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계획은 “어떻게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가?”라는 제목으로 3편의 글을 쓰려 했지만
어제 MBC 100분 토론으로 인해 원래 쓰려했던 내용은 미루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쓰려고 한다.
먼저 어제 100분토론 중 변희재의 발언을 살펴보자.
64 : 39
그러면 518광주사태가 하나의 역사의 하나의 사건인데, 그 이슈에 대해서 전 국민이 100%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어야 합니까?
자 5.18 광주사태가 촉발된 이유는 일베가 사실 제기했다기보다는
김대령 박사라고 미국의 역사학자가 유네스코에 등록된 공식자료 70만 건을 다 분석을 해가지구,
책 4권짜리를 출판했습니다. 한 달 전에. 그전에 인터넷에서 계속 올렸고...
즉, 그냥 유언비어로 쓴 책이 아니에요.
유네스코에 등록된 공식자료 가지고,
정말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이야기를 찾아서 충분히 개연성 있는 문제제기를 한거고
그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재평가를 논의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5.18에 대해서 논의도 하지 마라, 이미 이제 민주화운동으로 정해졌으니까
너희들 다 입 다물어라.
이게 지금 민주주의 국가입니까? 이게
66:13
재평가해서 아닐 수도 있으니까..
무슨 권력으로 제가 재평가하겠다는데 못하게 하는 거예요?
.......................무슨 감정이 느껴지는가?
(이재교)
역사문제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그중에서 예민하고 이런 것들은 구성으로써 좀 조심해야 할 문제가 있고
자유롭게 떠들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역사문제라고 다 똑같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변희재)
책을 읽어보셨나요?
한번 책을 읽어보시고 말씀하세요.
73:01
(사회자)
역사 인식문제에 대해서 차별된 의식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기회를 드릴까요?
광주사태에 대해서 역사학자에요, 역사학자.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은 역사학자가 정말 7~8년동안 자료조사 다 해가지고
그래서 광주민주화항쟁이다 법적 규정 난 것은 90년대 아닙니까?
2000년도에 또 새로운 자료가 또 많이 나왔어요, 새로운 자료가.
예를 들면, 5.18이전에 이미 3,4월부터
광주지역 운동권 총사령관인 윤한봉씨가
무기고를 털려고 사전조사한 것도 다 밝혀졌습니다.
그럼 새로운 증거가 나왔는데
역사학자가 문제제기 하면 안된다?
도대체 어느 나라 민주주의에서 이런 게 있는지 모르겠어요.
변희재가 정말 책을 제대로 읽어 봤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재미학자 “김대령”이라는 사람이 쓴 비봉출판사에서 발간한
'역사로서의 5.18'에서 저 부분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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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이제 총, 다이너마이트 이런 무기들이 필요하지 않냐.
그러니까 예비군 무기고가 어디가 있고 이, 다이너마이트는 어디에 있구나, 이런 것들 좀 파악하고,
도청을 어떻게 점거하기 위해서 도청 주변의 도로를 어떻게 어디 쪽으로 몰려들고 포위를 해야 하고 등등
고런 작전도 세우고 좀 그래야겠는데. 그래서 이제 지도를 구한 거예요. 지도를 구해 가지고
이를테면 지원동, 지금은 소태동 쪽인데 거기 나가다 보면 거기 채석장이 있었어요.
다이너마이트 창고도 있고. 현장 답사도 하고. 양림동 파출소 뒤에 있는 무기고부터,
이런 것들을 확인하고 다니면서…. 그러다가 5월 1일 날… (윤한봉 2006, 윤한봉 구술녹취문3차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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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요약
<이렇듯 무장봉기로서의 광주사태는 준비된 사건이었다.
시민군 군사작전 지도가 광주사태가 시작되기 전에 준비되었으며, 광주사태 기간 동안
시민군 병력은 작전지도에 따라 배치되었다.
시민군은 무작정 우왕좌왕 하였던 것이 아니라, 치밀한 군사작전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무장봉기는 우발적으로 일어났는가? 사전에 철저히 계획되어 있었는가?
