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필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세히 쓰면 장문이 되기에 최대한 짧게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상당히 긴 글이 예상되니 양해바랍니다.
참고로 광주 민주화 운동과 '민주화'란 말의 참 의미를 이미 잘 아시는 분들께서는 읽지 않으실 것을 권유합니다.(아시는 분이 보시기엔 지루하실 듯 싶습니다.)
1. 5.18의 시작.
1979년 10월 박정희 전대통령의 서거 후 유신정권 잔당들은 최규하 부통령을 대통령으로 올리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으려는 쪽으로 민주화 운동 방향을 잡지만 계엄군은 노동권을 탄압합니다.
다만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대학가에서는 유신정권 시절 수시로 있었던 군과 경찰의 학내 투입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유신정권의 붕괴로 학생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 있었고, 아직 지배권력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980년 3월 서울대를 출발로, 4월 초순까지 전국의 주요 대학 학생회 진형이 갖춰지고 대부분 유신치하에서 투쟁을 하던 학생들이 맡았습니다.
이에 4월부터 학원민주화투쟁이 시작합니다. 학원내에 남아있던 유신정권의 찌꺼기를 걷어내는 작업이었죠.
주요 내용은
- 학도호국단의 폐지와 직선제 총학생회의 부활
- 학칙 가운데 비민주적인 조항의 개정
- 학생활동과 학내언론의 자율성 보장
- 정보원의 학원사찰과 학내출입 금지
- 학원의 족벌운영 반대 및 재단 부조리의 척결
- 어용교수 퇴진 및 지도교수제 폐지
- 학교시설의 개선
- 학원을 병영화하는 병영집체훈련 등 군사교육의 철폐
였습니다.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각설하고,
5월 12일부터 학생권에서는 비상계엄령 하에서 군부대 이동이 시작되며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고, 이에 총학생회 간부들은 농성중이던 대학생들을 귀가시키고 자신들도 피신합니다.
이에 학생들이 더이상 총학생회를 믿을 수 없다는 비판이 거세지게 되고 14일 새벽에 모인 총학생회 간부들은 어쩔수 없이 가두시위를 전개합니다.
약 7만의 학생들이 각자의 학교에서 학교를 봉쇄하고 있던 경찰 병력을 돌파 서울 시내로 진입하게 되고, 이를 본 다른 학생들이 '가자 광화문으로!'라는 구호아래 뭉쳐 뛰쳐나옵니다.
14일 시작된 시위가 14일 밤10시경 해산하였다가 15일 다시 모였는데 학생 시위대가 10만 정도였고, 이런 학생들을 지키려는 시민들이 학생 시위대를 둘러싸서 인간 장벽을 자처했는데 이 수가 30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서울역 광장에서 시위대가 시위를 하는 중 군부대 병력이 이동하고 있다는 시민 재보가 있었고, 철처하게 진압당하던 노동계 운동권에서 학생권 시위를 외면한 상황에서 야밤에 학생들만으로 이루어진 시위대와 군대가 충돌하면 학생들이 크게 다칠 것이라는 우려 속에서 퇴각할 것을 결정합니다.
이 사태로 계엄군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신민당과 공화당이 조만간 계엄 해제를 논의하기로 하면서 국회에서 의결될 경우 헌법에 따라 즉시 이행해야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거기에 15일 있었던 학생권의 '서울역 회군'은 학생들이 군대에 겁을 먹었다는 식으로 이해되어 군수뇌부의 사기를 올려버리는 역효과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17일 쿠테타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전두환 전대통령의 517 군사쿠테타입니다.
-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확대, 탱크로 무장한 군병력이 주요 도시로 진입
- 전국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림과 동시에 군부대를 대학내 투입, 장악.
- 주요 대학 학생회 간부에 대해 전원 검거령을 내림.
- 밤 10시를 전후로 정치인과 재야인사 자택 급습.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김동길, 인명진, 고은, 리영희 등을 소요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 김영상 등 야당의 주요 정치인 자택 감금.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등 여권 인물을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 5월 18일 모든 정치활동 금지시킴.
- 5월 20일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고 국회의사당을 무력 봉쇄.
517 군사쿠테타가 단행되고 검거 열풍이 휘몰아치자 대부분의 민주화 세력들은 힘을 잃게 됩니다.
단 한 곳, 광주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2. 광주민중항쟁(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의 주요 대학 학생회 간부 22명 중 12명이 검거되는 바람에 광주의 학생권 또한 머리 없는 처지에 처하게 됩니다.
다만, 광주 학생권은 '휴교령이 있을 시, 오전 10시 학교 정문 앞, 정오 도청 앞 집결'이라는 행동 방침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광주에 진입해 있던 부대는 7공수여단, 전투 특화 부대인 공수부대인데다 이들은 광주로 내려오면서 시위 집압 장비가 아닌 전투 장비를 잔뜩 짊어지고 온 상태였습니다.
18일 멋모르고 대학에 남아있거나 혹은 공부를 하려고 등교하던 전남대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에게 걸려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휴교령시 오전 10시 정문 앞'이라는 행동 지침에 따라 학생들이 전남대 정문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10시가 조금 지나고 약 2백명정도의 학생들이 모이자 지도부도 없는 상태에서 학생들은 외칩니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 내 모든 민주화 운동권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죽이고 있는 상태에서 이 2백여명이 유일한 시위대였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즉시 무력 진압을 시작했고, 학생들은 도망쳤으나 일부가 잡혀서 무참하게 짖이겨졌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시민들이 말리려고 나섰다가 그들 역시 공수부대원들에게 난타당하게 됩니다.
