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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舊國)과 고향(故鄉), 계루(桂婁)의 교차로 본 발해 홀한성의 위치
1. 구국(舊國)과 고향(故鄉)
요사(遼史)의 기록에는 신당서 발해전에서 언급된 구국(舊國)과 유사한 표현이, 그것도 발해 관련하여 등장한다. 이는 이미 본인의 글 「발해(渤海) 멸망과 동단국(東丹國) 사민(徙民)의 전말(顚末)」에서 소개한 바 있다. 해당 기록을 다시 보자.
■발해 멸망과 동단국 사민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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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顯三年 928년) 12월ㅡ생략ㅡ인황왕(야율아보기의 장자, 동단국왕)이 황도(상경)에 있을 때에 야율우지를 보내어 동단국 백성들을 옮겨 동평(요주 동평군)의 민호로 채우는 것을 보고하였다. 그 백성(동단국)들이 혹은 신라(고려)로, 혹은 여진으로 유입됨(도망감)에 그것을 옮기는 데에 역부족이 되었으므로 상국(요나라)의 허락을 받아서 종속됨으로써 백성을 보존하였다(의역). 동평군을 승격시켜 남경으로 삼았다.。《遼史 卷三本紀第三 太宗上》
오랑캐(발해 유민을 이름)가 번식하여 씨를 뿌리며 번져가는데 지금 거주하는 곳(동단국 수도 천복성, 즉 발해 홀한성을 이름)은 먼 변경에 있어서 후환이 두렵습니다. 양수가 있는 땅은 곧 그들(발해인들)의 고향(본적지)으로서 땅이 넓고 토양은 기름지며 나무와 철과 소금과 해산물의 이득이 있는 곳입니다. 그 백성(발해유민)을 (양수 일대에) 옮겨 살게 하는 것은 만세에 이르는 계책입니다. 저들은 고향을 얻고 또 나무와 철과 소금과 해산물의 넉넉함을 얻으니 반드시 즐거워하며 살 것입니다.《遼史 卷六十七 列傳第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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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우지는 표문에서 발해의 고향(故鄉)을 양수(梁水) 일대라고 말하고 있다. 발해인들을 이곳으로 옮겨 놓으면 반란과 이탈이 줄어들고 생업에 종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수(梁水)는 무경총요를 참고할 경우 현 부신시 서쪽 인근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대릉하로 들어가는 세하(시허강)로 볼 여지는 있으나 요사를 기본으로 하여 볼 경우 현 태자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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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는 동북쪽 산어귀로 나아가 범하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大口)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량하(東梁河)는 동쪽산에서 서쪽으로 흘러 혼하(渾河)와 합하여 소구(小口)가 되어 요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가니, 태자하(太子河)라고 하며 또한 대량수(大梁水)라고도 한다. 혼하는 동량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사하(沙河)는 동남산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개주(蓋州)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또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력(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은 까닭이다. (다시 쓰는 유기 해석본) 《遼史 卷三十八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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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우지의 상소를 거란 태종이 받아들이면서 동단국은 결국 홀한성을 차지한 지 겨우 만 3년이 채 안 되어 거란 동평군 지역으로 쫓겨 가게 된다. 이 후에 야율우지가 발해의 고향이라고 언급한 양수 지역은 숙여진 지역으로 편성되었다. 이는 무경총요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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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서) 동쪽으로 숙여진 지역까지 약 500 리, 서쪽으로 요하까지 150 리이다. 《武經總要前集》
지금 거란의 호적에 등록된 자를 숙여진이라 한다. (숙여진에) 18 주를 설치했(으니 다음과 같)다. 요주, 빈주, 해주, 동주, 교주, 숭주, 흥주, 형주, 가주(하주), 조주, 로주, 빈주(반복돼 기술됐는데 실수거나 다른 비슷한 한자의 오기로 보인다), 우주, 철주, 정리주, 회북주, 록주, 광주 등이다. (숙여진은) 동경의 3면(동, 남, 북)에 거주하는데 모두 임시로 설치( # 僑는 즉 僑置되었다는 뜻인데 이는 중경현덕부 문제를 탐구하며 깊이 다룰 것이다)한 주 이름이며(비록 호적에 등록돼 있더라도 거주 및 활동상이 자유로웠다는 말) 호적(민적)은 각 주마다 1천 가구에서 백 가구에 달한다(대략 5백 ~ 5천 명 규모). 나머지 산림에 의지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생여진이라 칭한다. (# "餘依山林。不服從者,謂之生女真。"는 한 문장으로 해석해야 옳다) 《武經總要前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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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총요에서는 동경과 그 주변의 지리정보를 기술하면서 숙여진 지역을 동경에서 동쪽으로 500 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으나 숙여진에 편성된 18 주의 면면은 실제로는 현 태자하를 중심하여 현 요양과 심양의 바깥에 이 지역을 둘러싼 형태로 위치해 있으므로 '동경에서 500 리에 숙여진'이라는 기록은 오히려 거란 동경의 이치 여부의 한 근거가 될 뿐이며 이후의 역사적 사실 등을 살펴보면 발해유민의 활동이 현 요양과 심양을 중심으로 소위 요동반도 일대에서 현저히 나타나므로 야울우지가 발해의 고향이라 한 양수(梁水)는 이러한 사실을 교차하여 볼 때에 현 태자하 일대임을 알 수 있다.
