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전두환에 의해 12.12 쿠데타가 일어났고 군부를 완전장악한다.
1979년 연말은
12.12 사태로 인해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대학방학을 이유로 이 쿠데타에 대한 지식인 계층의 대처와 항명서는 뒤늦게 이어진다.
결국 대학가가 개학을 맞이한 3월에서야 신군부에 의한 군부장악과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지게 되었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더해서 군사훈련반대 움직임이 일어난다. 유신정권당시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아야했다. 박정희가 죽은 이 때 학생들은 당연히 이 불합리한 훈련에 반발했다.
이 와중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은 <정부에서 안개정국을 해결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실력행사에 나설 수 밖에 없다>라며 5월 13일을 그 한계로 못박았다. 의도한 발언이었는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학생회의 이 발언은 곧 전 대학으로 퍼졌고, 예정된 날 운동권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를 '서울의 봄'이라고 하였다. 특히 이는 5월 15일에 절정을 이루어서, 서울역 광장에는 서울 32개 대학에서 약 10만 여명의 학생과 군중들이 모였다. 잘하면 청와대까지 진출할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잘하면 민주화에 성공할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가 왔다는 소문에 겁을 먹은 그는 연설대(라고는 하지만 버스) 위에서 해산 결정을 내리게 된다. 유시민 당시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 등 반발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귀가하여 마지막까지 남았던
고려대가 해산하며 서울의 봄은 일단락 지어졌다.
그리고 5.17일자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전두환정권은 시위 주모자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했다. 이 사건을 서울역 회군이라고 하여 민주화를 10여년 뒤로 늦춘 사건으로 평가한다.
5월 17일
1980년 4월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소위 사북사건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국회에서도 비상계엄 해제를 논의하기 위한 본회의 개최를 결정하게 되자 신군부는 이를 막고 정권장악을 기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두환, 노태우 등의 압박으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단행하였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 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17일새벽에 계엄군은 전국 대학교의 학생운동권 관련 학생들을 모조리 검거했고, 18일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초법적 사태가 일어났다. 국회 또한 폐쇄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조치였다.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이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