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고찰에서 분명하여진 것은 난하의 중하류 동부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후에 그 지역이 서한에 복속된 후 그 곳에 조선현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상왕국에서 국명과 동일한 商(상)이라는 명칭의 읍이 있었고, 서주왕국에도 국명과 동일한 周(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宗周(종주)와 成周(성주)가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고조선에도 국명과 같은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낙랑군에 속해있던 25개 현 가운데 하나였고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영역에 설치되었던 낙랑.진번.임둔의 3군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조선의 크기는 위만조선 전체 면적의 75분의 1 정도의 좁은 지역이었던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조선이라는 지명이 어떤 연유로 붙혀졌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으나 중국인들에게 그 지역이 고조선의 상징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해졌던 곳으로 전해온다”고 하였는데, 명시대의 영평부에는 난주,노령현,천안현,무녕현,창려현,낙정현 등이 속해 있었으며 난하 하류유역에 있었다. 이로 보아 명시대의 영평부에 있었던 조선성은 앞에서 언급된 여러 문헌에 나타난 조선 지역에 있었던 성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중국지역과의 국경지대에 있었으므로 대중국 방어용이었을 것인데 그 곳에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필자는 기자가 이주했던 곳은 고조선의 서부 국경지대에 있었던 조선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게 되면 일연의 “삼국유사”와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고조선과 기자에 관한 내용이 무리없이 풀려 나가게 되고 그 기록이 정확한 것임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