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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2-24 10:50
광주교도소 습격 반박글입니다
 글쓴이 : 트러블이당
조회 : 1,166  

 
퍼온곳:http://www.skepticalleft.com/bbs/board.php?bo_table=01_main_square&wr_id=96119&sca=&sfl=wr_name%2C1&stx=%EA%B0%88%EC%B2%9C&sop=and
 
 
시민군이 다른지역에 광주상황을 알릴려고 타지역으로 나가던 시민군을 무차별 사격을 했다는거고 결코 습격이 아니였다는데 여기서 의문은 그들이 왜 총과 폭약등을 차에 소지했냐는 거죠 무고한 관련 없는 시민인척 다른지역으로 갔으면 된건데 말이죠 ㅇㅅㅇ  그리고 교도소 인근 야산에서 교도소쪽을 향해 사격한점
 
밑줄치거나 붉은 글을 보시면 됩니다.
 
 
아마데우스님께서 광주사태당시 시위대의 교도소 공격은 사실이 아니며 실상은 광주사태의 비극을 타지방으로 알리려 빠져나가려는 시위대들을 공수부대가 차단하면서 시위대들을 학살한 것이라고 주장하셨으며
그 근거로 광주교도소는 사면이 고속도로와 담양행국도로 둘러쌓여 있는 형태이고, 시위대 차량과의 충돌은 모두 진압군이 21일 저녁 교도소로 부터 200~300m 떨어진 도로에 설치한 바리케이트에서 발생했다고 했습니다.(필명 오월님과 김영택씨의 글을 참조)
 
제가 항소심의 판결문 일부를 인용하며 시위대들은 교도소를 공격한 것이 맞다고 말씀드렸더니
 
항소심판결은 전두환통치 당시 이루어졌던 제반 법률행위들에 대한 법적 안정성을 흔들지 않기 위해 진압군의 행위를 과잉진압 학살이 아닌 정당한 방어로 판정했던 것으로서 사실을 부분적으로 왜곡한 것이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항소심 판결에 따라 교도소 공격이 분명히 있었고 그 의미는 제봉님의 부정적 의견에도 불구하고 광주측의 위험한 반역적 행태의 하나임에 틀림없다고 봅니다.
 
교도소 공격이 분명하다고 보는 이유는
 
첫째 이미 제가 제시한 판결문 요약문에 분명히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인용....무장시위대로 부터 도합 5차례의 공격을 받은 사실, 5.22 00:40경에는 무장한 시위대가 차량 6대에 분승하여 광주교도소로 접근하여 계엄군과 교전한 일이 있고
같은날 09:00경 다시 무장시위대가 2.5t 군용트럭에 엘엠지(LMG) 기관총을 탑재한 상태에서 광주교도소 정문방향으로 접근하면서 총격을 가하였고...인용끝>
 
정문을 목표로 2.5톤 군용트럭으로 돌진하면서 기관총을 난사하면 그것이 교도소 공격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정문은 교도소 남쪽과 동쪽이 만나는 모퉁이에 있고 담양행국도변에서 160m 왼쪽 교도소쪽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시위대들은 진압군의 바리케이트를 뚫고 담양국도에서 교도소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교도소 정문으로 110m를 돌진하다가 정문을 50m 남기고 3공수11대대의 공격으로 저지되었던 것입니다.
 
아래 특전사 전투상보에 기재된 것을 보면 
23일 08:00 교도소 앞 총격 - 21/2 톤에 탑승한 폭도 6명이 교도소로 접근, 50미터 전방의 바리케이트에 봉착, 진출하지 못하자 11대대에서 즉각 응사 
--> 교도소 앞이라 함은 담양행 국도상이 아니고 바로 교도소 정문 앞이었던 것입니다
 
판결문 원문을 보면 재판부는 1심의 증거에 더해서 임헌표 당시 전교사 교육훈련부장의 진술을 채택했습니다.
<인용....그러나 위에나온 증거들과 증인 임헌표의 당심 법정에서의 진술과 검사작성의 임헌표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의 기재 및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26호 중 임헌표의 진술기재(동 수사기록 제37권 43963~43997면)를 종합하면...인용끝>
 
임헌표는 소위 전두환 메모 "소선배, 공수부대애들 기죽이지 말아주십시오"의 존재를 증언하여 신군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사람입니다.
 
