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공작
(Killing the Target project)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죽이기 위해 일본에서 김대중을 납치했다가 미국의 반발로
미수에 그친 사건>
1. 개요
1973년 8월 8일 일본의 그랜드 팰러스 호텔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당한 김대중은
고베 또는 오사카로 추정되는 곳까지 차로 압송됐다가 보트로 갈아 탄 뒤 바다에 대기 중이던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536톤 용금호에 인계됐다. 중정
요원들은 김대중 몸에 쇳덩이를 매달고 수장시키려 했으나 미국 CIA의 연락을 받은 일본 해상 보안청 소속 항공기가 용금호를 추적했고, 당시
CIA 서울 지부장이던 도널드 그레그가 직접 중앙정보부에 전화를 걸어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는 등의 사정에 의해 김대중은 수장 직전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다.
결국 중정은 부산으로 추정되는 항구에 김대중을 내려줬고, 김대중은 앰블런스에 태워져
수면제에 의해 잠이 들었다가 어느 2층 양옥에서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자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괴한들로부터 풀려났다.
2. 결과
한국정부는 자신들의 개입을 부정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수사 끝에 김대중을 납치한
차량이 한국 총영사관 소속 차량인 것이 밝혀졌고, 현장에서 당시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이던 김동운의 지문이 나왔다. 이 사건은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사건이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는 비난 여론이 폭발했고, 일본은 범인들의 신병인도를 박정희에게 강하게 요구했다. 결국 김종필이 사건 발생
86일만인 11월 2일 특사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해 "이번 김대중 사건이 발생한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로서 일본 수상각하와 일본 국민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한다. 한국 정부는 두번 다시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박정희의 치욕적인 친서를 전달하고 사죄함으로써
무마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가 일본 다나카 수상에게 3억엔을 뇌물로 바쳐 사건인멸공작을 벌였다고 미 국무성 한국부장 로널드 래너드가
1976년 3월 25일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 출석해 증언했다.
당시 중정부장이던 이후락은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을 살해할 의도는 전혀 없고
단순한 납치일 뿐이었다고 주장했으나 김대중이 납치당한 호텔에서 발견된 유류품들과 정황들을 보면 김대중을 살해하려는 목적이었음이 분명하다.
(원래는 김대중을 호텔방에서 살해, 사체를 토막내고 피를 욕실 배수구로 흘려 보낸 뒤, 토막난 사체를 배낭에 담아 바다 속에 버리려는
계획이었다.)
박정희는 1974년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을 만났을 때 자신은 이
사건에 대해 모르며 중정의 소행이라고 말했으나, 이후락은 1980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며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대중의 납치에는 재일교포 야쿠자 조직인 동성회가 동원되었다.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