야율우지가 발해의 고향이라 한 양수(梁水)가 현 요동인데 옛 도읍지, 또는 옛 중심지, 또는 옛 터전의 뜻을 지닌 구국(舊國)이 이곳 태자하 일대에서 1천 5백여 리 떨어진 현 화룡시 일대일 수 있겠는가? 오히려 앞에서 본인의 '압록강 현 요하설을 근거로 고찰한 현 요원시와 이퉁만족자치현 일대가 거리와 그 위치 상 양수(梁水), 즉 현 태자하 지역과 가까우므로 타당성이 있다.
2. 읍루(挹婁)와 계루(桂婁)
사학계에서는 신당서를 기본서로 하여 발해사, 특히 강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신당서에서 발해 최초의 건국지에 대해서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읍루는 흑룡강과 바다 사이, 지금의 연해주 남부 일대에 있으면서 부여에 복속돼 세금을 바치던 종족이다. 훗날 부여를 밀어내고 하얼빈 일대를 차지한 물길의 전신이다. 이 때문에 읍루는 물길, 흑수말갈은 물론 숙신(숙신 역시 이들의 범칭으로 종종 사용되었다)을 이르는 명칭으로 종종 사용되었다.
신당서의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이라는 기술, 그리고 현 압록강을 고대 압록강으로 고정하여 보는 학계의 고질적 태도로 인하여 발해는 현 요동지역을 차지하지도 못한 채 저 만주 동쪽 구석에 옹기종기 5개의 수도를 모아놓고 세월을 보낸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신당서에 앞 서 편찬된 구당서에는 다른 기록이 있다. 구당서는 신당서가 가리거나 없앤 정보를 복원하는 교차 사서의 역할을 한다. 다음의 두 기록을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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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창업자)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 고구려(高句麗)에 복속되어 있었었던 자이며 성은 대씨(大氏)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新羅)와 맞닿아 니하(泥河)를 경계로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는 거란(契丹)이 있었다. 성곽을 쌓고 거처하니, 고구려 유민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신당서 발해전》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突厥)에 항복하니, 측천무후는 더 이상 토벌할 수 없었다. 대조영은 드디어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계루(桂婁)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東牟山)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대조영은 굳세고 용감하며 용병에 능하니, 말갈의 무리와 나머지 고구려 유민들이 점점 귀속하였다. 성력(聖曆, 698~700) 연간에 대조영이 자립하여 진국왕(振國王)이라 하고, 돌궐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였다. 그 지역은 영주 동쪽 2천리 밖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新羅)와 서로 접하고 있다. 《구당서 발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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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는 945년에 완성되었고 신당서는 이보다 1백 년 후인 1060년에 완성되었다. 계루(桂婁)와 읍루(挹婁)는 분명히 다른 말이다. 그런데 신당서가 읍루라고 적으면서 후대사서들은 모두 이를 따랐다.