 
둘째 나머지 4차례의 공격 역시 교도소를 목표로 했다고 판단 되는데
 
1. 아무리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시위대의 차량이라 하더라도 캄캄한 야밤에 버스,트럭등 중형차량을 동원하여 교도소를 방어하는 진압군에 총격을 가하는 행위가 단순히 통행을 위한 것이라 볼 수 없고
 
2. 무엇보다 전남대 5.18연구소에 보관된 광주시위대측의 증언들 상당수가 시위대들이 교도소를 목표로 이동했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친구와 헤어지고 다시 시민군 차를 탔다. 교도소로 간다고 했다...(.위성삼)
차에 탄 우리는 곧바로 광주교도소로 향했다. 교도소에서 군인들이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한다는 소리를 들어서..(김기광)
교도소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들은 우리 소대장은 대원 5명과 함께 지원하러 교도소로 떠났다.(안성옥)
바로 그때 지프차 한 대가 교도소를 습격하러 가기로 했다면서 차에 타라고 했다.(최인영)
운전대를 잡은 청년이 교도소로 간다고 했다. 교도소를 향해 가고있는데...(손종대)
모두 죽는다" 면서 말렸으나 시민들이 죽는 광경을 보고 온 그들은 시민군들을 태우고 교도소를 향해서 갔다(임춘식)
교도소로 가자며 다시 차를 돌려 교도소로 향했다...교도소는 안 되겠다며 3시에 도청을 탈환하니 가자고 했다(이지형)
일부 사람들이 4대의 군용트럭에 나뉘어 타고 교도소로 간다고 했다. 나는 일행들과 자켜보고 있다가 무서울 것 같아 따라가지 않았다(김연태)
 
교도소를 방어했던 공수부대측의 증언을 들어보면 여러분은 좀 더 입체적인 시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 증언은 사실 광주사태를 비판하는 보수우파들이라면 생기초적로 알고 있는 자료입니다.좌파 여러분의 눈에는 거슬리는 표현도 있을 것입니다만, 아래 김치년씨의 증언을 읽어보십시오.
 
