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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섬유한국생사(주) 사장, 부산상공회의소 초대회장,
부산일보 사장, 경남육상경기연맹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무소속으로 제2대 민의원,
1954년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을 역임하였다.
그의 자본가로서의 시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장의 인간적 신뢰로 동경의 본사와 의논해 불하받은 울산의 땅 2만 평이 자본가 변신으로의 첫걸음이었다. 직물공장으로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지기공업(紙器工業)에 진출하였고 마침 터진
중일 전쟁으로 인해 사업성공, 지기제조, 지류무역, 부동산업 등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해방 후 조선견직(전 아사히 견직), 삼화고무, 제사업(製絲業) 등을 주축으로 전국적인 자본가로 성장하였다.
그 후에
1962년 5월, 다시 국내재산도피방지법, 관세법 및 형법, 농지개혁법 위반 혐의로 군검찰로부터 징역 7년을 구형받았는데, 같은 해
6월 20일 구속 상태에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및 부일장학회 소유의 부산 시내 땅 10만 147평을 5·16 장학회에 무상기증한다는 기부 승낙서에 서명하고 날인하였다. 그리하여
6월 22일 공소취소로 석방되었고 5·16 장학회는 나중에
정수장학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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