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chosun.com/politics/news/200508/200508260177.html
전후 세계사에서 가장 길고 험난한 외교협상 중 하나로 불리는 한일회담은 1965년 6월22일 이동원(李東元) 외무장관과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이 도쿄 일본총리 관저에서 ’한일협정’ 문서에 서명, 장장 13년 8개월의 ’대장정’ 협상의 막을 내렸다.
이는 당면한 ’경제난 해결’이라는 한국의 필요와 ’식민지 피해청산’의 부채를 경제협력이라는 포장지를 씌워 해소하려는 일본의 요구가 맞아 떨어진 결과다.
그러나 그 과정은 난산 그 자체였다.
당초 우리 정부는 전승국 자격으로서 전쟁배상 요구를 하기 위해 2차 세계대전 직후 열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서명국 자격을 얻으려 했다.
이를 위해 1951년 4월16일 당시 외무부내에 ’대일강화회의 준비회의’를 설치하고 같은 해 7월18일 서명국 자격 요청안을 덜레스 미 국무성 고문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그 후 한달이 채 못된 8월13일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한국의 서명국 자격이 배제됐다.
대신 강화조약 4조 B항에 “일본은 한국에서 미 군정 또는 그 지령에 의한 일본 국민의 재산처리의 효력을 승인한다”는 조항이 삽입됐다.
이 조항은 미군의 한반도 진주 직후 일본 정부와 일본인의 모든 재산을 압류해 미 군정에 귀속시켰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 재산은 한국 정부에 귀속됐으며 4조 B항으로 그 행위에 정당성이 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그 후 진행된 한일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에서 비롯된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 관계의 청산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 교섭경과
한일회담은 기본관계 문제 등의 교섭 경위를 보면 초기 단계인 1∼3차회담과 회담만 있고 교섭이 없었던 4∼6차 회담, 또 본격적인 교섭에 들어가 가조인까지 이뤄진 7차회담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일회담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20일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의 중재하에 도쿄에서 처음으로 일본과 공식 대좌를 통해 시작됐다.
당시 미국은 극동지역의 대공산권 동맹 구축 전략 등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이 조속히 국교를 정상화하도록 한.일 고위급 관리들을 상대로 전방위적으로 양국을 압박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의 첫 정상회담(1961.11)에서 한일협정 체결을 촉구한데 이어 이듬 해 8월23일에도 당시 박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친서를 보내 조속한 협정 체결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952년 2월부터 2개월여간 진행된 제1차 한일회담에서 양국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의제는 ’청구권’ 문제였다. 청구권위원회 제1차회의(1952.2.20)에서 한국은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요강 8개항’을 제시했다.
그러나 일본은 제5차회의(1952.3.6)에서 ’재산청구권 처리에 관한 협정 기본요강’의 형태로 “일본인의 한국내 사유재산에 대해 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역청구권’을 주장, 1차회담이 결렬됐다.
’역청구권 암초’에 걸려 중단된 한일회담은 미국의 다각적 중재 노력에 힘입어 1년후인 1953년 4월 다시 열렸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 한 채 6.25전쟁의 종전에 따른 제네바 협정 체결관계로 순연돼 10월6일 제3차 회담이 재개됐다.
그러나 일본은 ’역청구권’은 불가하다는 미 국무성의 유권해석에도 불구하고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고, 특히 3차회담 제2차회의(1953.10.15)석상에서는 일 수석대표인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가 한국의 홍진기(洪璡基) 대표와 논쟁하다 ’일제 통치가 조선에 기여했다’고 망언, 한일회담은 이후 4년간이나 표류하게 된다.
제4차 회담은 1958년 일본에 기시(岸) 내각이 들어서면서 그 해 4월부터 2년간 열렸고 일본측이 ’역청구권’을 취소했지만 회담은 실질적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일 양국에 모두 새 정권이 탄생, 한일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강경 반일정책을 고수해 온 이승만 정권이 4.19 민주혁명으로 붕괴되고 적극적인 대일 정책 추진을 천명한 장 면 정권이 수립되고 일본에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내각이 들어서자 한일 관계는 회담의 조기 타결을 서두르는 분위기로 전환됐다.
