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많죠. 하지만 그에 대해서 잘못 알려진 이야기도 많다고 생각해서 여기에
써볼까 합니다.
명성황후를 설명하는데 한국사람이라면 감정을 배제 하기 힘듭니다.
그것이 나쁜 쪽이건 좋은 쪽이건 명성황후 자체는 한국인의 감성을 자극하기 충분한 소재 입니다.
명성황후에 대해서 몇 몇가지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첫째, 명성황후가 비난 받는 첫번째 원인인 이이제이와 민씨세도.
이이제이는 고종황제의 정책이고 여흥민씨 가문은 고종의 외척집안입니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와 러시아를 잇따라 끌어들인 것은 명성황후의 정책이 아니라 고종의 정책입니다.
명성황후 사후 무력하게 갇혀 있던 고종이 탈출해 러시아 공관에 피신한 것만 봐도 고종의 외세에 관한 견해를 알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관파천이란 사건을 비난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지하는 쪽입니다.)
고종시대 여흥민씨 세도정치를 이끈 민승호, 민겸호, 민태호 형제.
이들은 고종황제의 외삼촌들입니다.
즉,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들입니다.
명성황후에게 이들은 먼친척이 되는데 중전 간택되어 입궁한 후 국구가 된 민치록이 후사 없음을 이유로 흥선대원군의 처남인 민승호가 민치록의 양자가 된 것을 계기로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양오라비가 되었습니다.
핏줄로 따지자면 세도를 주도한 여흥민씨 세력은 명성황후 보다는 고종과 흥선대원군에게 더 가까운 인물입니다.
민씨 삼형제에게 벼슬길을 열어 준것 역시 흥선대원군 본인이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명성황후의 중전 간택 이유가 세도한 외척이 없기 때문이라는 견해에 전면 배치 되는 일입니다.
세도정치를 견지한 흥선대원군 본인이 스스로 나서 명성황후에게 외척 세력을 만들어 준 꼴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명성황후가 국정에 참여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고종 시대를 설명할때는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명성황후의 권력다툼을 주로 이야기 해왔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조선 정치에 참여 했다는 기록은 정식 사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대적하기 위한 방패로 아내인 명성황후를 내세웠을 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권력 다툼 처럼 비춰 진다면 유교사회인 조선의 기둥인 효사상에 전면 배치 되기 때문입니다.
흥선대원군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이 세운 왕인 아들과 대적하는 것보다는 며느리를 악의 축으로 만드는 것이 대외적으로 설명하기 편할 겁니다.
고종이 여흥민씨 세력과 개화개혁을 내세워 척화를 대표하는 자신과 배치되자 여흥민씨 세력을 명성황후 세력으로 규정하여 고종과 분리 시킨 겁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부인과 아버지의 권력 다툼에 끼인 우유부단한 인물로 전락 했으나
흥선대원군으로서는 아들이 무능하다는 대외 이미지를 만드는 쪽이 자신이 아들의 권력을 탐한다는 이미지 보다는 나았을 겁니다.
그러나 고종시대 개화개혁의 의지도, 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멀리 밀어내고자 했던 의도도 고종 본인의 것이지 명성황후의 것은 아닙니다.
이부분은 명성황후 사후 고종이 홀로 벌인 10년의 투쟁을 주목하시면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셋째,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언제 고착 되었나.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이 조선국정에 깊이 개입하면서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죽인 왕비의 이미지를 때려 죽여서 시원찮을 악녀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겠죠.
일본은 그렇다 치지지만 이에 가장 일조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골수 유학자인 매천 황현입니다.
매천 황현은 동시대의 유학자이며 국권이 피탈되자 음독xx한 인물로 절개있는 우국지사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의 기록을 신용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황현이 과거 급제한 때인 1885년은 개화를 향해 급진이냐 온건이냐를 다투던 때로 고루한 유학자가 명함을 내밀만한 정국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낄자리가 마땅치 않자 시대가 혼란하다는 핑계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숨어든 유학자로도 평가할 수 있습니다.
황현이 전라남도 구례에 은거하면서 집필한 것이 매천야록인데 이 것은 당대의 정세를 동시대 사람이 저술했다는 면에서 가치 있지만,
더불어 정국의 한가운데 있었던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닌 멀리서 주시하며 자신의 사견을 입혔다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하는 책입니다.
즉, 당시 한양을 중심으로 벌어지던 사건을 한반도 땅끝에서 풍문으로 들으며 적은 것이 매천야록입니다.
황현이 보기에 개화파의 중심은 명성황후였기에 개화파와 싸잡아 비난한 것일 뿐 매천황현은 명성황후를 일면한 일이 단 한번도 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책에는 시대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개화파와 그 중심인물인 명성황후에 대한 매우 안좋은 평들이 즐비 합니다.
거의 대부분 들은 풍월을 옮겨 놓은 것이며, 1892년 운현궁 폭탄테러 사건은 대놓고 명성황후가 배후라고 지목하였습니다.
지금도 국역되어 출판되 쉽게 구해 볼수 있는 매천야록은 명성황후의 악녀 이미지를 고착화 시킨 책 중 하나 입니다.
더불어 일제 35년 동안 꾸준히 주입된 왜곡 교육은 명성황후의 이미지가 나라를 말아 먹은 여자로 만드는데 부족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드린 데로 명성황후를 언급할때 한국인이라면 감정을 배제 하기 힘듭니다.
이를 극복할 수단이라면 외국인이 쓴 명성황후를 먼저 접근하고 현대에 쓰여진 비교적 객관적인 전문 서적을 찾는 길 밖엔 없습니다.
현대에 씌여진 전문 서적 중에도 편협한 시각에서 쓰인 책이 상당히 많더군요.
이미 100년 전 인물이지만, 그들에게서 우린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벗어 날 수 없다면 무작정 증오하는 편보다는 냉정하도록 노력하는 편이 낫겠죠.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