3공수여단 12대대 작전병 출신의 실명수기/내가 겪은 광주사태 「전투는 있었지만 학살은 없었다」 기고자 : 김치년 월간조선 [발행일] 1996.04.01
....특히 장갑차에서 기어 나온 시민군은 그때까지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는데 그의 등에는 「운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매우 심하게 구타를 당한 뒤 후송됐다. 장갑차는 한동안 공터에 세워져 있었다.
필자가 확인한 그 장갑차 속에는 주먹밥 두어 개와 소주병 그리고 태극기가 들어 있었으며 20대 전후로 보이는 그 사람은 그때까지 만취되어 있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가 지르는 소리는『대한민국 만세, 날 죽여라 이놈들아』등이었는데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양쪽 다 대한민국을 위한다며 생지옥을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대는 서둘러 광주 교도소에 도착하였고 우리 대대는 교도소에서 정문 방향으로 우측 그러니까 광주 시내를 향하여 호남고속도로와 인접한 부분까지 배치되었다.
필자를 포함한 당시 계엄군들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은 대체 누가 저들을 그토록 광분시키며 조직적으로 시위에 합류토록 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대부분 첫날부터 비롯된 과잉진압으로 公憤에 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란 설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상황을 자세히 겪은 사람들은 이런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이 장갑차를 탈취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외국 군대도 아닌 국군에게 달려든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이 교전 끝에 버스만 그대로 돌아갔고 지프차는 고속도로 위에 총격을 받은 채 멈추어 섰다. 우리는 30여 분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자 우리는 지프차로 향했다. 가보니 그 속에는 2명의 젊은 생명이 태극기를 감싸고 총을 든 채 죽어 있었다. 시민군들이 몰고 온 차량 모두가 그런 모양인지는 모르겠으나 지프차 안에도 소주병과 김밥, 주먹밥이 탄창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자 우리는 지프차로 향했다. 가보니 그 속에는 2명의 젊은 생명이 태극기를 감싸고 총을 든 채 죽어 있었다. 시민군들이 몰고 온 차량 모두가 그런 모양인지는 모르겠으나 지프차 안에도 소주병과 김밥, 주먹밥이 탄창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5월 22일 아침 교도소 정면 도로에 서 있던 버스 1대를 견인해 왔으며 조금 후에도 또 다시 총성이 났다. 교도소 정면 도로 너머에 조그마한 야산이 있었는데 당시 이곳에는 백설표 설탕을 선전하는 커다란 광고탑이 있었다.
총알은 이 광고탑 부근에서 날아왔다. 약 50~60여 명의 시민군들이 이 광고탑을 주위로 하여 교도소를 향해 사격을 가해 왔으며 그것은 우리 대대 정면 방향이었다. 우리는 이 고지를「설탕고지」라고 이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대대장은 1개 지역대를 선정했고, 지역대장 중 가장 고참이 근무하던 6지역대가 선발대로 시민군과 교전을 하게 됐다. 당시는「설탕고지 탈환작전」인 셈이다.
약 1시간에 걸친 부대의 진격 끝에 이 고지는 우리가 점령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교도소 옥탑 양쪽에 설치된 M-60 기관총에의 지원 사격 때문이었다. 이때 시민군 사상자들이 얼마나 됐는지 필자는 알 수 없다.
설탕고지를 진압한 6지역대가 임무교대를 위해 철수하고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이번에는 군용트럭 1대가 교도소 정문을 향하여 맹렬하게 질주하며 달려들었다. 교도소 옥탑에 설치된 M-60 기관총에서 실탄을 차량에 퍼부었다.
시민군이 몰고 온 군용차량은 총알 구멍을 무수히 낸 채 멈추어 섰고 그 위에서 4명이 뛰어내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중 1명은 저격병에 의해 죽었고 나머지 3명은 포복으로 끝내 인가 쪽으로 기어서 도망가 버렸다.(이 무렵 트럭을 타고 지나던 민간인이 총격을 받아 한 명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곧이어 그 트럭을 견인해 왔는데 거기엔 놀랍게도 다이너마이트 2상자와 수류탄 4~5개가 실려 있었다. 만약 이것이 폭발했다면 교도소 정문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이제 제봉님의 주장에 대해 답할 차례입니다.
비록 시위대들이 산발적으로 교도소를 공격했다해도 그것은 최정예 공수부대 1개여단이 강력하게 지키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충격을 주는가하는 의문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역시 죽일놈의 전두환이 쿠테타를 하면서 시민을 죽였기 때문에 이 모든일이 발생되었기 때문에 광주시위대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당시는 전두환이 쿠테타를 했다고 볼수는 없는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국헌문란에 의한 내란범행을 시작하고 막 진행중인 상태입니다만 본격적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쿠테타는 국보위 활동 부터일 것입니다. 전두환 본인도 자신의 행위를 쿠테타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최규하 정권내에서 혼란을 이용한 정국장악 시도 정도이겠지요.  
교도소 공격은 말이죠 심각한 사안입니다. 외부에서 총격이 계속되면 감방안에 갇혀 세상을 증오하며 특히 공산주의혁명을 꿈꾸고, 노동자 천국의 도래를 기다리며 한평생을 살아왔던 사상범들에게는 세상이 뒤집혀지는 새 날이 오는 겁니다. 성냥불 하나 그으면 폭발하는 것이죠.
교도소안에서는 심야에 교도소밖 사방에서 발사되는 총소리를 듣고 드디어 새세상이 왔다며 2000명의 죄수들이 일제히 폭동을 일으키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밖에 배치되었던 병력을 교도소안으로 돌리면 외곽경비는 그만큼 취약해 지고.. 밖에서는 계속 총격을 가하고. 교도소 밖과 안이 서로 호응하면서 연쇄반응으로 사태가 악화되어 가는 것이지요.   
신현확의 경험을 들어보시겠습니까? 4.19 직후부터 5.16 직전까지 교도소 안에서 무슨 일이벌어졌는지.
 
신현확이 만난 간첩. / 월간조선 1999년 2월. 신현확의 육성증언에서 발췌.