그 해 9월 고사카(小坂善太郞) 외상의 방한이 이뤄진 데 이어 10월 25일부터 7개월간 제5차 회담이 열렸으나 이듬 해 5.16 쿠데타로 회담이 중단됐다.
5차 회담 역시 양국의 국내 정치적 제약과 양국간 현격한 입장차로 당초 예상에 비해서는 큰 진전이 없었으나 청구권위원회가 32회나 열려 항목별로 토론이 진행되는 등 청구권 문제에 관한 실질적 토의가 이뤄진 것은 적잖은 성과로 평가된다.
한일회담이 가속도를 내게된 것은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집권한 1962년 11월 열린 제6차 회담에서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 회담간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교환하면서 한일간 정치적 타결을 시도하게되면서 였다. 청구권 액수를 놓고 한국이 7억달러를 요구한 데 반해 일본은 7천만달러가 상한 선이라고 주장, 회담이 교착된 상황에서 열린 ’김-오히라 메모’는 청구권 금액을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 이상’으로 합의해 회담의 돌파구를 열었다.
이 금액은 추후 협상과정에서 상업차관 부분만 ’3억달러’로 최종 조정됐다.
그러나 회담을 성사시킨 박정희 정권은 ’청구권 자금 3억달러에 민족의 자존심 을 팔았다’는 비난과 반발을 감수해야 했다. 박 정권은 당시 ’김-오히라 메모’를 포함한 회담 진전 과정을 비밀에 부쳐 ’6.3사태’라는 격렬한 회담 반대시위를 초래했으며 1964년 4월에는 ’굴욕회담’과 ’구걸외교’를 규탄하는 데모가 격화돼 1965년 제7차회담은 위수령과 계엄령속에서 열려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한일협정 결과에 대해 한편에서는 ’경제협력자금’(청구권자금)이라는 종자돈을 받아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 평가를 하기도 하는 반면 다른쪽에서는 실리에 급급한 나머지 역사부채 청산의 명분과 기회를 희생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린다.
특히 한일협정은 크게는 한일합방조약의 무효화 시점 시비나 일제 강제동원 피 해자 보상 문제서부터, 작게는 일본군위안부, 사할린동포 문제, 대한민국 정부의 한 반도 유일합법 정부 조항 논란, 문화재 반환, 재일교포 법적 지위, 독도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한일 과거사’라는 이름으로 제기되고 있는 미해결 현안들을 숙 제로 남겼다는 지적이다.
이 가운데 한일협정이 안고 있는 가장 뼈아픈 결함은 한일합방이 ’원천무효’임 을 명시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과거의 식민통치를 합법화할 수 있는 빌미를 줬다는 것이다.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조차 받아내지 못한 채 한일협정을 체결한 것은 바로 한일 합방 자체가 불법이었음을 관철시키지 못한 결과였으며, 일본 정치가들의 반복되는 과거사 망언도 따지고 보면 여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한일협정에 대해 이처럼 가혹한 비판이 뒤따르고 있는 데는 일본의 책임이 크다.
일본은 회담 초기부터 ’역청구론’을 내놓는가 하면 회담 대표가 망언을 일삼는 등 과거 청산의지가 아예 없었다는 점에서 협상은 시종일관 공전과 난항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측은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거부하고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명목을 관철시키려 했고 일정 정도 이를 달성하는 ’성과’도 거뒀다.
그러나 일본은 같은 전범국 독일과는 대조적으로 전쟁책임과 반성을 회피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자초하고 피해자들의 끊임없는 사죄와 보상요구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 것이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일관계 또한 양국 정상간의 미래지향의 합의에도 불구, 진정한 화해와 공통의 역사인식을 공유하지 못한 채 갈등과 대립은 여전히 잠복상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