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회원에 대한 반말,욕설 글(운영원칙 2,3항) 3회 위반시 접근 차단 조치 됩니다.(원인제공과 관계없이 조치)
하오니, 절대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거법 위반 및 정치관계법 위반행위 신고는 아래 중앙선거관리 위원회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앙선거관리 위원회 http://www.nec.go.kr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
박정희교신도인데 전향해서 노무현교를 창업하시려고?
-----------------------------------
대전제 : 노무현 정권 때 이뤄진 일은 뭐든지 옳다.
소전제 : 노무현 정권 때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결론 :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다.
--------------------------------
일반인은 마이크로필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출력도 가능하다(『滿洲新聞』 康德 六年(昭和 十四年) 三月 三十一日, 日本 國會圖書館 所藏 마이크로필름).
이조차 일본이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조작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신분석학적 처방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혈서 발굴의 일등 공로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조갑제 씨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박정희』(1992, 까치)에서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쓴 사실을 처음 언급하여 발굴추적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박정희 연구자들의 끈질긴 조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친일인명사전 집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2009년 10월에 가서야
가까스로 관련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증언만 있었을 뿐 확실한 증거가 발굴되지 않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지 못할 뻔했던 엄청난 내용들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우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지막 순간에 순국선열들의 보살핌이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기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당초 발굴한 혈서기사에 관한 보도자료를 따로 내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었다.
혈서 자체도 충격이거니와 ‘조국(일본)을 위해 일사봉공(一死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등
편지 내용이 워낙 엽기적이라 톱뉴스가 되고도 넘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치쟁점화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연구소가 방침을 바꿔 자료 공개를 결정하게 된 데는
박 전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의 도발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2009년 10월 28일 일차적으로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을 낸 뒤,
11월 8일로 예정되어 있던 발간보고회 직전인 11월 4일 기습적으로 법원에 배포금지를 추가 신청했다.
사실상 친일인명사전을 금서로 만들려는 악의적인 시도였다.
거기에다 박정희 지지자들의 위협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연구소는 결정적인 증거자료 공개만이 유일한 대응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11월 5일 즉각 보도자료를 배포하게 된 것이다.
~~~~~~~~~~~~~~~~~~~~~~~~~~~~~~~~~~~~~~~~~~~~~~~~~~~~
다카끼 마사오 박정희 친일파 끝!!!!
팩트만 확인하면 이렇네요.
박정희는 출세하고 싶어서 만주군 장교가 됐다.
김대중은 식량을 받아내려고 창씨개명을 했다.
두 행위를 동일선상에서 볼지, 다르게 볼지는 개인의 가치판단에 맡기기로 합시다.
내 개인적 판단은 동일선상에서 보는 건 일제 부역 행위를 면피하고 정당화하려는
반민족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지만.
일반인은 마이크로필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출력도 가능하다(『滿洲新聞』 康德 六年(昭和 十四年) 三月 三十一日, 日本 國會圖書館 所藏 마이크로필름).
이조차 일본이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조작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신분석학적 처방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혈서 발굴의 일등 공로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조갑제 씨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박정희』(1992, 까치)에서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쓴 사실을 처음 언급하여 발굴추적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박정희 연구자들의 끈질긴 조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친일인명사전 집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2009년 10월에 가서야
가까스로 관련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증언만 있었을 뿐 확실한 증거가 발굴되지 않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지 못할 뻔했던 엄청난 내용들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우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지막 순간에 순국선열들의 보살핌이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기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당초 발굴한 혈서기사에 관한 보도자료를 따로 내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었다.
혈서 자체도 충격이거니와 ‘조국(일본)을 위해 일사봉공(一死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등
편지 내용이 워낙 엽기적이라 톱뉴스가 되고도 넘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치쟁점화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연구소가 방침을 바꿔 자료 공개를 결정하게 된 데는
박 전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의 도발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2009년 10월 28일 일차적으로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을 낸 뒤,
11월 8일로 예정되어 있던 발간보고회 직전인 11월 4일 기습적으로 법원에 배포금지를 추가 신청했다.
사실상 친일인명사전을 금서로 만들려는 악의적인 시도였다.
거기에다 박정희 지지자들의 위협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연구소는 결정적인 증거자료 공개만이 유일한 대응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11월 5일 즉각 보도자료를 배포하게 된 것이다.
~~~~~~~~~~~~~~~~~~~~~~~~~~~~~~~~~~~~~~~~~~~~~~~~~~~~
다카끼 마사오 박정희 친일파 끝!!!
일반인은 마이크로필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출력도 가능하다(『滿洲新聞』 康德 六年(昭和 十四年) 三月 三十一日, 日本 國會圖書館 所藏 마이크로필름).
