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기는 싫고, 아는 척은 하고싶어서
정작 부처가 말했던 핵심가치인 팔정도나 사성제에대한 고민도 없이
되도안한 환원주의론을 내세우며, 몰라도된다고 설침.
아는 것과 이해는 다른 것인데
무지가 부끄럽고 무지를 타파할 노력을 할 의지도없어서
모르는척하고 답은 하나라며 개논리 펼치는 것 같음.
개인적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수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말고도 인간을 대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몇가지 있습니다만,
오늘은 이 것과 관련된 내용만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사람들의 사고관을 쉽게 보면
수직적인 사고관과 수평적인 사고관의 구도로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완전히 수직적이거나 완전히 수평적일수는 없습니다만
"정도" 라는게 있어서 과하거나 적절하거나 부족하거나의 차이가 있겠지요
환원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수직적인 사고관에 지나친 편향성을 보여줍니다
즉 타인에 대한 인식이 위와 아래만 있는 것처럼 구별하고,
자신이 "위"에 있기를 원하는 욕망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오로지 자신에게 "쾌"를 주는 사람에게만 수평의 지위를 부여하게 되지요
인간은 특정욕망이나 의욕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시야가 좁아지는게 필연적입니다
그러니 논리가 지향해야할 합리를 살필 여유가 없어지게 되고,
이렇게 오랫동안 고착화되면 그대로 내면화되어
그 방식을 반복하는걸 멈추지 못하게 됩니다
어지간히 강력한 현실의 계기가 없다면 말입니다
이때는 합리를 지향하는 논리의 교환.. 즉 소통이 이루어지는게 불가능합니다
현실의 입증이나 재현을 추구하며 성과를 내는 인간의 유일한 사고방식은 합리지만,
인간이 삶을 지탱하기 위해 소유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 합리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변화를 필요로 할만한 자각이 부재하는 한 타인은 별 수 없는 일이 됩니다
예전에는 레종님의 부도덕과 불합리에 대한 과감한 채찍질이
도덕을 추구하는 용기있는 방식이라 동참해봤습니다만
이건 왠지 저랑 안맞는 것 같더군요
내 경우에 저런 대상을 상대로 해소하는 방법을 확인했던 것은
그들이 자각을 가질만한 의욕을 가져야만 변화가 가능한 것이라서,
그 의욕을 불어넣어줄만한 위치에 내가 설 수 있어야 합니다만
내가 그들을 애정으로 봐줄수가 없으니 이건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내 마음 씀씀이의 그릇이 커뮤니티 상에서의 불합리를 수용할 정도로
관대하지 않은 것도 내가 그리 에너지가 넘치지 않는 것도 사실인 걸 인정하니까요
다만 이 사이에 나만의 묵시적인 합의로서
소통이 되는 사람들끼리 소통을 하고 저들을 비롯한 소통이 안되는 사람들을
내 신경영역에서 분리시켜 소통이 되는 사람들끼리 더 나은 소통을 할 수 있도록
애쓰며 확장해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입지는 좁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그들끼리도 위아래를 구분하며 싸우고 분열하여
더 잘게 쪼개지는게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내 삶의 시간이란게
중요한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기도 부족한 시간이고,
통하는 사람들끼리 더 나은 소통을 갖기도 부족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내가 애쓰고 신경쓰고 싶은 것도 이런 지향이 밑바탕이 되어,
저들을 치료하려는게 아닌 이상 나의 지향을 실천하는데 집중하는게
적절한 내 됨됨이의 그릇에 어울리는 선택이 되지 싶네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글인 것 같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좀 더 소중한 혹은 유익한 것에 더 할애하다보면, 그들은 자연히 소외될 것이고
그렇게 소외되면, 더 자극적인 것을 찾다가 그래도 안되면,
관심을 받기위해 정상적인 범주로 들어오는 척이라도 하고
결국 그렇게 습관이 되면 정말 정상적인 범주로 들어올 것이라는 발상..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본인을 위해 좋은 에너지에 관심을 쏟는게
더 좋은 방향일거라 저도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많고
지금보다 더 겸손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을 바꿀 힘이나 지식은 지금의 저에게는 물론이고
미래의 저에게도 없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