대통령 암살과 군부의 하극상, 정치권의 대공세라는 국가위기상황을 맞은 신총리의 역할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그의 소신과 국가관, 시국의 흐름을 꿰뚫는 통찰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배짱과 통찰력, 현실인식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답은 아마 신총리의 감옥살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신총리는 자유당 말기 부흥부장관으로서 3.15부정선거에 관여한 죄목으로 2년 3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바 있다.
<3.16 선거가 부정선거가 됐단 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죄목이 “자유당표가 너무 많으니까 국무회의에서 자유당표를 줄여야한다는 결의를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을 받았지.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나>
<3.16 선거가 부정선거가 됐단 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죄목이 “자유당표가 너무 많으니까 국무회의에서 자유당표를 줄여야한다는 결의를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을 받았지.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나>
이 장면에서 신총리 측근의 보충설명. “신총리의 증언에 의하면 3.15선거 당시 국무위원들이 개표상황을 지켜보고있는데 부통령후보인 이기붕씨와 장면씨의 표가 92대8로 나오자 국무위원들이 최인규장관을 불러 ‘이건 시중여론과 너무 다른 것 같소’하고 지적했답니다. 그러자 갑자기 개표결과가 70대30으로 바뀌었답니다. 이것이 4.19 이후 국무위원들이 부정선거에 개입한 혐의의 증거가 된 거지요”
< 전 국무위원이 15년 구형을 받았고 선고는 7년6개월으로 잘랐지. 그중에 중심인물은 무기, 최인규는 나중에 사형이 집행됐고 나머지는 전무 7년6개월. 이래가지고 있었는데...5.16 혁명 나기전에 어땠나 하면 내 방에 간첩이 두 명 있었어. 그러면 어떤지 알아? 아홉명이 앉아 자요. 거기엔 살인범이 있고 쓰리꾼도 있고...전부 같이 넣었어. 그리고 우리 일행은 한 방에 한사람씩 집어 넣었어. 두 사람이 있으면 의논한다고..말로 형언할 수가 없는 거요. >
하루아침에 장관신분에서 죄수가 된 신총리는 간첩과 한방에 투옥됨으로써 국가안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오죽했으면 5.16이 일어 났을 때 감방안에서 “이제 赤化는 면하게 됐다”면서 만세를 불렀을까. 다시 신총리의 증언.
< 그 감옥 내부는 어땠느냐. 간첩도 같이 있었는데, 서울대학교 졸업생도 한 놈 있었어. 서울대 졸업하고 월북해서 김일성대학 졸업하고 간첩교육을 5년 받고 넘어와서 활동하다가 붙잡혀 들어왔다 이말이야. 잡힌 것이 아니고 저희형 아버지가 알고 이놈을 억지로 붙잡아 가지고 자수시켰단 말이야. 자기들이 무사할려고.
똑똑하긴 똑똑한 놈이야. 그게 학생조직에 들어가서 어떻게 활동했고 4.19를 어떻게 조직하고, 그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다 하는거야. 내가 그 얘기를 다 들었지. 이 놈은 그 얘기를 나한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다른 놈들 교육시키는 거야. 절도, 강도, 살인범 이런 놈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거지. 사흘만 지나면 전부 간첩 지지자가 되는 거야.
그 안에는 이체제에 대해 좋다고 찬성하는 놈 한 놈도 없는거야. 간첩 한 놈만 있으면, 사흘 지나면 간첩이 오야붕 되는 거야. 그래 얘기를 죽 하기에 내가 물었어.
‘네가 넘어왔을 때 처음 어디에 갔느냐?’
‘서울시내 명동에 갔습니다’
‘명동에서 어떻게 느꼈느냐?’ 하니 그놈 말이 명동에 가보니, 시골에서 닭을 키우면 새벽에 닭장을 열어준다. 그럼 닭이 와하고 닭장에서 나가는 거와 똑같다는 거야.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닭이 몰려나가는 거하고 똑같지 이게 뭐 사람사는 사회냐. 이렇게 말하더라고.
내가 이북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평양은 다 목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나오고, 줄서서 다니고, 목적에 따라 움직이지, 닭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지 않습니다. 이러는 거야.
