낙랑군이 아니라고 하다는 것...물론 서울에 안 가본 사람이 서울을 더 잘 안다는 식으로 우리 남한 쪽 같기도 하지만...
참고로 많은 사람 들이 기원전후 싯점에 원양항해가 가능하다고 생각들 하지만...실제 불가능
역사부도에 보면 양자강에서 왜의 큐슈로, 그리고 산동반도에서 평양이나 광양만으로 바로 항로를 연결하는 것이 많지만...이는 5세기 이후 쯤인 한참 후의 이야기...
우리 나라도 중원 쪽과 연결은 원삼국 말기 때부터나 가능하였고, 본격적인 원양항로(바다를 가로 지르는...)는 양나라와 통교했던 백제의 무열왕 때나 통일신라 장보고의 청해진 때나 가능하였음...결국 4세기 이 전 시에는 불가능했다고 보는게 맞을 듯(그 전에 가능하였다고 하더라도 목숨걸고 바다를 가로지를 이유는 없었을 듯...)
왜의 경우는 8~9세기 때도 불가능 했음...그래서 왜의 옌닌이 중원을 갈 때도 장보고 선단의 도움을 받아야 갈 수 있었을 정도 (왜가 수당사나 견당사를 보내는 8세기 전후 싯점 이들의 항로는 류큐 쪽의 섬을 징검다리 삼아 중원으로 들어갔을거로 추정)
나침반도 없던 시기에 조각배 타는 사람 들이 무슨 프로티어쉽이 있어 육지가 보이지도 않는 바다로 나갔겠음?
그리고...지도 상으로는 무진장 가까워서 쉽게 선을 긋는데...특히 지리감각이나 지리에 대한 지식 없이 비정하기 좋아하는 얼치기 역사학자 들이 해로를 쉽게 선긋는 것이 그런 편인데...
우리 나라 주변의 해류는 동서로 흐르지 않음...바람은 북서풍이 있다고 하더라도...태풍이 올라오는 시기가 아니면 남동풍 등을 기대하기 어려운데...설마하니 태풍올 때 중원 쪽으로 가는게 아니었다면...배가 커지고 항해술이 발달하기 전에 중원과 한반도, 왜가 해류나 바람으로 동서로 항해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
그리고 후대에 있어서도 산동반도에서 황해도로 오는 해로는 매우 위험하였다고 함....그래서 심청전에서처럼 임당수(연평도 군처)에 젊은 처자를 바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