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특전사령관였다.12월13일 새벽 그를 쏜 것은 직계 부하인 박종규 중령의 3공수 병력이었다. 그는 부하가 쏜 총에 왼팔 관통상을 당했다. 이후 두차례 수술을 받아야했고 강제전역 당했으며 1988년 국회청문회에선 그 비열한 배신의 순간을 증언하려 애썼다.그리고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 정원을 거니는 동안 이름 없는 야산에서 죽어갔다.그날 새벽 총알은 그의 왼팔을 관통했지만 배신의 비수는 여지없이 그의 심장을 관통했을 것이다.권총 한 자루로 사령관을 지키려다 죽은 군인도 있다.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육사 25기)이다. 김오랑 소령 역시 육사 1기 선배이자 관사 이웃인 박중령의 명령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나이 35세.그 부인 백영옥씨는 남편 죽음에 충격을 받아 이듬해인 80년 시신경 마비증세로 실명했다. 그도 결국 1991년 6월 경찰이 xx로 판정한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다.하지만 남편을 죽인 총성을 관사에서 듣던 그날 그 새벽, 이미 그녀의 인생도 끝장났음에 틀림없다.몇 년 전 동작동 국립묘지 내의 한 절을 방문했다가 장군묘역에서 정병주장군의 묘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다. 옛 생각에 가볍게 묵념하고 묘를 돌아봤다.앞면에 '육군소장 정병주의 묘'라 적혀있고 뒷면엔 '一九八九년 三월 四일 경기도 고양군 산중에서 별세'라고만 적혀있었다. (감회가 남달라 자료를 찾아봤다.)묘비기단의 까만 묘지석엔 단 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다.그가 느낀 유구무언의 참담함이 느껴졌다.
참고로 정병주 특전사령관께서는 1988년 청문회 증언후.. 1989년 xx로 삶을 마무리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