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멸망 후 260년이 지나도 정체성을 가졌던 발해인: 금나라 동경성이 있었던 요양에서 비문이 발견됨, 비문은 1190년 쓰여진 한 스님의 일대기, 스님의 성은 高氏 "東京遼陽縣渤海人" 발해는 926년에 거란의 요나라에 의해 망해서 유민들이 거란의 동경과 상경으로 끌려갔는데, 260년이 지난 1190년에도 여전히 발해인이라 표기함.
b)女眞渤海同本一家: 아골타가 거란과 대적할때 발해인의 동참을 이끌어 내어 요나라에 정벌에 크게기여함. 금국이 건립된 후 많은 발해인들이 관직에 등용되거나 발해여인이 금국과 혼인하여 연합정권형성.
c)북경은 송대에는 변방에 불과했으나 여진은 발해인 장호(張浩遼陽縣渤海人 本姓高氏東明王之後)를 북경건설최고책임자로 임명하였다. 北海公園도 이때 조성한 것이다.
대제국을 다스린 경험이 많은 발해인들이 고위관리층에 등용됨. 금제국건설에 중추를 담당함.
요양은 금대 오대도시중 하나로서 요양박물관에 특별한 비문이 있다.
'통해원명대사의탁명'으로 불리는 비문의 주인공은 관찰사 이후의 따님이시며 태조황제 셋째아들 허왕의 아내 동경유수 정국공의 어머니로 발해인이었다.
정국공은 나중에 금의 황제가 되는데 이가 금의 성군이라불리는 세종황제이다.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 또한 발해인 배씨였다. 이처럼 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의 황실에 시집 을 갔다.
-> 이 때까지는 분위기 좋음
그러나, 금나라 시절의 사료를 확인하면 애초에 금나라의 여진족들은 발해인들을 이질적인 집단으로 취급하며 차별하였다. 만약 발해의 유민, 상당수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금나라의 여진족과 동류의 집단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즉, 발해 주민 상당수는 엄연히 고구려인의 후손이었기에 이토록 길고 끈질긴 항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끈질기고도 긴 항전을 계속했는데도 실패했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2)발해유민의 숙청과 민족청소
여진족도 발해인을 상당히 안 좋게 보거나 매우 경계한 듯한데, 송막기문의 내용을 살피면 대요, 대송 전쟁의 선봉으로 발해인을 사용하는데, 무려 발해군 3만을 동원하고 북송 전쟁이 끝난 후 산동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고, 거란국지에서도 해당 사실을 기록하며 이에 발해인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금사 병지의 기록에도 한족과 발해인을 맹안모극에서 강제로 탈퇴시켜 차별대우했으며, 그 혜택을 국인/내족, 즉 자신들에게 몰아주었다 한다.
금사 희종(熙宗) 본기에서는 거란인과는 달리 그냥 한족 취급을 해서 한족의 글자를 강제한다. 금사 병지에서는 여진, 거란, 한인의 통혼을 허락하면서도 발해인은 아예 기록을 하지 않아 대놓고 없는 취급 내지는 배제를 하며, 금사 세종(世宗) 본기에서도 발해인들은 여진, 거란과는 다르게 형사취수를 금지당하고, 양자를 들이는 것 또한 차단당하며 한족의 풍습을 강제당하는 등 한족과 똑같은 취급을 당했다. 결국 발해인은 한족과 융합을 강요당하며, 민족말살을 당하게 된다.
(발해유민은 거란만도 못한 3등 국민에서, 아예 한족에 강제융합 당함)
3)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이 실패한 이유
(1) 요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결국 한때 같은 식구였던 여진족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인데, 이미 발해시절 흑수부 말갈계 여진의 복속으로, 서로 원한 관계가 깊이 지속되었다는 것이 기록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진족들은 당연히 금나라의 조상인 흑수부 말갈 계열의 여진일 것이다
(2) 각 부흥운동 세력간의 통합적인 전선 구축이 안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저곳에서 부흥운동이 시간차로 일어났지만 결국엔 통합되지 못하고 와해되고 만다. 고구려 부흥운동 당시 대조영과 같은 통합적 리더십을 가진 걸출한 인물이 필요했을 텐데 아마 그런 인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남쪽에서 같은 동류 집단인 고려가 지속적으로 발해 유민들을 흡수한 것이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살던 곳을 떠나 다른곳으로 정착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재산이 풍부한 귀족층들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고려가 흡수한 발해인들은 아마 상당수가 발해의 엘리트 계층들 즉 핵심 인적 자원들이었을 것이며, 위에서 발해부흥운동이 대조영과 같은 뛰어난 인물이 등장하지 못한 것도 고려로 이미 유능한 인재풀들이 많이 유출되었던 게 원인일 수도 있다.
(이 이유를 제시한 것은 정안국 사람들 조차, 고려에 오기만 하면 돌아가지 않았다는 골수의 예를 보 듯, 고려에 빠르게 발해유민들 중 상류층이 집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 발해유민을 여진족으로 표현하거나, 필요해 의해 이용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