신당서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사마광의 자치통감(1084)만 해도 읍루나 계루 등의 표현이 없다. 그런데 이 자치통감에 주를 달아 자치통감주(1285)를 펴낸 호삼성은 "東牟山在挹婁國界,地直營州東二千里《資治通鑑注 卷第二百四》" 주를 다음과 같이 달아서 신당서와 마찬가지로 동모산을 읍루지역(國은 '나라'라는 뜻 이전에 '지역', '땅'이라는 뜻이다)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구당서와 신당서, 그리고 그 후대 사서가 기술한 발해의 본거지가 "영주 동쪽 2천 리 밖에 있다"한 표현은가탐도리기에서 비롯된 정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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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又經汝羅守捉,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府,故漢襄平城也。東南至平壤城八百里;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西至建安城三百里,故中郭縣也;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故安平縣也。自都護府東北經古蓋牟、新城,又經渤海長嶺府,千五百里至渤海王城《신당서 가탐도리기 제1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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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탐의 도리기는 정보가 짜깁기 된 것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대조, 교차분석, 비판검증이 필요한 자료이다. 특히 이 1도의 경우는 영주가 수차례 교치됐고, 안동도호부 역시 수차례 교치되었음에도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과 구분 없이 영주와 안동도호부를 뭉뚱그려 기술하고 있다. 가탐 당시인 8세기 후반의 당나라 영주는 현 진황도시 창려현 방면에 있었다. 여기가 영주의 마지막 위치이다. 당나라는 안녹산이 거짓으로 대군을 소집하여 거란 정벌에 나섰다가 대패한 이후로 도산의 북쪽으로 나아가지 못 하였다.
후대 사서와 달리 구당서가 언급한 계루(桂婁)는 무엇이고 또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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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에서 부(部)는 연맹 단계를 거쳐 소국의 수장이 중앙 귀족화하면서 편제된 지배자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고구려의 5부 역시 이른 시기부터 핵심 정치 체제로 기능하였다. 고구려 5부에 대해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는 왕의 부인 계루부와 함께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관노부(灌奴部), 순노부(順奴部)가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는 이들의 이름을 각각 계루부,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 관나부(貫那部), 환나부(桓那部)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후한서』에 보이는 5부의 명칭에 대해서 당의 장회태자 이현이 주를 달아 계루부를 내부 또는 황부로, 절노부를 북부 또는 흑부·후부로, 순노부를 동부 또는 청부·상부·좌부로, 관노부를 북부 또는 적부·전부로, 소노부를 서부 또는 백부·하부·우부 등의 방위명 5부와 각각 대응시키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계루부 [桂婁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내부(內部)·황부(黃部)라고도 한다. 고구려 5부의 중심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소노부(消奴部)에서 왕위를 차지하다가 AD 53년 즉위한 제6대 태조왕(太祖王) 때부터 왕위교체가 이루어졌다.
태조왕의 왕위계승은, 포악한 군주로 이름난 모본왕(慕本王)이 근신에 의해 살해된 다음 모본왕에 태자가 있었음에도 제쳐두고 방계인 제2대 유리왕의 왕자 재사(再思)의 아들인 7세의 태조왕을 옹립하였다는 점과, 계루부의 초대왕인 그에게 건국의 시조에 해당하는 ‘태조’라는 왕호와 ‘국조(國祖)’라는 별호를 주어, 그로부터 정통왕(正統王)을 이으려 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정치적 역학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부터 왕족인 계루부의 대가(大加)들은 고추가(古鄒加)라는 특별 칭호를 가지게 되었고, 고구려 5부의 중추적인 세력이 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계루부 [桂婁部]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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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루는 계루부로서, 계루부는 고구려 5부 가운데에 왕을 배출한 부족으로 내부, 황부 등으로도 불렸다"고 요약해 볼 수 있다. 계루부는 주몽과 함께 부여에서 남하한 세력을 중심으로 한 초기 집결세력으로 보이는데 계루부의 핵심 영역을 학계는 집안(集安) 지역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소위 제 1, 제 2, 제 3 현도군설을 난잡하게 가공하여 제 2현도군 시기에 등장한 고구려현을 두고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학계 통설에서는 제 1 현도군은 현 압록강 중부에 중심지를 두고 함경도까지 차지했던 것으로 보고 제 2 현도군은 토착세력에 밀려 혼하의 상류인 흥경(興京)·노성(老城), 지금의 신빈현(新賓縣) 영릉진(永陵鎭) 지역으로 군치소를 옮겼으며 이후 다시 무순(撫順)지방으로 후퇴하여 제 3 현도군을 형성하고 요동군(遼東郡)의 속현인 고현(高顯), 후성(侯城), 요양(遼陽) 등 을 흡수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우선 한서 지리지의 현도군 고구려현의 기술 내용을 보면 학계 통설에서 소요수를 현 혼하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 현 무순~신빈 일대로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현 의무려산 일대와 그 서북에서 발원해 서남쪽으로 흘러 대릉하로 들어가는 세하 등을 고구려현과 소요수로 봄이 타당하다. 이는 본인의 글 '요수 연구 초고'에서 다룬 바 있다.
