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잠겨 버렸습니다. 두번째 예가 잘못되었을 지적하는 글을 쓰고 세번째를 보려 했으나
글이 잠겨 버려 더이상 볼 수 없는 관계로 첫번째 두번째만 올립니다.
정말 아십니까?
태조 왕건의 후삼국통일을 예언했던 최지몽은 영암 출신의 호남인이다.
태조공신에 책봉되었던 전종회는 영광 출신이다.
김길은 나주, 나총례는 나주 출신이다.
태조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도선은 영암 출신이다.
팔공산전투에서 왕건을 사지에서 구하고 죽은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 출신이다.
태조의 열일곱번째 부인인 동산원부인도 승주 출신 박영규의 딸이다.
또 훈요 10조가 내려진 다음에도 전라도 출신 인물들이 과거에 급제하거나 요직에 오르고 있다.
전주 출신 유방헌은 광종대에 급제하여 현종대에 내사시랑 평장사(정2품)에 올랐다.
영광 출신 김심언도 성종대에 내사시랑평장사를 지냈다
전북 고부 출신 장연우도 현종대에 호부상서(정3품)을 지냈다.
장흥 출신 임의와 그 아들 임원후는 최고위직인 문하시중(종1품)을 지냈다.
또한 임원후의 딸은 왕비가 되어 의종, 명종, 신종을 낳았다.
당시 태조 왕건때의 정치상황은 아직 지방의 호족세력이 건재해 이들을 포섭하고 끌어들여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통일 후라지만 그런 상황을 무시하고 특정 지역인을 차별대우하라는 조항을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8조항이 잘못해석되었다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이유는 왕건 본인이 나주를 강력한 세력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나주는 일찍이 궁예에게 기부했으나, 실제적으로 이를 정복하고 지킨 것은 왕건이었다.
궁예의 심복 아지태를 처벌하고 피신해있었던 곳도 나주였다.
왕으로 즉위한 후 전 시중 구진을 나주도행대시중으로 삼아 파견하기도 했다.
특히 왕건은 여기서 나주 오씨를 만나 무를 낳았고, 그를 태자로 책봉하기까지 했다.
그 나주 오씨와 낳은 태자가 2대왕 혜종이다.
자신의 후계자가 이 지역 출신인데 그 지역을 차별대우하라는 유훈을 남겼겠느냐 하는 점이다.
풍수지리설적으로도 문제점이 있다.
금강의 형국이 '반수궁'형이라는 점과 전라도 지역 물이 '산발사하'형이기때문에 인재가 나오기 힘들다고 했는데,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풍수지리적인 내용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김동갑교수의 "왕건 훈요10조의 재해석"부분을 발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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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은 덕유산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기준으로 할 때는 반수궁라 할 수 있으나,
충북 음성 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기준으로 하면 반궁수가 아니다. 따라서 같은 강이라 하더라도
발원지를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형국은 달라진다. 전라도의 강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흐른다고 했으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강 상류만으로 따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 강 하류로 따진다면 섬진강만 남해로
흘러들고 나머지 강은 모두 서해로 흘러든다. 오히려 한 방향으로 모인다고 할 수 있다. 강물이 개경을
향하는가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가 하는 면을 볼 때도 금강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배역하여 흐리는 3대강으로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 역시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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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21세기 과학적 조사로 강의 흐름에 대해 고려시대때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음직한
현대인들이 여전히 금강만 배역하여 흐른다는 개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저 시대 고려인도 알고 있던 사실을...
훈요 8조의 내용을 풍수지리적으로 논하는 것은 잘못이다.
태조 왕건도 딱히 변명꺼리가 없으니 갖다붙힌, 구차한 변명이다.
금강이 '반궁수'형이고 호남지역의 물이 '산발사하'형이기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 중에 인재가 없다거나
등용해서는 안된다는 논의는 있을 수 없다. 해석하기 나름인 것이다. 풍수지리도 일리는 있지만
결국은 결과론적 해석에 불과하며
실제로도 태조 왕건 자신부터 자신 주위에 호남출신의 인재들을 곳곳에 등용하고 도움을 받았으며
부인도 호남출신이며 이 호남출신의 부인이 낳은 아들을 태자로 정했고 2대 혜종이 되었다.
훈요 10조의 유훈이 있은 후에도 호남출신의 관료들을 셀 수 없이 찾아낼 수 있다.
그럼 훈요 8조는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고려 태조대 당대에는 전라도라는 개념이 없었다. 현재의 전라북도와 전라남도가 같은 도라는 동질적 감정도 없었다.
전혀 이질적인 구역으로서 통일신라시대에는 전주와 무주로, 고려 성종때는 강남도와 해양도로 분리되어있었다.