자유가 뭐고 통제가 뭐라는 걸 전혀 모르는 거야. 그 놈이, ‘남한적화가 이제 얼마 안남았다’ 는 거야. 오래 가야 두 달 남았다. 신문도 안들어 오고 라디오도 없는 콘크리트방안에 앉아있는 데도 정보가 다 들어오는 거야. 온갖 기술 동원해서 통신이 24시간 계속되는 거야. 내가 2년 7개월 살아서 잘 알아. 목침을 벽에다 대고 말하면 전화랑 똑같 해. 옆 방에서 말하면 다 들리는 거야. 이런 식으로 모든게 다 전달이 되었어.
사회상을 판단해 보니 정말 간첩들 말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뒤집어지겠구나. 2년3개월 동안 거기 들어앉은 우리가 최대로 걱정한 것이 “이 나라가 언제 뒤집어 지나” 이거야. 대한민국 망하는 거 아니냐고 !
그러다가 5.16이 떡 났을 때 그 안에서 모두 만세를 불렀어. 이제는 赤化 안된다 하고. 이게 진짜요! 아 죄수들 중에서도 우리들 같은 사람들 있지만. 대부분은 저짝이었다고. 군사혁명을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그 소식만 듣고는 “이제 赤化를 면했다”고 만세를 불렀다니까!! >
< 5.16 혁명이 나니까 또 다시 혁명재판을 한대..내가 혁명검찰에서 3분 조사받고..하하. 조사를 3분 받았다니까. 또 다시 기소, 재판, 언도 7년6개월.. 이렇게 된거지.
우리는 “한국은 赤化 안되고 이제는 살았다!” 이러카는데 아무 조사도 안하고, 나한테는 3분 조사하고...혁명정부라는게 또 도대체 뭐냐. 엉터리도 분수가 있지. >
총알은 이 광고탑 부근에서 날아왔다. 약 50~60여 명의 시민군들이 이 광고탑을 주위로 하여 교도소를 향해 사격을 가해 왔으며 그것은 우리 대대 정면 방향이었다. 우리는 이 고지를「설탕고지」라고 이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대대장은 1개 지역대를 선정했고, 지역대장 중 가장 고참이 근무하던 6지역대가 선발대로 시민군과 교전을 하게 됐다. 당시는「설탕고지 탈환작전」인 셈이다.
약 1시간에 걸친 부대의 진격 끝에 이 고지는 우리가 점령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교도소 옥탑 양쪽에 설치된 M-60 기관총에의 지원 사격 때문이었다. 이때 시민군 사상자들이 얼마나 됐는지 필자는 알 수 없다.
설탕고지를 진압한 6지역대가 임무교대를 위해 철수하고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이번에는 군용트럭 1대가 교도소 정문을 향하여 맹렬하게 질주하며 달려들었다. 교도소 옥탑에 설치된 M-60 기관총에서 실탄을 차량에 퍼부었다.
시민군이 몰고 온 군용차량은 총알 구멍을 무수히 낸 채 멈추어 섰고 그 위에서 4명이 뛰어내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중 1명은 저격병에 의해 죽었고 나머지 3명은 포복으로 끝내 인가 쪽으로 기어서 도망가 버렸다.(이 무렵 트럭을 타고 지나던 민간인이 총격을 받아 한 명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곧이어 그 트럭을 견인해 왔는데 거기엔 놀랍게도 다이너마이트 2상자와 수류탄 4~5개가 실려 있었다. 만약 이것이 폭발했다면 교도소 정문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이제 제봉님의 주장에 대해 답할 차례입니다.
비록 시위대들이 산발적으로 교도소를 공격했다해도 그것은 최정예 공수부대 1개여단이 강력하게 지키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충격을 주는가하는 의문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역시 죽일놈의 전두환이 쿠테타를 하면서 시민을 죽였기 때문에 이 모든일이 발생되었기 때문에 광주시위대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당시는 전두환이 쿠테타를 했다고 볼수는 없는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국헌문란에 의한 내란범행을 시작하고 막 진행중인 상태입니다만 본격적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쿠테타는 국보위 활동 부터일 것입니다. 전두환 본인도 자신의 행위를 쿠테타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최규하 정권내에서 혼란을 이용한 정국장악 시도 정도이겠지요.  
교도소 공격은 말이죠 심각한 사안입니다. 외부에서 총격이 계속되면 감방안에 갇혀 세상을 증오하며 특히 공산주의혁명을 꿈꾸고, 노동자 천국의 도래를 기다리며 한평생을 살아왔던 사상범들에게는 세상이 뒤집혀지는 새 날이 오는 겁니다. 성냥불 하나 그으면 폭발하는 것이죠.
교도소안에서는 심야에 교도소밖 사방에서 발사되는 총소리를 듣고 드디어 새세상이 왔다며 2000명의 죄수들이 일제히 폭동을 일으키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밖에 배치되었던 병력을 교도소안으로 돌리면 외곽경비는 그만큼 취약해 지고.. 밖에서는 계속 총격을 가하고. 교도소 밖과 안이 서로 호응하면서 연쇄반응으로 사태가 악화되어 가는 것이지요.   
신현확의 경험을 들어보시겠습니까? 4.19 직후부터 5.16 직전까지 교도소 안에서 무슨 일이벌어졌는지.
 
