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확장하고 있다.
따라서 시간을 꺼꾸로 돌리면 우주는 축소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계속해서 꺼꾸로 돌리다 보면 우주를 이루고 있던 모든 물질들은 결국 빅뱅을 일으킨 한 점에서 모이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 한 점이 왜 빅뱅이라는 폭발을 일으켜 우주를 형성하였는가 하는 것이 창조의 이유에 대한 의문이다.
앞 선 글에서 쓰임을 통하여 존재의 이유를 유추해 낼 수 있고 이를 통하여 창조의 이유 또한 밝혀낼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안에서 그 쓰임을 정확하게 밝히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무엇을 안다고 할 때에는 전체와의 관계속에서 그 부분을 이해하여야 한다.
전체와의 관계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 부분만을 놓고 그것을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주의 창조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주 전체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마찮가지로 인간의 존재이유를 밝히는 것도 우주라는 전체와의 관계속에서 밝혀야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위와 같은 이유로 답을 구하기가 지난하다.
이치를 통하여 존재의 이유를 밝힌다는 것은 거대한 기계의 극히 일부분인 어떠한 부품을 통하여 그 거대한 기계 전체의 쓰임을 밝히려는 것과도 같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발 만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전체를 알고 있지 못하고 있음으로 마치 장님과 같은 것이고 따라서 우주라는 전체속에서 극히 일부분인 코끼리 발에 해당하는 부분을 더듬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理)안에는 성(性)이 있다.
그러므로 이론상으로는 이(理)를 통하여 성(性)을 밝혀내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은 부분적인 통찰에 머물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글쓴이는 존재의 이유를 밝히기 위하여 창조의 이유를 살피고자 한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창조의 이유를 밝히고 이에따라 나타나게 되는 존재의 이유를 검증해 보자는 것이다.
우주를 형성케한 태초의 한 점이 있었다면 그 한 점은 우주가 형성되기 전이므로 절대계속에 있었을 것이다.
이 절대계속의 한 점에게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무엇인가?"
적어도 우주내에서는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나는 무엇인가와 같은 의문을 같는다는 것은 신은 전지전능하다는 전제에 위배된다.
그러나
이 의문을 "나는 상대적 측면에서 무엇인가?"로 바꾼다면 어떠한가?
다시말해
이 한 점은 절대계속에 있기에 상대적 존재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에 상대방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보았을 때 상대방이라는 존재는 자신을 어떻게 느낄것인가라는 의문은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계속의 한 점이 가지는 의문은 상대적 존재를 통해서만 풀 수 있는 것이므로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상대적 존재를 창조해 내어야만 한다.
또한
절대계 속에서는 자기 자신 이외에는 다른 상대적 존재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절대적 존재가 상대적 존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이용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절대계속의 이 한 점은 스스로 자신을 폭발, 분열시키는 빅뱅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상대계를 창조해 내게 된다.
이에 창조주는 수많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결국 창조의 이유를 달성 할 궁극적 존재인 인간에 이르게 되었고 이렇게 탄생한 인간에게 자신의 의문을 던지게 된다.
(논리를 간략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이를 아담이라 가정해보자.)
하지만
아담 역시 창조주로 이루어진 신(神)이다.
창조주가 상대계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분열 폭발시켜 상대계를 창조하였기에 아담 역시 본질적으로 창조주와 같다.
따라서 이는 신(神)이 신(神)을 보는 것과 같고 빛이 빛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창조주는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답을 아담을 통하여 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에
창조주와 아담은 자신이 신(神)이라는 아담의 기억을 지우게 된다.
그 결과
아담은 자신을 신(神)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을 인간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치가 성경에서는 선악과를 따먹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신은 미운 오리새끼라는 우화를 알고 있을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는 자신이 백조인줄 모르고 오리들 틈에서 성장하다가 결국 자신이 백조였음을 깨닫게 된다는 우화이다.
미운 오리새끼가 자신이 백조가 아닌 오리라고 인지하고 있었을 때
하늘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백조를 보고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에 대하여 어떠한 느낌과 생각을 가졌을까?
훗날 미운 오리새끼가 자신이 백조임을 깨닫게 된다면
수많은 백조들 중에서 오리가 백조를 보았을 때 백조에 대하여 오리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백조는 미운 오리새끼였던 백조일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느끼는지 가장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내가 상대방이 되어 상대방의 감각과 느낌으로 나를 인지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미운 오리새끼인 아담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미운 오리새끼인 아담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아담과 같은 인류의 존재의 이유는 자신이 신(神)이였음을 기억해 내는 것에 있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신(神)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 존재인 당신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신(神)의 의문에 답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고
그것이 창조주가 당신을 창조한 이유이다.
또한 창조주가 인간을 통하여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상대적 존재인 인간이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존재하라”가 전제적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것이고
“자신이 신(神)이었음을 기억해내라”가 궁극적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절대계속에 있었던 한 점이 가졌던 의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면
절대계속에 있었던 한 점은 상대적 존재가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가와 더불어 상대적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의문도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러하다면 상대방끼리 서로 가늠하고 확인해 가는 과정 이 또한 창조의 이유에 속하게 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보면 수많은 부딪힘들이 있을 것이고 이렇듯 상대방과의 수많은 부딪힘을 통하여 상대방을 평가하고 또한 이를 통하여 자신을 재평가하는 모든 과정들이 존재의 이유와 창조의 이유에 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을 살아간다는것 그 자체 만으로도 우리는 존재의 이유와 창조의 이유를 달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결국 궁극적인것을 지향할 것이기에 그 길이 아무리 멀고 오래걸린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결국 궁극적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므로 궁극적 창조의 이유와 존재의 이유를 달성하게 될 것이다.
다만 죄와 벌에 대해서는 존재가치의 하락으로 예상 할 수 있다.
우리는 주어진 삶을 통하여 존재가치의 상승을 이룰수도 존재가치의 하락을 이룰수도 있다.
존재가치의 하락을 가장 쉽고 결정적으로 이해할수 있는 표현은 인간의 탈을 쓰지 못하고 태어난다는 것 즉 궁극적 존재로 태어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로 들수 있겠다.
창조의 과정속에 어떠한 원리가 있다면 수렴의 과정속에도 어떠한 원리가 있지 않겠는가.
그 첫걸음은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