‘5· 18기념재단’설립자 윤한봉은 무장봉기 계획은 사전에 세워져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확증하는 증언을 그가 죽기 1년 전에 남겨 두었다.
5· 18 비밀문건들도, 1980년 봄 광주운동권 총사령관 격이었던 윤한봉도
예비군 무기고 접수계획이 사전에 세워져 있었으며, 무기고 위치도 사전에 답사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그럼에도 5· 18측이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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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변희재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2000년도 이후에 김대령이 새로 발굴된 자료가 아니다.
책에도 분명하게 “윤한봉, 2006 구술녹취문3차 1-4” 라고 적혀 있다.
5.18기념재단에서 녹취한 것이고, 일반에게 모두 공개된 자료이다.
더 정확히 공개된 녹취문의 개요를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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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 구술녹취문 (3차)
■ 개요
구술자 : 윤한봉
면담자 : 박현정
면담주제 :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
면담일자 : 2006년 2월 22일 오후 2시-5시 (3시간)
면담장소 : 두암동 자택
면담차수 : 3차
■ 상세목록
1.
1-1. 민중에 대한 개념
1-2. 정세분석
1-3. 복직. 복적결정과 토론
1-4. 광주항쟁에 대한 예감과 준비
1-5. 광주항쟁 발발과 피신
2.
2-1. 도피생활
2-2. 김대중
2-3. 귀국후 활동 - 518기념재단과 들불열사기념사업회
2-4. 정치활동, 정당에 대한 견해
3.
3-1. 요즘 근황
3-2. 518과 재단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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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녹취문은 윤한봉이 79년, 부마항쟁 직후 체포되어 박정희가 죽고 긴급조치 9호가 해제 후,
석방부터 1981년 미국 망령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윤한봉은 12.12 군사반란 이후 엄청난 좌절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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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구속되기 전에 부마항쟁이 있었다고 그랬잖애? 부마항쟁이 인제 나한테 엄청난 충격으로 왔고.
그래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하튼 나뿐이 아니었지. 다들 충격이었어. 그래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 현장을 방문하려고 마음 먹었다고 그때 내가 들어가서 고문당하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석방된 다음에 인제 시골에 가서 선산에 가서 성묘하고 집에서 며칠 있다가
며칠 있고 나니까, 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계속 탁탁탁하고 소리나게 두들김.) 1212 쿠데타가 일어난 거예요.
9일 날 석방됐으니까 한 3일 후였죠. 1212 신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거죠. 음...긴가민가들 모두들 했었는데
나는 그때 또 다시 시작이구나. 다 틀렸다. 그런 어떤 민주화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을 상당히 나는 인제 접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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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윤한봉은 정확한 정세분석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모든 정보가 차단되고 독점되는 상황에서, 단편적인 정보를 최대한 모아 어떤 식으로든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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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보면 이거 이렇게 이렇게 되니까 아마 이럴 것 같다. 그래가지고 인자 맞는가 틀린가 확인을
혼자서 보는 거에요.
한 번, 두 번, 속으로 그걸 계속 하다보니까 상당히 인제 맞아떨어져. 그 재미라는게 남에게 말을
안했지만 내 스스로 아~여지 없이 정확히 봤다.
다른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 먼저는 안해. 가만히 듣고만 있는 거야. 속으로. 슥,
나는 저렇게 생각 안하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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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재가
“3,4월부터 광주지역 운동권 총사령관인 윤한봉씨가 무기고를 털려고 사전 조사한 것도 다 밝혀졌습니다.”
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3월말 경, 윤한봉은 전두환이 군사반란을 확실히 성공시키기 위해, 어떤 움직임이 있을 것이고
그 목표가 광주일 것이라는 예견을 했다.
