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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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확산 그리고 부마사태
▲농성중이던 YH여공들의 구호와 신민당사에서 경찰에 끌려나가는 여공들.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김경숙이 숨졌다.
YH무역이 공장문을 닫아 기숙사에서 잠자던 여공들이 쫓겨 나와 간 곳이 신민당사였습니다. 노동자들이 정치를 통해 유신독재의 경제정책 결과인 배고픔을 탈출하고자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노동자가 야당과 연대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민당사를 공격했고, 경찰진압과정에서 숨진 YH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을 절대 언론에 보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김영상의 제명 이후 불거진 부마항쟁은 유신이라는 정치적 독재 상황도 중요했지만, 당시 대다수 국민의 삶이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는 점도 원인으로 봐야 합니다.
▲ 부마항쟁 당시 비상계엄이 실시되면서 탱크가 도심에 진주하자 시민들이 놀란 표정으로 탱크를 바라보고 있다.
김재규의 증언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국민, 특히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고, 급기야 부산, 마산사태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 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대의 경찰차와 수십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당시 본인이 갖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되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일촉즉 발의 한계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김재규의 증언)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학생데모가 아닌 민란으로 규정했을 정도입니다.
만약 10.26으로 박정희가 죽지 않았더라면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물가고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발생한 부마항쟁의 끝은, 사태가 잠잠해진 이후 다시 전국적으로 항쟁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고,
이는 4.19처럼 박정희가 하야하는 사태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부마항쟁은 훗날 광주민주화 항쟁의 시작점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일반인이 잘 모르는 박정희의 일화가 있습니다.
김재규가 부마사태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할 것이라고 하자,
박정희는 화를 내며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자유당에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는가”라고 말했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백만명 죽인다고 까딱있겠습니까”라고 큰소리쳤습니다.
▲굶주리고 억압받는 국민이 자유와 빵을 달라고 외치는데
총을 쏘겠다는 자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독재라고 해야 하는가?
1979년은 대한민국 국민이 일어설 수밖에 없던 시기였습니다.
재벌과의 정경유착으로 정치자금 모으기, 언론통제를 통한 우민화 정책과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유신체제를 위한 사법 살인으로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던 박정희 정권을 국민은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고,
비밀 안가에서 젊은 여자를 안고 술마시던 박정희는 부하의 총탄에 죽음으로 끝이 났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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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사망당시 궁정동 안가의 모습과 MBC드라마에 나온 장면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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