한서 지리지에서는 대요수가 새 밖을 나와(나가) 남쪽으로 안시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고, 소요수는 고구려현 요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고 했다. 또한 수경에서는 대요수가 동남쪽으로 흘러 안시현 서쪽을 지나서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했고, 소요수는 고구려현 요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고 했다. 현 혼하를 소요수라 하기에는 방위와 위치가 틀린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5년(서기 169년) 기사에 "임금이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현도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서 부산(富山)의 적도들을 토벌하였다. 五年 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 將兵助玄菟太守公孫度 討富山賊"한 기록이 있다. 부산(富山)은 영락 5년(서기 395년) 광개토대왕의 패려(거란) 정벌 때에 염수로 진군하는 경로에 등장하는데 학계 통설에서는 이 산을 현 의무려산에 비정하고 있다.
■염수와 염난수 2
서기 169년은 아직 후한이 망하기 전(220년에 망함)으로 비록 공손씨가 점거하고 있었으나 후한의 행정구역에는 포함이 돼 있다. 후한서 군국지 현도군에는 여전히 고구려현이 있고, 그 고구려현의 요산에서 요수가 발원한다(髙句驪, 遼山遼水出)고 기술하고 있다.
본인은 이 요수(소요수)와 요산의 문제를 무경총요를 분석하여 현 의무려산이 요산, 현 세하(시허강)이 소요수임을 고증한 바 있다. 무경총요에서 현 '세하~대릉하'는 '동경소요수'라는 이름으로 기술되었다. 이는 본인의 글 「요수 연구 초고」에 상세하다.
■요수 연구 초고
현도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서 부산(富山)의 적도들을 토벌하였다면 부산은 현도군에 있는 산인 것이고, 부산이 현 의무려산이므로 현도군은 현 의무려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학계 통설에서는 환도성을 현 집안의 성산자성에 비정하고 있으나 가탐도리기 2도를 현 요하~혼하에 적용하였을 시에 현 무순과 본계 일대에 해당함을 앞의 글에서 확인하였다.
구당서의 계루(桂婁)가 신당서에서부터 읍루(挹婁)로 조작, 또는 오기되었다 한다면, 이에 구당서의 계루(桂婁)를 선택하여 역사를 보면 훨씬 명확해진다. 고구려의 계루부는 고구려의 중심지로서 현 제2송화강의 동남쪽, 현 압록강의 북쪽, 현 혼하를 중심한 심양, 본계, 무순 일대였던 것이다. 이는 그대로 발해의 구국(舊國)과 고향(故鄉) 지역과 비교적 일치하거나 지근 지역이다.
본인이 추정하는 계루 지역은 혼하와 태자하를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제2송화강 동남쪽, 현 압록강 북쪽 지역이다. 즉 이 지역이 고구려 건국지이자 중심지로 보는 것이다.
신당서가 계루를 읍루로 바꿔 기술하면서 코미디 같은 상황이 연출되는데 특히 요사 지리지 동경도 기술 내용이 그러하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는 신당서의 '읍루의 동모산' 기술을 답습하면서 동경도 지역에서 총 4 곳을 읍루 지역으로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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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동경의 외성인 한성에서) 북쪽으로 읍루현(挹婁縣)과 범하(范河)까지 270리 걸린다
② 심주(瀋州)는 소덕군(昭德軍)이 설치되었고 중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읍루국(挹婁國) 지역이었다.