사실 윤한봉이 [민주청년협의회 전남책임자], [전남국민연합결성], [민중항쟁 8인회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79년 이란 팔레비 왕조의 망명으로 미군철수가 철회될 것을 비롯한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예견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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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 터진다. 광주항쟁을 예감을 한 거에요. 그게 3월 말 경이에요.
그래가지고 인제 확신이 딱 선 것이 아, 광주 터진다. 간단한 거예요.
이 전두환 일당 12 12 쿠데타를 통해서 1단계 성공을 시킨이들이 절대 물러날 수가 없다.
다음 단계로 간다.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군부가. 신군부가. 근데 이제 변화를 갈망하는 70년대 내내 민주화의 열망을 키워 온 각계각층 인제
그 절망의 분노가 있는 거죠.
절망하게 되면 분노하게 되고 폭발하게 되는데. 근데 그런 상황에서 광주가 가장 그 열망이 컸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어느 지역보다 컸기 때문에.
차별과 소외, 빈곤의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에. 여기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충돌하고, 무조건 진다. 어떻게든, 피바다가 될 것이다.
......................
대책이 없어, 대책이. 왜냐면, 내가 내린 답이 막을 수도 없고 이것을.
그렇다고 이 항쟁을 지도할 능력도 없고. 광주 사람들이.
운동권이라고 하는 게. 그러니까 조직되지 못한, 봉기의 항쟁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광주가 피바다에 잠긴다. 그렇게 된다.
이, 우려가 몇 번을,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정리해보고 정리해 봐도
정세전망이 그렇게 나오는 거라.
인제 터진다. 그래갖고 광주는 피바다에 잠긴다. 그 불안 속에서 인자 80년이 된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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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은 녹취문에서 김대령과 변희재의 거짓말과 완전히 다르게
3월 당시 어떠한 조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제대로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윤한봉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당시 운동권의 핵심세력들은 전두환의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한 학살을 할 것이라는 예견을 믿지 않았다.
단지 최루탄에 대비하는 준비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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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학교 학생들도 함께 연대투쟁을 하기로. (그런데) 그때 이야기들이 상당히 재밌어요.
농민들이 인제 분무기에다가 농약을 독~하게 타가꼬
구술자: 농약이요?
(*놀라우면서, 어이가 없어 모두 웃었음)
면담자: 이거 분무기로 그래가지고 최루탄에 맞선다고 해서. 아조 전남대 학생이랑 뭐 해갖고
대규모 시위 준비를 하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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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의 녹취문에 따르면,
윤한봉은 5.18항쟁 바로 직전에 광주에서 생길 희생자의 대략적인 숫자까지 산출해냈지만,
5월16일까지도 전두환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해 학살을 할 것이라는 자신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했다.
심지어 8인회의 정상용까지 윤한봉의 예측을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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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뭐 4월 10일인데 아무도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뭔 쓸데없는 소리 한다느니 회의 분위기 깬다느니 여
다른 나라 이야기 하고 앉았다느니 그런 식으로 우스워 보인거지.
..........................
그러다가 5월 5일 날 그때 내가 이야기했던 민주가족야유회라는 걸 인제 하게 된 거죠.
그래가지고 그때 식영정으로 갔어요. 광주호 위에 있는. 거기가서 한 오십명 갔어요. 가족들이 많으니까.
인제 그 자리에서 모두들 인자 진달래는 피지 그러니까 인자 기분들 좋아가지고
모처럼 그러고 있는데 내가 인자 또, 나는 인자 어두운거지. 이게 맨 피만 보이는데.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노래 부르고 있을 때가, 휘파람 불 때가 아니다. 광주 터진다.
그러고 인자 내가 거기서 피바다, 피바다라는 말을 썼거든요.
2천명 이야기를 했는데 광주가 피바다가 된다. 한 2천명 죽는다.
면담자: 아 숫자까지?
구술자: 숫자까지 그때 나도 모르게 이야기 나와버렸는데, 신들렸다고 그러는데 (*웃음)
면담자: 그러니까, 돗자리 까셔도 될 거 같은데요 (*웃음)
구술자: 틀림없이 터진단 말이야. 그러니깐 다들 또, 지금도 안 잊어버렸죠.