조선대와 광주교대 정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고,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는 잡히기만 하면 무차별 구타했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이 소식을 접한 학생들은 더욱 분노했습니다.
정오쯤 되자 약 8백여명의 학생들이 도청 일대에서 '휴교령을 철회하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하게 시위했습니다.
계엄군 입장에서는 전국이 군대 앞에 조용한데 유독 광주에서만 시위가 계속되자 잔인한 결정을 합니다.
'바로 희생양이자 본보기.'
7공수여단을 광주 시내 한폭판에 투입합니다.
공수여단원들은 젊은이라면 학생이고 아니고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첫번째 희생자가 생겨났고, 그는 말을 듣지 못하는 농아자로 무차별적인 폭행 속에서도 손발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려다 더욱 두들겨 맞고 결국 숨졌습니다.
다음날 19일 광주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18일 있었던 공수부대의 잔인함에 상가는 대부분 철시했고, 관공서와 기업들도 출근은 했지만 일에서 손을 놔버렸습니다. 초중고에서도 수업을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고등학생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경찰 경계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동고, 중앙여고 등에서 학생들이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하는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11공수여단이 광주로 증파됩니다.
18일에 비해 시위대도 늘어났지만 공수부대의 잔혹함도 도를 더해가 이제는 총검으로 찔러대기 시작합니다.
시위대는 일단 뒤로 밀렸지만 공수부대 주력이 식사하는 틈을 타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해 침묵하는 방송사들을 급습합니다.
20일의 시작은 새벽 6시경 사직공원 근처 전남 양조장 공터에서 노동자 김안부 씨가 전신을 구타당한채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시작합니다.
시위는 산발적이었지만 계속되었고, 광주시민들은 분노에 몸을 떨었습니다. 또한 공수부대원들의 잔혹행위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20일 오후가 되자 시위대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일방적인 잔혹행위를 막고자 각목, 쇠파이프, 돌, 식칼, 화염병 등으로 무장한 겁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시위대는 소수의 공수부대 정도는 포위 섬멸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늘어난 상태였기에, 공수부대는 더이상 시위대를 추격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시위대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21일 전두환 일파는 3개 공수여단과 20사단 총원 2만에 육박하는 대부대를 광주시민 때려잡으라고 광주로 증원합니다.
시위대는 차량 조달을 위해 아세아 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가고 공장 근로자들이 장갑차와 차량 56대를 내줍니다.
도청 앞에서 시위대는 공수부대와 대치하고 공수부대가 철수 의향을 보이지 않자 장갑차 한대를 공수부대 측으로 전진시킵니다. 공수부대도 장갑차를 선두에 배치해 두었었지만 시위대 측에서 난데없이 장갑차가 튀어 나오자 당황하여 선두 장갑차를 후퇴시킵니다. 이 와중에 캐터펄터에 깔려 공수부대원 1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직후 공수대원들은 엎드려 쏴 자세로 집단 발포를 시작합니다. 근처의 전일빌딩, 상무관, 도청, 수협 전남도지부 건물 옥상에서는 저격수들이 사격을 실시했습니다.
사격은 약 10분간 지속되었고, 광주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부상자들을 구하겠다고 다시 뛰어든 사람들도 저격 당해 쓰러졌습니다.
충격과 혼란, 공포 속에서 시위대의 장갑차가 금남로를 가로지릅니다.
운전자는 차량 밖으로 몸을 드러내놓고 '광주 만세'를 외쳤고 금새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으며, 주인 잃은 장갑차는 화순 방문으로 사라졌습니다.
시위대는 아세아 자동차 공장에서 받아온 시위 진압용 방수차량을 이용하여 다시 진입을 시도했지만, 다시 발포가 있었고 운전자들이 죽어 차량은 도로 한폭반에서 멈췄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그 위에 수류탄까지 던졌습니다.
이제 더이상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수 없다며 일부 청년들이 나주, 화순 등 광주 인근 지역으로 빠져 나가 광주의 상황을 전하는 한편, 대다수의 경찰 병력이 광주로 차출되었기에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는 경찰서 무기고를 깨뜨리고 무기를 확보합니다. 더욱이 화순에서는 화순 탄광 노동자들이 탄광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와 다량의 다이너마이트까지 제공합니다.
이로써 시위대도 무장을 하게 되고 무장 항쟁이 시작됩니다.
너무 길어졌고 이정도면 광주 민주화 운동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정도는 충분히 전해졌다고 사료되는 바, 여기서 줄이고자 합니다.
이 다음 이야기는 다음에 시간이 허락되면 그 때 다시 쓰겠습니다.
참고 자료는 '박세길 지음/다시쓰는 한국현대사'입니다. 상당부분 인용했습니다. 아마도 특정 분들께서는 참고 자료 보시고 옳다구나 하시며 반박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대충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충분히 예상되며 별로 반박해야할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기에 별도의 답변은 하지 않겠습니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각자의 이야기들 듣기 위해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추가 코맨트는 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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