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濊)는 북쪽으로는 고구려(高句驪)· 옥저(沃沮)와,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大海)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조선(朝鮮)의 지역이다.
일찍이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조선(朝鮮)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팔조(八條)의 교(敎)를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아
[밤에도] 문을 닫지 아니하고, 부인(婦人)들은 정절(貞節)을 지키며 음식은 변두(籩豆)를 사용하여 먹었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조선후(朝鮮侯) 준(準)에 이르러 스스로 왕(王)이라 칭하였다.
한초(漢初)의 대혼란기에 연(燕)·제(齊)·조(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준(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조선(朝鮮)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우거(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게다가 동이를 오랑캐라고 하는 표현은 식민사학의 주장일 뿐이고, 정사의 기록은 전혀 다릅니다.
더더욱 희한한 것은 연나라에 대한 평가도 정 반대입니다.
위만같은 쓰레기가 가서 아름다웠던 조선을 완전히 망쳐놓았다고 적었죠.
8. 찬자평(撰者評) (후한서 동이열전 8번 찬자평)
1) ○ 논(論)한다.
옛날 기자(箕子)가 쇠망하는 은(殷)나라의 운수를 피하여 조선(朝鮮) 땅에 피난하였다.
처음엔 그 나라의 풍속이 알려진 바 없었으나, 팔조(八條)의 법(法)을 시행하여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게 하니, 마침내 그 읍락(邑落)에 음란한 행동과 도둑이 없어져서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악하고 나쁜 풍습을 바꾸고 너그럽고 간략한 법을 이루어 수백년 동안 행하여졌다.
그러므로 동이(東夷)의 전체가 유근(柔謹)으로 풍화(風化)되어 삼방(三方)의 풍속과는 다르게 되었으니,
진실로 정교(政敎)가 창달되면 도의(道義)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중니(仲尼)가 분연히 구이(九夷)에 가서 살으려 하였더니 어떤 이가 그곳은 더러운 곳이 아닌가 하므로,
공자(孔子)가 ‘군자(君子)가 살고 있으니 어찌 그곳이 더럽겠는가’ 한 것도 특히 그런 까닭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 뒤 드디어 [중국과] 통상을 하게 되고 점차 상국(上國)과 교역하더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그들의 풍속을 어지럽히자, 이에 [그들도] 따라서 나빠지게 되었다.
공자(孔子)가 ‘군자(君子)가 살고 있으니 어찌 그곳이 더럽겠는가’ 한 것도 특히 그런 까닭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 뒤 드디어 [중국과] 통상을 하게 되고 점차 상국(上國)과 교역하더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그들의 풍속을 어지럽히자, 이에 [그들도] 따라서 나빠지게 되었다.
조선=숙신, 이라는 것 역시 합리적 추측입니다.
만약 조선이 BC. 2333년에 건국되었다면 그와 관련된 문헌이 어떠한 형태로든 남아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동양 문헌에서 '조선'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춘추시대의『 관자 』의 기록입니다.
이는 조선이 건국 이후 1500여년이 지난 후에 중국기록에 처음 등장하였다..라는 걸 말합니다.
현, 주류사학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조선의 건국시기가..과장되었다.. 라고 주장합니다.
언뜻보기에는 합리적인 추측으로 보이나
고고학적 유물들을 보았을 때, 이는 말이 안되는 처사입니다.
왜냐하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 개시 연대가 기원전 25세기 경으로..요하문명을 포함..최근 고고학계에서 연구결과가 쏟아져나오고 있기 때문이지요.
(현 역사교과서에서는 아직 반영이 안됐습니다)
청동기시대에 국가가 탄생한다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폭넓게 사용되는 통설입니다.
즉, 한반도-만주 지역에서.. 최소한 BC 25세기에 국가가 존재했다는 겁니다.
만약, 이 국가를 '조선'이라고 본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왜 조선은 BC 2333년에 건국되었는데 그 이후 1500년 뒤에나 문헌에 등장할까?
