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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서는 박정희 열혈 빠돌이이자 박정희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조갑제 조차도 혈서 존재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
박정희가 혈서 쓰는 장면을 옆에서 직접 목격했다고 당시 박정희 교사 시절 동료교사가 직접 증언까지 해줬습니다
혈서 부정하던 인간들도 요즘은 아닥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어디 딴세상에 살다 오셨나..?
전남지구 해상방위대(목포지구 해상방위대, 목포해상방위대)는 한국 전쟁 당시 송인명 목포경비부 사령관의 지시로 창설된 것 입니다
송인명은 목포경비부 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 군과 경찰만으로 공산 잔당 소탕과 안녕질서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목포시내 청년단과 여성청년단 등 애국단체들을 모두 동원해 작전을 보조케 했으며, 특히 해상작전이 중요했기 때문에 당시 지역유지이던 오재균에게 지시, 해상방위대를 창설해 오재균에게 대장을, 김대중에게 부대장을 맡겼다고 증언했다.
해상방위대는 1950년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와 국방군사연구소에서 발행한 국방사연표에 분명히 근거가 있다고 반박했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1997년 대선 토론회에서 자신의 병역의혹에 대해
국방부가 천용택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해상방위대는 해군목포경비부 연혁사 제39쪽의 기록으로 봐 목포 지역에서 약 1년간(50-51년) 존속됐던 보조기관으로 존족했음...국방부는 천용택 국민회의 의원에게 "해군 목포경비부 연혁사 39쪽에 '당 경비부 내 보조기관인 해상방위대를 총참모장의 명으로 완전해체하고 건물 일체를 인수함'이라는 기록이 51년 5월 3일자로 나온다"는 내용의 답변서를 보냈다
'천 의원이 이날 공개한 자료는 모두 세 가지다. 김 총재가 지난 50년 9.28 수복 뒤 해군목포경비부 산하 해상방위대 창설에 참여해 공비소탕작전 지원 및 보급품 수송 등에 참여했다는 주장을 입증해주는 송인명 당시 목포경비부 사령관의 증언을 담은 녹취록과 녹화테이프다. (중략) 두 번째는 국민회의 국방위원들이 입수한 국방부의 답변자료다. 국방부는 "목포경비부는 해군본부 예하부대로서 49~74년까지 실존 운영됐으며 해상방위대는 목포경비부 기구표상에는 없으나 관련 문헌 상의 기록으로 보아동 지역에 약 1년여간 존속되었던 보조기관으로 추정된다"고 답변해 목포경비부의 존재를 인정했다. (중략) 세 번째 자료는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김성은 전 국방장관의 증언이다. 김 전 장관은 "46년 해안경비대 창설 임무를 띠고 목포에 부임해 김 총재의 장인 차보륜씨 집에 머물 때 차씨로부터 김대중씨가 청년단에서 활동하고있다고 소개받았다"고 밝혔다.'(한겨레 기사에서 일부 발췌)
김대중은 1950년 연말 해상방위대에 입대하여 전라도지구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정부는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설치법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육군방위대와 함께 연안경비를 위해 해상방위대가 설치되었다. 방위대는 국군의 보조기관으로 북한 정규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부대의 소탕을 목적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김대중이 해상방위대 전라도지구 부사령관에 임명된 것은 해운사업을 하고 있으면서 해군목포경비사령부 장교들과 친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김삼웅의 인물평전 중에서 일부 발췌)
- DJ 복무 해상방위대 실재 확인 (1997년, 한겨레)
- 국민회의"해상방위대 복무"당시 사령관 증언등 공개 국방부도 인정.(1997년, 한겨레)
- 해상방위대 부사령관으로 활동(김삼웅의 인물 평전에서 일부 발췌)
- 경북연안일대 해상방위대결성(1950년, 동아일보)
- 우리 해안경비대의 눈부신 활약(1947년,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