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31면 ‘사람사람’ 섹션에, 전직 유명인들의 회고록 성격의 칼럼인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연재되고 있는데 현재 130번째 주인공은 고건 전 국무총리이다.
고 전 총리의 칼럼명은 “고건의 공인50년, 국정은 소통이더라”이다.
유명인들의 자화자찬적 업적과 경험을 풀어놓는 곳이라 평소 눈길을 두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 지면을 넘기다가 깜짝 놀랄 제목에 눈길이 쏠렸다.
<밤새 빌었다, 김정일 안 죽었으면… 무사소식에 안도>
2004년 4월 22일 평안북도 용천역에서 폭발성 화합물질을 실은 열차가 폭발되는 사고가 일어나 160여 명이 사망했다.
당시 고건씨는 탄핵와중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었다.
저녁 8시 경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 국방부 등에서 급하게 보낸 정보보고가 도착했다.
‘2004년 4월 22일 하오 1시께 평양 북방 약 150㎞ 정도 떨어진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역에서 대규모 폭발사고 발생.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탄 특별열차가 사고지점을 지났는지 여부와 통과시간은 현재 확인되지 않음. 폭발사고 규모와 원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 방문을 마치고 특별열차편으로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팩스 종이를 쥔 손이 떨렸다.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외교안보 라인에 전화를 돌렸다.
“김정일 신변이 어떤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알아본 뒤 즉시 보고하세요.”
그날 밤, 누워 봐도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관저의 거실로 나가 흔들의자에 다시 앉았다. CNN 채널을 켰다 껐다 했다.
그때까지 확실한 것은 없었다.
‘폭발사고로 김정일이 만약 죽었다면, 그럼 친(親)중국 군사정권이 들어설 수밖에 없다. 남북 간 긴장관계가 심해지면 어떻게 되나.’, ‘김정일의 사망이라고 하는 급변사태가 일어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쓸 수 있는 수단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남북 간 대화가 완전히 단절된 시기는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1947년 유엔 총회의 결의사항을 내세워 남북 총선거를 하자고 제안해야 하나. 그 조항이 지금도 유효한가.’
심지어 고민은 거기까지 치달았다.
밤을 새면서 ‘제발 김정일이 안 죽었으면’ 하고 바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에서 뿌옇게 빛이 새어 들어왔다.
오전 4시쯤 기다리던 소식이 CNN 속보로 보도됐다.
엇비슷한 시간 팩스로 들어온 정보보고도 같은 내용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에 도착. 신변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
그제야 의자 뒤로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23일 오전 용천 재해대책 관계장관 회의를 소집했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조영길 국방부 장관, 정세현 통일부 장관, 고영구 국정원장, 한덕수 국무조정실장은 물론 이헌재 경제부총리 등 경제 장관까지 불렀다.
내가 먼저 발언했다.
“우선 인도적 지원을 합시다. 북한의 요청이 있든 없든 상관없습니다. 동포애로 접근해야 해요.
의약품 등 구호품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에 전달하도록 합시다.
북한이 희망한다면 시설 복구까지 해주도록 합시다. 100만 달러로 합시다.”
이상이 2004년 4월 22일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의 생각과 행동으로 보여준 대북관이다.
한마디로 제 부모보다 김정일을 더 섬기는 애틋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부부는 아침저녁 예배시간에 김정일의 손목을 비틀어 주시고 오장육부를 결박하여 주시고 혀를 굳혀 주십사하고 기도해 왔다.
그런데 고건은 김정일의 무사안일을 저렇게 간구했다니.......
그 종자들이 섬기는 두 김씨가 심판을 받았음에도 아직 추종분자들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신문에다 버젓하게 사모곡을 올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