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최대 치적이라 하면 군사정부도 하지 못했던 금융실명제의 관철과
함께 CDMA기술 상용화에 국가적인 역량을 몰아 줬던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기술 상용화에 수많은 재원
과 수많은 인력들이 수많은 날밤을 지새우며 매달린 통에 연구원중 일부는 이혼을 당해 가정이 파탄나고
과로로 죽어 과부를 양산하는등 실로 민관이 힘을합쳐 눈물겨운 노력을 쏟게되죠.
그러다 결국 감격적인 세계최초 코드분할 다중기술 상용화라는 금자탑을 이루는데요. 이동통신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사업은 정부의 과단성 있는 막대한 투자와 헌신적 노력으로 만약 이같은 성공이 없었다
면 오늘날 이 세계적인 불황속에서도 한국의 외환보유고를 빵빵하게 채워주는 휴대전화 사업은 있을수
없었다. 저는 이렇게 단언해요 (물론 아니라고 강하게 윽박지르시면 도망갈 준비는 되어있습니다.)
아날로그 통신이 분화되면서 시티폰등을 거쳐 PCS폰 사업으로 한국 휴대전화 산업은 폭발적인 성장세
를 보이며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되죠. 세월이 흘러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야당이 된 신한국당엔
권력교체로 인한 기존 정부일을 하던 숱한 인재와 인사들이 갈곳없어 몰려있는 그런 난민수용소처럼
됩니다. 그중엔 정보와 공안분야에서 수많은 경력을 쌓아온 정형근 의원도 있었는데 이 사람은 신한국
당의 정보와 기밀을 다루는 책임자가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턴가 자신의 이야기가 새고있다는 생각
을 하게되죠. 한 번 든 의구심은 갈수록 깊어지고 밀레니엄으로 바뀐 이후 결국 제조업체를 통해 극소량 샘플로 제조된 감청이 불가능한 비화폰을 사용하게 됩니다. 비화폰은 비화폰끼리만 해야 감청이 저지되기 때문에 이회창총재등 수뇌들이 나눠갖게되죠. 그런데 이게 정치쟁점화가 됩니다. 정부가 정적을 사찰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게 되는건데.
정부는 공식적으로 씨디엠에이 폰은 감청이 불가능하다고 발표를 하게 되죠. 복잡한 복조신호체계로
이론적으로 감청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고 이 발표는 금과옥조처럼 쓰이며 오히려 역풍을 맞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정치적으로 정형근은 과거 안기부시절의 행적까지 더해져 대단한 타격을 입게되죠.
그리고 세월은 흐르고 흘러 다시 노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들어선지 3년째 되던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네.. 공안전문가 정형근의 촉이 실로 대단했다고 밖에 할수가 없습니다. 억울했겠지만 정권을 탈환하고
나서 국회뱃지의 꿈은 버리고 그간 하고싶었던 복지분야의 일을 열심히 하며 살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