이조차 일본이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조작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신분석학적 처방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혈서 발굴의 일등 공로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조갑제 씨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박정희』(1992, 까치)에서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쓴 사실을 처음 언급하여 발굴추적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박정희 연구자들의 끈질긴 조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친일인명사전 집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2009년 10월에 가서야
가까스로 관련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증언만 있었을 뿐 확실한 증거가 발굴되지 않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지 못할 뻔했던 엄청난 내용들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우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지막 순간에 순국선열들의 보살핌이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기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당초 발굴한 혈서기사에 관한 보도자료를 따로 내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었다.
혈서 자체도 충격이거니와 ‘조국(일본)을 위해 일사봉공(一死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등
편지 내용이 워낙 엽기적이라 톱뉴스가 되고도 넘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치쟁점화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연구소가 방침을 바꿔 자료 공개를 결정하게 된 데는
박 전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의 도발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2009년 10월 28일 일차적으로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을 낸 뒤,
11월 8일로 예정되어 있던 발간보고회 직전인 11월 4일 기습적으로 법원에 배포금지를 추가 신청했다.
사실상 친일인명사전을 금서로 만들려는 악의적인 시도였다.
거기에다 박정희 지지자들의 위협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연구소는 결정적인 증거자료 공개만이 유일한 대응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11월 5일 즉각 보도자료를 배포하게 된 것이다.
~~~~~~~~~~~~~~~~~~~~~~~~~~~~~~~~~~~~~~~~~~~~~~~~~~~~
다카끼 마사오 박정희 친일파 끝!!!!
이숭만이가 미국에서 학위가 있다며 거들먹거리고 돌아다니고
일제의 하수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전명운, 장인환 의사의 변론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개독 정신에 입각해, 살인자의 변론을 맡을 수 없다"고 거절하고
하와이 교포들이 독립운동에 써달라고 십시일반으로 거둬서 맡긴 돈을
개인적으로 삥땅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어도
이승만이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듣네.
반민족 행위자는 일제의 통치 기관 내지 일제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준통치 기관에서 간부 역할을 한 자이다, 라는 전제에 기초에 판단하면 됩니다.
일본군 간부 역할을 했느냐, 아니면 졸병 역할을 했느냐~~~
기준이 아주 명확한데 뭘 걱정하는지.
여기서 하사관이 간부냐 아니냐 하는 쟁점이 도출될 수는 있는데,
박정희는 해당 사항 없음.
일반인은 마이크로필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출력도 가능하다(『滿洲新聞』 康德 六年(昭和 十四年) 三月 三十一日, 日本 國會圖書館 所藏 마이크로필름).
이조차 일본이 박정희를 음해하기 위해 조작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정신분석학적 처방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혈서 발굴의 일등 공로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조갑제 씨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박정희』(1992, 까치)에서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쓴 사실을 처음 언급하여 발굴추적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박정희 연구자들의 끈질긴 조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친일인명사전 집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2009년 10월에 가서야
가까스로 관련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증언만 있었을 뿐 확실한 증거가 발굴되지 않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지 못할 뻔했던 엄청난 내용들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우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지막 순간에 순국선열들의 보살핌이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기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당초 발굴한 혈서기사에 관한 보도자료를 따로 내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었다.
혈서 자체도 충격이거니와 ‘조국(일본)을 위해 일사봉공(一死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등
편지 내용이 워낙 엽기적이라 톱뉴스가 되고도 넘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치쟁점화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연구소가 방침을 바꿔 자료 공개를 결정하게 된 데는
박 전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의 도발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2009년 10월 28일 일차적으로 게재금지가처분신청을 낸 뒤,
11월 8일로 예정되어 있던 발간보고회 직전인 11월 4일 기습적으로 법원에 배포금지를 추가 신청했다.
사실상 친일인명사전을 금서로 만들려는 악의적인 시도였다.
거기에다 박정희 지지자들의 위협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연구소는 결정적인 증거자료 공개만이 유일한 대응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11월 5일 즉각 보도자료를 배포하게 된 것이다.
~~~~~~~~~~~~~~~~~~~~~~~~~~~~~~~~~~~~~~~~~~~~~~~~~~~~
다카끼 마사오 박정희 친일파 끝!!!!
기가막히고 코가막혀서...
미국 한인가정에 불이 났죠...
아이가 불타 죽었는데요...
어머니는 늦게까지 식당에서 일하느라 아이를 집에 혼자두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경찰관과 소방관이 화재 진압하는 현장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이런말을 합니다..
"내가 죽였어..내가 죽였어.."
그 어머니는 살인죄로 감옥에 갔죠...
실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