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료를 미국 달러가 아닌 유로화로 지불할 것을 요구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가
치가 날로 떨어지던 달러 대신 유로화로 받는 것이 낫겠다는 번천의 주장은 위상이
추락한 달러화의 현실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후 신용위기와 경기 하강 속에 올해 중반까지 약세를 지속했던 달러화는 리먼
브러더스 몰락으로 금융위기가 전세계로 번지면서 투자자들의 안전자산 선호 현상으
로 가치가 다시 오르기는 했지만 국제 기축통화로서의 지위에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세계 경제가 다극화되면서 한계를 드러낸 달러의 기축통화 역할이 미국발 금융
위기 속에 달러 부족 현상으로 이어지면서 각국의 불만을 폭발시킨 것이다.
달러화에 맞선 지역 통화체제 구축 움직임도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이에따라 달러화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
아지고 있다.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지난달 15일 워싱턴에서 열린 G20 금융정상
회의 참석에 앞서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기축통화 역할을 해왔던 달러화가 더 이
상 그런 지위를 유지해 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내일 워싱턴으로
떠난다"고 밝혔었다.
유럽연합(EU) 순회의장인 사르코지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그동안 미 달러화가
기축통화 역할을 했던 브레턴우즈 체제를 대신할 신(新)브레턴우즈 체제를 만들고자
하는 서구 정상들의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 연합국 대표들이 미국 브레턴우즈에 모여
미국의 달러화를 중심으로 한 국제 통화체제를 만들기로 하고 이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을 설립함으로써 형성된 브레턴우즈 체제를 다극화된 세계
질서에 맞게 바꾸자는 목소리인 것이다.
G20 회의에서 결과적으로는 달러 기축통화 체제에 변화를 가져올 만한 실질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지만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달러화의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에 심
각한 의문을 제기할 정도로 달러화의 입지는 흔들리고 있다.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도 지난 10월 말 모스크바
에서 만나 현재의 달러화 중심의 기축통화 체제에 반기를 들고 국제통화의 다양화를
주장한 바 있다.
원자바오 총리는 "다양한 통화 사용을 통해 국제 통화 시스템을 안정시켜야 한
다"고 말했고, 푸틴 총리도 "달러에 기반을 둔 세계 금융시장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면서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에 이의를 제기했다.
달러화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달러화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
돼야만 하지만 달러화는 주요 통화에 대해 근 10년간 약세를 보여왔다.
금융위기 이후 안전한 자산으로 믿을 것은 달러화 밖에 없다는 인식으로 가치가
올라 유로당 1.2~1.3달러 수준에 최근 거래되기 전까지 달러화는 지난 7월에 유로당
1.6달러를 넘어서며 유로화 도입 이후 그 가치가 최저로 떨어지기도 할 정도로 수난
을 겪었었다.
반면 출범 10년째를 맞이한 유로화는 그 위세를 계속 키워가고 있다. 유로화 표
기 채권은 현재 6조달러 규모에 달해 전세계 채권 총 발행규모의 48% 가량을 차지해
4조달러 정도인 미 달러화 표기 채권 규모를 이미 크게 넘어섰다. 전세계 중앙은행
들이 갖고 있는 외환보유액 중에서도 유로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28%에 달할 정도로
늘어나 달러화를 위협하고 있다.
유로화 외에도 지역 통화체제를 구축하려는 움직임도 갈수록 확산 추세다.
사우디 아라비아 등 걸프 지역 아랍 국가 6개국으로 구성된 걸프협력협의회(GCC)
는 통화동맹 협정초안을 마련하는 등 회원국 간 단일 통화제체 구축하려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답보 상태였던 동아시아 통화체제 구축 논의도 한.중.일 3개국 재무
장관이 지난 10월 중순 만나 통화 스와프 확대 등 역내 협력방안을 논의하기도 하는
등 금융위기 속에 탄력을 받고 있다.
남미에서도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볼리비아.베네수엘라 등 남미공동시장(
메르코수르) 정부 대표들 10월말 회의를 열고 회원국 간 무역거래에서 달러화 사용
을 줄이고 자국 통화 사용을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물론 달러화를 대체할 기축통화가 바로 등장하기는 힘들 것이라는게 대체적인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러나 다른 통화들의 역할이 확대되고 미국의 재정적자 증가 등으로 달러의 위
상은 갈수록 약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10월부터 시작된 2009 회계연도 들어 2개월 동안에만 벌써 4
천16억달러에 달해 연간으로는 1조달러가 훌쩍 넘어설 가능성이 크고, 침체에 빠진
경기를 살리기 위해 미 정부의 재정지출이 갈수록 커질 수 밖에 없는 점을 감안할
때 달러화 가치의 하락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손성원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는 앞으로도 달러가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겠지만 지불준비통화로서의 지위를 유로화, 일본의 엔화, 중국 위안화 등과
공유하게 될 것이라고 최근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