정상용이 그 친구도 그렇고. 아이고 형님, 야유회까지 나와 가지고 피 이야기를 하요. 아이고 형님 징하요,
왜 그러요? 안 받아줘, 안 따라줘요.
........................................
어쨌든 간에 그라고 앉았을 때 인제 그 자리에서 내가, 그때 막 민주화 성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요.
14 15 16일까지. 내가 그 이야기를 또 꺼냈어요. 지금 이라고 있을 때가 아니다. 광주 터진다.
대책 세우자. 또 이야기를 꺼냈는데 처음으로, 그 이야기 자세히 좀 해주쇼 이런 반응이 터져 나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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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은 5월 5일 야유회이후 혼자서 대비를 했다고 진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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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제 안 되겠어. 나라도 생각해야지. 그래가지고 그 당시에 인자,
요즘은 지도가 아주 세밀한 지도까지도 나오는데 당시에는 만 오천분지 일 지도를 가지려면 신분이
확실한 사람 외에는 그걸 못 사게 되어 있었어.
살 때. 단파 라디오 사는 것하고 비슷해가지고. 그 지도를 인제 박화강씨, 그때 광주매일인가 있었는데
지금 한겨례 지국장 하다가 그만 뒀는데.
그 화강이 형한테 부탁을 해가지고 내가 만오천분지일 광주 지역 지도를 구해가지고. 나는 간단했어 아주.
아주 간단한 논린데 상징적으로 어차피 깨진다. 깨지기는 깨지는데 피바다에 잠기는데,
부산마산처럼 막 왁 일어났다가 그냥 갑자기 꺼져버리는 식으로는 피해만 크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는 그걸 성공을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제 도청을 장악을 해야 한다. 최후까지
싸우다가 깨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부마항쟁처럼, 들불처럼 번졌다가 갑자기 꺼져부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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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가?(1)에서
5.18 왜곡담론중 서술 속에서 근거와 출처를 밝히고 있는 것들의 경우, 지난 30년 동안 신군부의 학살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정리된 자료들이 항쟁을 폄하하는 자료로 전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자료의 전체를 읽어보면, 분명한 5.18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밝히는 자료임이 분명함하지만,
이들 자료를 전용하여 자료의 생산처, 원천자료의 역사적 맥락등은 밝히지 않고, 자의적으로 배치,
추출 재가공하여 자료자체의 성격을 완전히 변질 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대령과 변희재같이 자료를 왜곡하는 사람
뭐꼬이떡밥, 애틀님처럼 왜곡된 자료를 확대하는 사람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김대령이라는
인물과 오랫동안 토론했다는
컴맹만세같은 허세와 거짓말로 재생산하는 사람.
어제의 100분토론은 어떻게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지를 눈앞에 확실하게 보여준
더러운 수작이었다.
윤한봉은
1981년 6월 3일 미국 시애틀에 밀항선을 타고 도착 후, 망명
1993년 8월 18일 영구귀국
2007년 6월 30일 폐기종으로 사망했다.
2006년 3차 구술녹취문은 윤한봉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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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자: 선생님 그 동안 몸도 안 좋으셨는데 세차례 인터뷰 하시느라고 너무 홀가분하시죠? (웃음)
구술자: 홀가분하지. 무안 내려오면 연락해.
면담자: 알겠습니다. 선생님 핸드폰 없으세요?
구술자: 있는데 번호는 안 갈쳐줘. 이번에 내가 응급실에 실려 가면서 겁이 나가지고 휴대폰을 준비했다고. 어디 가다가 문제가 생기면 얼른 119를 눌러야하니까. 이제까지 없이 살았다가 할 수 없이 이번에 했지.
면담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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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령과 변희재는
5.18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죽기 직전의 마지막 유언같은 녹취록을,
보수세력 진영의 정당성을 위해, 진보 진영을
파괴시키기 위해 철저히 왜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