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을 제거했음에도 만주에서의 유일당운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대륙에서 유일당촉성회가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유일당운동은 구조적인 문제가 가지고 있었다. 재정적으로 임정은 국민당에 빌붙고 조선빨갱이는 중공에 빌붙어야 하는데 국공합작이 꺠져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쌈질을 시작한것이다.
각각의 전주들이 사이 나쁘니 민족계열과 조선빨갱이도 사이가 멀어질수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래도 다행인게 중국처럼 서로 죽고 죽이진 않았다.
만주에서의 유일당 상황은 대륙보다는 나았다. 친일 만주군벌이 장작림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28년 폭사하자 아들인 장학량이 반일을 내세웠다.
장학량은 국민당에 가입하여 부총통이 되고 만주 관공서에는 청천백일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만주에서는 빨갱이나 민족계열이나 공동의 적인 일제가 있었기에 싸울 필요가 없었던것이다.
30년이 되자 유일당조직이 해체되고 홍진과 최용건은 각각 독립적으로 항일조직을 만들게 된다. 홍진은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예하에 이청천을 대장으로 하는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일제와 싸울 준비를 하게된다.
최용건은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따라 모든 조선빨갱이들을 중공당원으로 편입시키게 된다.
당시 북만주에는 조선인이 1/10도 돼지 않았다. 민중의 대부분이 중국인들인데 섞이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항일투쟁을 하기 어려웠다. 코민테른의 지시를 허용한 것은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던거다.
실제로 한국독립군의 경우 섞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여건이 나빠져 33년을 끝으로 상해로 철수를 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대만애들이 한국땅에서 중공과 싸운다고 대만독립군을 만들었다면 한국인들이 곱게 안보였을 것이다.
30년 최용건의 직함은 중공 북만특위 집행위원이었다. 아마 북만주 조선 빨갱이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던거 같다. 20년대 최용건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은 바늘찾기처럼 어려웠는데 30년대는 비교적 쉽다.
20년대에는 비밀당원이었는데 이제 양지로 나와 중공간부로 활동하게 되고 중공 빨갱이들이 정리해놨기 때문이다.
허형식
중공자료에 따르면 최용건은 30년 하얼빈 일본 영사관 습격 사건을 일으켜. 역사책에 나왔는지 모르지만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서도 보도된 큰 사건으로 최용건이 배후인물이라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하얼빈 영사관 습격 사건은 최용건의 성향이 드러나는 유쾌한 사건이었다.
최용건은 만주정부가 반일적 성향으로 전환된 것을 이용했다. 일본영사관 직원들이 나오지 않는 공휴일에 조선빨갱이들을 진입시켜 영사관의 모든 유리창을 깨부수곤 했다. 영사관에 진입하기전에 미리 하얼빈경찰에 신고해 놨기 때문에 일본경찰이 체포하기 전에 하얼빈경찰들과 함께 빠저나오게 돼었다.
약탈도 아니고 인명상해를 한 것도 아니고 유리창과 약간의 기물손상만 일으켰을 뿐이라는 이유로 일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만주정부는 일본으로 송환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동정적이었고 중국인보다 선수친것을 안타까워했다. 빨갱이들은 선양으로 이동하여 재판받게 되었다. 중국경찰은 약속대로 31년까지 모두 풀어주게 된다 . 영사관 습격사건은 만주에서 조선인을 다시보게 만든 성공한 작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중에 날리는 항일연군지도자로 활약하는 허형식이 습격사건을 이끈 행동대장이었다. 영사관 습격은 희생자가 나오지도 않았다. 자폭이나 암살 같은 의열단의 방식과는 틀렸다. 부하들이 다 죽었던 광주꼬뮌의 트라우마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최용건은 이후에도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않는 작전을 선호하게 되고 그렇게 했다.
마음이 여린 항일투사라고나 할까.
중국자료에 따르면 이 시기 최용건은 빨갱이 군사간부 육성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무려 120명의 간부들을 양산하여 만주 각지로 보내 항일조직을 구축했다고 한다.
후일 항일연군 지도부는 최용건이 기른 자식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무지와 같았던 만주에서 최용건이 씨를 뿌리고 가꾼 것을 중국빨갱이들도 부인하지 않았다. 최용건을 신중국 건설의 은인이라고 이유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