신현확이 만난 간첩. / 월간조선 1999년 2월. 신현확의 육성증언에서 발췌.

대통령 암살과 군부의 하극상, 정치권의 대공세라는 국가위기상황을 맞은 신총리의 역할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그의 소신과 국가관, 시국의 흐름을 꿰뚫는 통찰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배짱과 통찰력, 현실인식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답은 아마 신총리의 감옥살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신총리는 자유당 말기 부흥부장관으로서 3.15부정선거에 관여한 죄목으로 2년 3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바 있다.
<3.16 선거가 부정선거가 됐단 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죄목이 “자유당표가 너무 많으니까 국무회의에서 자유당표를 줄여야한다는 결의를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을 받았지.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나>
<3.16 선거가 부정선거가 됐단 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죄목이 “자유당표가 너무 많으니까 국무회의에서 자유당표를 줄여야한다는 결의를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을 받았지.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나>
이 장면에서 신총리 측근의 보충설명. “신총리의 증언에 의하면 3.15선거 당시 국무위원들이 개표상황을 지켜보고있는데 부통령후보인 이기붕씨와 장면씨의 표가 92대8로 나오자 국무위원들이 최인규장관을 불러 ‘이건 시중여론과 너무 다른 것 같소’하고 지적했답니다. 그러자 갑자기 개표결과가 70대30으로 바뀌었답니다. 이것이 4.19 이후 국무위원들이 부정선거에 개입한 혐의의 증거가 된 거지요”
< 전 국무위원이 15년 구형을 받았고 선고는 7년6개월으로 잘랐지. 그중에 중심인물은 무기, 최인규는 나중에 사형이 집행됐고 나머지는 전무 7년6개월. 이래가지고 있었는데...5.16 혁명 나기전에 어땠나 하면 내 방에 간첩이 두 명 있었어. 그러면 어떤지 알아? 아홉명이 앉아 자요. 거기엔 살인범이 있고 쓰리꾼도 있고...전부 같이 넣었어. 그리고 우리 일행은 한 방에 한사람씩 집어 넣었어. 두 사람이 있으면 의논한다고..말로 형언할 수가 없는 거요. >
하루아침에 장관신분에서 죄수가 된 신총리는 간첩과 한방에 투옥됨으로써 국가안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오죽했으면 5.16이 일어 났을 때 감방안에서 “이제 赤化는 면하게 됐다”면서 만세를 불렀을까. 다시 신총리의 증언.
< 그 감옥 내부는 어땠느냐. 간첩도 같이 있었는데, 서울대학교 졸업생도 한 놈 있었어. 서울대 졸업하고 월북해서 김일성대학 졸업하고 간첩교육을 5년 받고 넘어와서 활동하다가 붙잡혀 들어왔다 이말이야. 잡힌 것이 아니고 저희형 아버지가 알고 이놈을 억지로 붙잡아 가지고 자수시켰단 말이야. 자기들이 무사할려고.
똑똑하긴 똑똑한 놈이야. 그게 학생조직에 들어가서 어떻게 활동했고 4.19를 어떻게 조직하고, 그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다 하는거야. 내가 그 얘기를 다 들었지. 이 놈은 그 얘기를 나한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다른 놈들 교육시키는 거야. 절도, 강도, 살인범 이런 놈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거지. 사흘만 지나면 전부 간첩 지지자가 되는 거야.
그 안에는 이체제에 대해 좋다고 찬성하는 놈 한 놈도 없는거야. 간첩 한 놈만 있으면, 사흘 지나면 간첩이 오야붕 되는 거야. 그래 얘기를 죽 하기에 내가 물었어.
‘네가 넘어왔을 때 처음 어디에 갔느냐?’
‘서울시내 명동에 갔습니다’
‘명동에서 어떻게 느꼈느냐?’ 하니 그놈 말이 명동에 가보니, 시골에서 닭을 키우면 새벽에 닭장을 열어준다. 그럼 닭이 와하고 닭장에서 나가는 거와 똑같다는 거야.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닭이 몰려나가는 거하고 똑같지 이게 뭐 사람사는 사회냐. 이렇게 말하더라고.
내가 이북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평양은 다 목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나오고, 줄서서 다니고, 목적에 따라 움직이지, 닭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지 않습니다. 이러는 거야.
자유가 뭐고 통제가 뭐라는 걸 전혀 모르는 거야. 그 놈이, ‘남한적화가 이제 얼마 안남았다’ 는 거야. 오래 가야 두 달 남았다. 신문도 안들어 오고 라디오도 없는 콘크리트방안에 앉아있는 데도 정보가 다 들어오는 거야. 온갖 기술 동원해서 통신이 24시간 계속되는 거야. 내가 2년 7개월 살아서 잘 알아. 목침을 벽에다 대고 말하면 전화랑 똑같 해. 옆 방에서 말하면 다 들리는 거야. 이런 식으로 모든게 다 전달이 되었어.
사회상을 판단해 보니 정말 간첩들 말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뒤집어지겠구나. 2년3개월 동안 거기 들어앉은 우리가 최대로 걱정한 것이 “이 나라가 언제 뒤집어 지나” 이거야. 대한민국 망하는 거 아니냐고 !
그러다가 5.16이 떡 났을 때 그 안에서 모두 만세를 불렀어. 이제는 赤化 안된다 하고. 이게 진짜요! 아 죄수들 중에서도 우리들 같은 사람들 있지만. 대부분은 저짝이었다고. 군사혁명을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그 소식만 듣고는 “이제 赤化를 면했다”고 만세를 불렀다니까!! >
< 5.16 혁명이 나니까 또 다시 혁명재판을 한대..내가 혁명검찰에서 3분 조사받고..하하. 조사를 3분 받았다니까. 또 다시 기소, 재판, 언도 7년6개월.. 이렇게 된거지.
우리는 “한국은 赤化 안되고 이제는 살았다!” 이러카는데 아무 조사도 안하고, 나한테는 3분 조사하고...혁명정부라는게 또 도대체 뭐냐. 엉터리도 분수가 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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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ame 13-02-24 10:59
   
