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린 증거는 국방부에서 주장하는거죠
그리고 나서 해석은 추정과 증언에 의한것 밖에 없구요
댓글 달았는데 다시 씁니다
국방부의 주장은 허구입겁니까?
시민군이 무기고 44곳을 털어 무장한 상황에서 인근 교도소를 거점으로 삼았던 부대가 공격받았습니다.
시민군이라고 생각을 할까요? 아군간의 오인 사격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리고 증언
교전을 한 한사람의 증언은 완전히 무시하시는 군요 그 증언자가 멀리서 와~ 싸운다 라는 제 3자의 증언입니까?
5.18 광주항쟁동지회는 1988년 2월 발행한 '5월의 함성'이라는 회보에서 당시 교도소 습격사건은 '계엄사가 항쟁의거를 폭도소행으로 몰아붙이기 위한 조작극'이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것도 결국 국방부와 입장만 다른 주장일뿐이군요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느냐"고 증언했다.
<인용....무장시위대로 부터 도합 5차례의 공격을 받은 사실, 5.22 00:40경에는 무장한 시위대가 차량 6대에 분승하여 광주교도소로 접근하여 계엄군과 교전한 일이 있고
같은날 09:00경 다시 무장시위대가 2.5t 군용트럭에 엘엠지(LMG) 기관총을 탑재한 상태에서 광주교도소 정문방향으로 접근하면서 총격을 가하였고...인용끝>
정문을 목표로 2.5톤 군용트럭으로 돌진하면서 기관총을 난사하면 그것이 교도소 공격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정문은 교도소 남쪽과 동쪽이 만나는 모퉁이에 있고 담양행국도변에서 160m 왼쪽 교도소쪽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시위대들은 진압군의 바리케이트를 뚫고 담양국도에서 교도소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교도소 정문으로 110m를 돌진하다가 정문을 50m 남기고 3공수11대대의 공격으로 저지되었던 것입니다.
아래 특전사 전투상보에 기재된 것을 보면
23일 08:00 교도소 앞 총격 - 21/2 톤에 탑승한 폭도 6명이 교도소로 접근, 50미터 전방의 바리케이트에 봉착, 진출하지 못하자 11대대에서 즉각 응사
--> 교도소 앞이라 함은 담양행 국도상이 아니고 바로 교도소 정문 앞이었던 것입니다
자 요약
5.22 새벽에 한차례 교전이 있었고 아침 9시에 다시 정문으로 접근하며 총격을 가함
정문에서 인근 도로까지의 거리는 160M 일반적인 보병들간의 교전 거리 안이군요
제 의견은 도로변인것도 맞지만 동시에 교도소에서 200M 밖에 안떨어진의 교전 거리였다는 겁니다
교도소 주변의 교전은 주변도시와의 차단임무를 맡고있던 3공수여단이 광주상황을 알리기 위해 시외곽으로 빠져나가려는 시민군을 무차별 발포하면서 일어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일단 일반 시민이 희생당한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직접 교전한 3 공수여단 작전병의 증언입니다
약 50~60여 명의 시민군들이 이 광고탑을 주위로 하여 교도소를 향해 사격을 가해 왔으며 그것은 우리 대대 정면 방향이었다. 우리는 이 고지를「설탕고지」라고 이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1시간에 걸친 부대의 진격 끝에 이 고지는 우리가 점령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교도소 옥탑 양쪽에 설치된 M-60 기관총에의 지원 사격 때문이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이번에는 군용트럭 1대가 교도소 정문을 향하여 맹렬하게 질주하며 달려들었다. 교도소 옥탑에 설치된 M-60 기관총에서 실탄을 차량에 퍼부었다.
4명이 뛰어내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중 1명은 저격병에 의해 죽었고 나머지 3명은 포복으로 끝내 인가 쪽으로 기어서 도망가 버렸다.(이 무렵 트럭을 타고 지나던 민간인이 총격을 받아 한 명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곧이어 그 트럭을 견인해 왔는데 거기엔 놀랍게도 다이너마이트 2상자와 수류탄 4~5개가 실려 있었다. 만약 이것이 폭발했다면 교도소 정문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자 광주 상황을 알리러 나간다면 걍 조용히 나가지 왜????? 총격을 가하죠? 네? 걍 일반 시민인것처럼 조용히 나가면 되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