우리는 동북(만주) 지역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정치체가 '숙신'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 죽서기년 』을 보면 숙신은 순임금 25년에 활과 화살을 바쳤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후 여러 사서들을 보아도..당시 동북지방에서는 '숙신'이라는 정치체가 있었다고 판단이 되는데..
그렇다면 만주-한반도에 출토되는 청동기문명의 주인공이 '숙신'이라는 것이고
이들을 조선으로 본다면
조선 = 숙신 이라는 명제가 성립합니다.
실제로 숙신과 조선 사이간의 연관성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김정호나 허목..등등으로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던 학설입니다.
이 '숙신'이 요하문명..특히 하가점하층문화의 주인입니다.
고조선 건국연대가 BC. 2333년이라고 한다면..이는 하가점하층문화의 연대와 일치합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청동기 개시연대는 BC. 2410년입니다)
또한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발견되는 곰토템 유물들이..이를 뒷받침합니다.
물론 삼국시대의 문헌기록을 중심으로 하면, 숙신의 위치는 연해주지방으로 비정됩니다. 이것은 현 학계 통설이지요.
다만 '숙신'이라는 정치체가 BC 25세기에 존재했다고 중국사서에서 전한다면
'숙신'의 위치는 중국과 가까이 있는 지역으로 비정될 것입니다.
중국과 저 멀리 떨어진 연해주지방에 '숙신'이 위치했었다면
중국과 숙신이 서로 교섭할리는 만무하겠지요.
또한 만약 숙신이 연해주지방에 존재했었다면
한반도 - 만주 에서 발견되는 청동기유물의 주인은 누구이며
중국은 이 청동기유물 정치체보다 멀리 떨어진 연해주지방의 종족과 교섭을 했다는 말이 되지요.
여러 정황상 숙신의 위치는 동북지역일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위만조선 멸망 이전과 이후의 숙신은 그 위치가 다르게 비정된다는 겁니다.
덧붙여, 추가 잡설로
'고구려'라는 명칭이 '고려'로 약칭됐던 것처럼 '숙신=조선=주신'의 약칭이 '진'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진, 진번, 진국, 진한의 '진'자가 바로 고조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조영이 국가의 이름을 '대진국'이라고 한 것도 그들이 고조선의 혈맥을 이엇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발해 이후, 금나라의 금(金)..중국에서는 'jin'이라고 읽히지요
흔히 만주족의 계승구도를
숙신 - 물길 - 말갈 - 여진 - 금 - 청 - 만주족 으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숙신 = 조선, 진 이며
물길,말갈 = 예맥 = 맥예 = 말갈 이며
여진 = 여'진' = 조선
금 = 金 = jin = 조선
---> 만주족
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삼한의 통치자인 '진'왕..과 삼한이 모인 '진'국 모두 고조선을 말하는 겁니다.
신라의 전신이 '진'한 이라는 것을 보았을 때, 신라의 조상이 고조선이라는 것을 말하지요
진국 = 조선 입니다.
현재 교과서에서는 한반도 북부 - 만주 까지를 조선 , 그 밑에 진국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한반도 남부부터 만주 까지 모두 조선이였던 겁니다.
이는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종휘'의 주장이기도 하지요.
'진국'은 조선의 거수국 혹은 조선 그 자체를 말합니다.
준왕 역시 조선의 거수국 중 하나인 기국(기자조선)의 왕입니다.
이를 친탈하고 왕이 된 것이 위만조선이고
이후 요서지역 전체를 차지합니다.
위만조선 = 고조선이 아니에요.
고조선은 봉건제국가입니다.
위만조선은 고조선..단군조선의 일부일 뿐입니다.
기자조선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한반도 남부부터 만주까지 모두 조선이였던 겁니다.
기자국은 한반도남부 - 만주에 이르는 조선의 강역에서
요서의 일부분을 차지했던.. 조선의 제후국이며
기자국의 왕 준왕을 친탈하고 이어지는 위만조선 역시
조선의 일부분인 요서지역만을 차지했던 겁니다.
따라서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던.. 한사군 역시
요서지역에 위치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