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에 표시된 인물은 만주군 박정희 1942년 3월 24일, 만주일보>
아래에 빨갱이편을 먼저 보고오시길 추천드립니다
어린 시절부터 군인에 대한 동경과 한국인 교사 차별 문제, 가족 문제 등의 이유로 1938년 11월,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1기 1차로 지원했다. 처음엔 나이 제한으로 거절당했지만, 동료 유증선 선생의 권유로 탈락을 재고시키기 위해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에 피를 내 '혈서'를 학생시험 용지에 써서 보낸다.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517&C_CC=AC
동료 유증선 선생의 증언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8110200209201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8-11-02&officeId=00020&pageNo=1&printNo=6176&publishType=00020
"국경선 확보에 중대역할을 연출하고 잇는 만주국군은 금회 육군사관학교 '일계인 120명, 군사과생 30명'을 좌의 요령으로 모집하기로 되엇다. 지원자는 12월 20일까지 소정의 양식에 따라 치안부에 신입하리라
1938.11.02 동아일보 / <만주국군 육사군사과생 모집> <신경(新京) 31일발 동맹>
이 혈서는 1939년 3월 만주신문에 게재되었고, 이후 고향 선배이자 당시 시험관이었던 조선인 출신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 강재호가 신문을 보고 후원자가 되었다. 이러한 도움을 얻은 박정희는 드디어 10월 군관 선발 시험을 보았으며,[결국에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에, 합격자 240명 중 15등으로 입학하였다
그 후 1942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때 사용한 이름이 창씨개명한 이름인 다카키 마사오. 수석 졸업생으로 "대동아 공영권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하며,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은사품으로 금장시계를 받고 일본육사 유학생대 편입 특전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예과 상위 성적자에게 베풀어지는 관행에 따라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2년)에 진학해 졸업하였다. 봉천군관학교를 거쳐 신경군관학교(만주국육군군관학교) 제4기까지는 성적우수자에게 일본육사 편입학 기회가 주어졌다. 다만, 신경군관학교 제5기부터 조선인이 일본계로 간주하여 전원 일본육사 본과로 편입한다.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 제2기이므로 성적우수자로서 편입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문서를 참조. 1944년 4월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졸업해 견습군관으로 관동군 635부대에 배치된다. 그해 7월 황군 육군 소위 '만주군 제6군관구 소속 보병 제8단' '배장(소대장)으로 근무한다
1945년 7월 중위로 진급한다. 1945년 8월 보병 8단 예하 각 부대는 둬룬(多倫)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 10일에 출발하여 17일 집결했으나 일본이 패망 소식을 접하고, 8단의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신현준 등과 함께 직위에서 해임되고 무장해제당했다. 9월 팔로군의 지휘를 받는 6단과 함께 미윤으로 이동한 후, 9월 21일 도망치기 위해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신현준, 이주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만주군 소속임을 숨기고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가 지휘하는 제1대대(평진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으나, 4월 평진대(제1대대)가 해산한 후, 5월 8일 미군정의 방침에 의해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79/0002762397?sid=100
박정희 비밀광복군?…허무맹랑한 소설 이야기
결론:박정희는 친일파들 중에서도 가장적극적 친일파의 모습을 보였던 인물이었고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광복군 참여하였는데 여기서 만주군 소속임을 철저히 숨긴 전형적인 기회주의자 였습니다 게다가 해방 후에는 군부내에 소란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하였던 남로당 간첩 이력까지...이런자를 찬양하는걸보면 한국에서 소위 '보수'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의 역사의식의 얼마나 떨어지고 사상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들인지 알 수있는 대목입니다
제가 주로 전공한 분야인 조선 근세사와 19세기 세계 근현대사를 중점으로 글을 쓰겠지만 앞으로 가능하다면 박정희와 관련하여 5.16, 중앙정보부의 성립과 불법인권탄압, 62년 화폐개혁의 처참한 실패, 민주공화당 창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으킨 증권조작파동, 한일재수교, 정인숙 살해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유신헌법성립, 인혁당사건, 장준하 박사 의문사사건, 프레이져 보고서와 김형욱 실종사건, YH무역사태, 부마항쟁, 10.26 등의 사건을 중점으로 18년간 제3,4공화국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벌인 행태에 대해 주류 현대사학자들의 관점에서 객관적인 당시인물들의 기록과 자료로 여러분들께 보여드려 경제발전이라는 그들이 만든 키워드로 과대포장된 박정희 정권 18년의 실체를 시간날때마다 고발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