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활동할 당시에 만주에 무슨 독립군이 있었나? 박정희가 1944년 7월에 북경 동북부 15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열하성 흥륭현 반벽산(熱河省 興隆縣 半壁山)에 주둔한 만주군 제8단(8연대)의 소위로 근무할 당시에 그 지역에 독립군은 없었다.
조선의용군은 화북에 있었고, 총사령관 홍범도(洪範圖)가 이끌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과 지청천(池靑天)이 이끌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김좌진(金佐鎭)이 이끌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같은 만주의 독립군들은 규합했으나 1921년 흑하 사변 후에 러시아 적군에 의해 강제로 무장해제된 후에 포로가 되었는데 지청천 만이 만주로 탈출했다.
지청천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2년 후인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의 총참모장으로써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중국 공산당(中國共産黨)의 압력으로 재만 독립군들은 만리장성의 산해관(山海關)으로 이동했고, 1940년에 중국의 내륙 도시인 중경(重慶)으로 피신해 광복군(光復軍)을 결성했다. 김원봉은 광복군의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이 되고, 중경에 있던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1941년 1월에 창설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의 회장인 김무정(金武亭)을 통해 1941년 7월에 박효삼(朴孝三)을 지대장으로 임명해 재편성함으로써 조선의용대와 분리되어 일제 군대와 전투했으나 대한민국의 독립이 아닌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 실현을 위해 싸웠다. 조선의용군의 활동 지역은 박정희가 소속한 만군 제8단의 주둔지와는 크게 떨어진 북경 서남부 380km 지점에 위치한 하북성 한단시의 태항산(河北省 邯鄲市 太行山)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싸웠던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의 모체는 1938년 중국의 한구(漢口)에서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이 창설한 조선의용대의 화북지대(朝鮮義勇隊 華北支隊)였다. 화북지대의 본부는 팔로군 총사령부가 소재한 태항산(太行山)의 요현 마전(遼縣 痲田)에 있었다.
1942년 7월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바꾸고, 1944년 초에 조선의용군으로 개명한 장소도 중국 산서성(陝西省)의 북부 황하(黃河) 유역에 있는 연안(延安)이었다. 이런 단순한 사실을 간과한 박정희의 독립군 토벌설은 설득력이 없다. 열하(熱河) 지방의 항일투쟁 지도자는 ‘병비(兵匪)’로 유명한 구동북군(舊東北軍) 출신의 탕옥린(湯玉麟)이 중국 국민당정부(中國國民黨政府)와 연계해 활동했지만 1941년에 자취를 감추었다.
박정희가 만주군 제8단으로 근무했던 시점은 이보다 한참 후인 1944년 3월로써 독립군이 만주에서 철수한지 3년이나 경과한 시간이었다. 1945년 8월까지 1년 5개월간의 짧은 근무기간이었다. 항일 유격전을 벌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토벌설도 시차를 간과한 무지에서 기인한 주장이다.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일만군경의 동남부 치안숙정공작에 따른 참빗작전으로 동남3성(東南3省 = 길림吉林, 통화通化, 간도間島)에서 활동하던 약 3천 명에 달하는 동북항일연군의 병력이 전멸되었다. 1940년 2월 23일 제1로군 총사령관인 양정우(楊靖宇)가 전사했다. 1940년 12월 말에 동북항일연군의 패잔병 20여명은 소련원동으로 탈출했기 때문에 만주에서 항일투쟁이 없었다. 물론 박정희가 학도병으로 강제징용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독립군 토벌설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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