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역사적 사실이니 알면 넘기십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한 한인애국단은 일제의 통치기관과 관료들을 상대로 테러를 가했고, 이봉창은 일본 덴노를 상대로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중국 신문은 이에 대해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는 표현을 넣은 기사를 썼는데, 이게 외교갈등으로 번져서 상해사변이 일어났다.상해사변에서 승전한 일본은 홍구공원에서 히로히토 덴노 생일 기념으로 열병식을 했는데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 우에다 겐키치 육군대장,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중장, 시게미쓰 마모루 주중 공사 등 7명을 죽거나 다치게 했고 이것이 바로 홍구공원 의거로 1945년 대한민국의 독립에 하나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오로지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우리가 독립하였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될 정도이다. 실제로 이 사건 직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조선인들을 '일제의 앞잡이'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이 때문에 만보산 사건 같은 중국인 - 조선인의 대립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상하이 사변을 자축하는 일제의 기념 행사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이게 조선인 청년 한 명의 의거라는 것이 알려지자, 중국인들 사이에서 조선을 항일 동지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퍼졌다. 더구나 윤봉길 의사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은 수많은 세계인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세계 여론을 완전히 긍정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중국의 통치자였던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장제스는 윤봉길의 의거 소식에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1명이 이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는 말로 극찬한 뒤 김구를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무다구치 렌야의 뜬금없는 도발과 함께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후 처리를 먼저 논의하기 위해서 연합국 3국정상, 루즈벨트, 처칠, 그리고 장개석의 회담이 카이로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회담 직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식민지의 독립이 전후 영국령 인도의 독립 의식 고취에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특사를 보내어 전후 한반도를 신탁통치 구역으로 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는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임정도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주석 김구는 장제스를 만나 카이로 회담서 한국의 독립을 결의해줄 것을 당부했고, 장제스는 이를 약속하였다. 이후 카이로 회담서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문구로 합의가 이루어짐으로써 한국의 독립이 보장 되었다.
이후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일본의 숨통을 조여왔고, 도쿄를 불바다로 만들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 초토화시키며, 소련도 참전시키면서 일본의 주전 의지를 확실하게 꺾었고 결국 무조건 항복시켰다. 무슨 우연이였는지 당시 일본 외무상이던 시게미쓰 마모루는 미국 전함 미주리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는데 그는 홍구공원에서 입은 부상으로 다리 한쪽을 잃어서 의족을 착용하고 있었다.
여담으로 당시 임정에서 탄핵됬던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절하했다.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론주의자로 장인환과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암살했을 때 미국내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되는걸 목격했고 미국식 의회민주주의를 배운 사람으로서 '정치인 테러' 같은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훗날 한인애국단 활동의 성과 보고서 형식으로 출판된 '도왜실기' 서문에서 이승만은 "윤봉길의 의거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중국 국민당 정부와 임시정부의 연합을 가능케 한 사건이며, 카이로 회담에까지 이어지는 국제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즉, 윤봉길의 의거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결의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했다.
무지로 인해서 헛소리하는 역알못들이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