도라는 행정구역도 정착되지 않았다. 거란 침입 당시의 전쟁상황 속에서 중요한 것은 지리적 개념이었다.
산과 강, 고개등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도 노령 내지 노령산맥을 경계로 분리되어있었다.
제 8조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차현 내지 차령산맥 이남에서 노령 내지 노령산맥 이북까지가 그 대상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는 고려와 후백제와 쟁패과장을 봐도 납득이 간다. 당시 전남 지역은 고려에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전주를
비롯한 충남 남부지역은 후백제의 근거지였다.
전주는 후백제의 수도로서 끝까지 항거한 지역이고, 공주/논산지역도 후백제의 세력근거지였다.
특히 공주는 후백제의 북단 기지로서 차현을 경계로 고려의 남단 기지인 천안과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겉으로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척했으나, 속으로는 감정이 있었다.
이런 속에서 후대 왕들에게 훈요 10조를 적어 두었던 것이다.
고려 당시에는 전라도라는 개념자체가 없었고
현재의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는 그 지역의 세력 균형이 판이하게 달라 고려 성종때까지도 서로 분리되어 있던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이 전라도가 아니라 후백제와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였던 충남 남부지역이라 밝혀졌으니 이제는 고려 태조 왕건은 이제는 충청도인들을 차별하라는 유훈을 남겼다고 할 텐가?
훈요10조중 8조는 굳이 말하자면 전라도나 충청도에 대한 편견이 아니라
태조 왕건이 가진 후백제에 대한 악감정의 표현일 뿐이다.
후대의 왕, 태조 왕건의 다음 왕인 혜종조차도 그 지역을 전라도라 잘못 추정한다면
이 훈요 10조중 8조는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는다.
태조 왕건은 10세기때 자기 개인의 악감정, 충청도 남부지역에서 극렬히 싸웠던
후백제에 대한 악감정을 적은 글이 1200년이 지난 21세기의 후손들이 전라도 지역 비하로
잘못 해석되고 있는 것을 알면 어떤 기분일까?
2. 세종실록의 원문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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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89권,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4월 4일(을해) 2번째기사
전주 판관 이호신을 인견하다
전주 판관(全州判官)이호신(李好信)이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전라도는 산수(山水)가 배치(背馳)하여 쏠리고 인심이 지극히 험하나, 인심이 험악하다고 해서 억지로 편복(鞭扑)을 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친절하게 뜻풀이도 해준다.
전주 판관 이호신이 떠나기 전 임금께 작별을 고하니, 임금이 의식을 갖추고 말하기를,
"전라도는 산수가 서로 반대로 되어 어긋났고, 인심이 지극히 험허나, 인심이 험악하다고 해서 억지로 매질을 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만 보면 충분히 세종이 전라도 지방에 대한 편견이 지나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실록 세종 22년 1440년 4월 4일에 이호신과 나눈 대화 내용은 저게 다가 아니다.
대화 내용 전체를 보면 대화 내용은 완전 딴판이 된다.
전체 원문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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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판관(全州判官)이호신(李好信)이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전라도는 산수(山水)가 배치(背馳)하여 쏠리고 인심이 지극히 험하나, 인심이 험악하다고 해서
억지로 편복(鞭扑)을 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니, 호신(好信)이 아뢰기를,
“병진년 이래로 연년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생업을 잃었는데, 근자에 연변(沿邊)의 성을 쌓는 역사가
없는 해가 없어서, 백성이 소복(蘇復)되지 못하였으므로 모두 어깨를 쉬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 말이 옳기는 하나, 살 방법으로 역사를 시키는 것이니 백성이 곤하고 괴로웁다고 폐지할 수는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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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이미 앞선 장계를 통해 강변에 쌓을 방어성(연변의 성)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단함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고단함과 힘듬을 알고 있음에 이번에 다시 부임지로 떠나는 전주 판관을 친히 불러 운을 띄운다.
저 대화내용을 요즘 말로 고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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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 전라도 지역에 하고 있는 축성하는 곳의 지형이 험하고 그로 인해 인심이 나빠진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을 매질로 다스릴수는 없다.
호신 : 병진년 이후로 연달아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생업을 잃었는데, 축성으로 노역을 하지 않는 해가 없어
백성들의 원기를 회복할 여유가 없으니 축성을 잠시 미루시기를 바랍니다.
세종 : 호신 너의 말이 옳기는 하나, 방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축성을 시키고 노역을 지게 하는 것이니
백성이 지금 당장 괴롭고 힘들다고 하여도 폐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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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전주판관 이호신과의 전체 대화를 보고도 세종이 전라도에 지독한 편견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