③ 쌍주(雙州)는 보안군(保安軍)이 설치되었으며 하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읍루의 옛 땅으로 발해는 안정군(安定郡)을 두었는데 오래전에 폐지되었다. 구리증(漚里僧, 액리삼額哩森)의 왕이 태종을 따라 남정할 때 사로잡은 진주(鎭州)와 정주(定州)의 백성으로 성을 세우고 주를 설치하였다.
④ 정리부(定理府) 자사를 두었다. 옛 읍루국(挹婁國)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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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통설이 발해의 구국, 즉 현주(중경현덕부) 지역으로 비정한 현 길림성 화룡시 지역뿐만 아니라 동모산으로 비정한 현 길림성 돈화시 성자산 지역은 역사상 읍루(挹婁)의 옛땅이 된 적이 없다. 읍루는 동쪽으로 대해(大海)를 접하고 있었는데 현 흑룡강 일대를 포함하여 연해주 지역에 비정된다.
상기 요사 지리지 동경도 기술에서 실제 읍루국, 또는 읍루지역에 해당하는 것은 ④밖에 안 된다. 실제로 학계 통설에서도 정리부를 현 연해주 남부에 비정하였으며, ③의 쌍주의 경우는 926년 당시 거란군 대원수였던 야율요골(야율덕광, 훗날 요 태종)의 발해 정벌활동 당시에 발해의 정리부 지역에서 데려온 포로들로 건립한 주로 현재 요녕성 철령시 서북쪽 인근에 비정돼 있다. 쌍주의 경우는 읍루의 땅이었던 연해주의 정리부(정주定州는 정리부 속주이다)에서 백성을 데려다가 세운 주여서 '옛 읍루국의 땅'이라는 설명이 붙은 것으로 ①과 ②의 경우와 그 지역이 교차된다. 즉 ①, ②, ③ 지역은 현 심양을 중심하여 그 북쪽 지역까지인데 이 지역은 ④의 정리부, 즉 읍루 지역에서 주민을 데려와 주를 설치하고 살게 하게 됨으로써 읍루가 업근된 것이고 이에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정보가 혼탁해져 나종에는 이 지역을 읍루지역이라 설명하게 이른 것이다.
본인은 상기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서 기술한, 현 심양시를 중심한 읍루를 계루(桂婁)의 오인으로 인한, 즉 신당서의 조작, 또는 오기로 말미암은 것으로 본다. 또한 이, 현 심양시를 중심한 지역에 발해의 최초 건국지 동모산(東牟山)이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구당서에서 말한 '계루의 옛 땅(桂婁之故地)'이라는 기술은 고구려의 옛 땅을 나타낸 수사적 표현일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보더라도 "대조영이 고구려의 옛 중심지(계루)를 차지하고 동모산에 의지해 성을 쌓고 살았다(祚榮遂率其眾東保桂婁之故地,據東牟山,築城以居之。)."로 해석이 되므로 마찬가지이다.
한편 만주원류고에서는 '계루'가 특정한 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으므로 구당서의 계루가 아니라 신당서의 읍루가 옳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앞에서 살펴 본 바, 사학계 통설에서조차 계루부가 차지한 지역을 현 집안시 일대로 비정하고 있고, 계루부가 중심부족이면 그 부족이 차지한 중심지역이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만주원류고의 이 해석은 특별히 염두할 가치가 없다.
요약 정리
가탐도리기 제2도의 현주는 신당서 발해전의 구국으로서 현 이퉁만족자치현 일대이며, 가탐도리기 제2도의 신주는 현 칭위안만족자치현 일대, 환도성은 현 무순/본계 일대, 가탐도리기 제2도의 현 요하~혼하 경로는 요사에서 야율우지가 말한 '발해의 고향 양수(현 태자하) 지역', 그후 편성된 숙여진 18주 지역, 신당서의 읍루, 구당서의 계루 등과 일치하거나 연접하여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반면에 동일하게 가탐도리기 제2도와 신당서 발해전을 토대로 한 사학계 통설 비정지는 신당서 발해전의 "상경으로 천도했는데 상경은 구국에서 300 리 떨어진 홀한하의 동쪽에 있다"한 기록을 전혀 충족하지 못 하며 사학계 통설이 발해 구국으로 비정한 현 돈화시는 야율우지가 말한 '발해의 고향 양수 지역'과 아무런 지리적 맥락이 없이 동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또한 확인하였다.
■ 원글 출처 : The resonance of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