요약 3줄 좀 ^^
Hiryu 13-02-24 11:10
   
궁금해서 여쭙겠습니다. 5.18이 폭동이라면 과연 무엇을 위한 폭동인가요?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말
내란이라도 일으키려 했다는건지... 아님 광주 자체 독립이라도 시도했다는건지... 또 부마사태와
다른점은 무엇인지 정리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버프홀릭 13-02-24 11:35
   
월간 조선에서 웃지요 ^^
     
트러블이당 13-02-24 11:37
   
넹 웃으세요 ^^ 정신승리라도 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으니깐요
아햏햏햏 13-02-24 12:12
   
무장폭도들의 가장 위험하고 대담한 시도는 광주교도소에 대한 공격이었다. 당시 간첩 및 좌익수 170여 명을 포함한 2,700여 명의 복역수가 수용되어있던 광주교도소는 낮 12시 20분경 폭도들의 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가담한 폭도의 대부분은 과거 이 교도소에 복역했던 전과자, 당시 수용중인 복역수의 가족 및 이들을 탈옥시키려 했던 극렬시위자 등이다. 처음에는 폭도들 및 시위차량이 교도소 주변으로 몰려들더니 오후 3시경, 무장폭도들이 차량 3대에 탑승하고 교도소를 향해 진출하면서 함성을 지르며 기습을 시도하였다

(김영택 1996, 160) 5.18 시민군쪽에서 취재하던 취재기자
출처 : 실록5.18 광주민중항쟁 / 김영택 / 창작시대사 / 1996

교도소 습격은 김영택이 인용

원글 출처는 1985년 국방부가 발행한 '광주사태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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