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서울대 신입생 박완서(소설가)는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흘 만에 서울을 내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만 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호언장담하던 때였다.
포 소리가 미아리 고개 너머에서 들리는데도 서울을 사수할 테니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이 27일 밤까지도 들렸다. 그러나 그 시간에 대통령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의 고관대작들은 서울을 탈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강다리가 성급하게 폭파되면서 서울 시민들 대부분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3개월 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서울을 수복하자 시민들을 버리고 떠난 이승만 정부는 사과는 커녕 엉뚱하게 서슬 푸른 '부역자 처벌'에 나섰다.
서울에 남았던 서울대 사학과 김성칠 교수는 일기에서 "악질들은 제 한 깐이 있으니까 미리 다 도망가버리고 '나는 악질로 굴지 않았으니 나쯤이야'하고 마음 놓고 있던 사람들만 잡혀가서 경을 쳤다"고 썼다. 이미 좌익 우두머리들은 대부분 인민군을 따라 서울을 빠져나갔는데도 전국적으로 55만 명에 달하는 국민들이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갔다.
박완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졸지에 일어난 난리라 시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다 피난시키고 나서 정부가 후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빈말대신 한마디의 참말을 남기고 떠날 수는 없었을까? 사태가 급박하여 정부만 후퇴하는 게 불가피하나 곧 전력을 가다듬어 반격해 올 테니 국민들은 정부를 믿고 앞으로 닥쳐올 고난을 인내하고 기다려 달라는 비장한 참말을 한마디만 남기고 떠났던들 국민들의 석달 동안의 고난은 훨씬 덜 절망스러울 수도 있으련만. 그렇게 국민을 기만하고 도망갔다 돌아온 주제에 국민에 대한 사죄와 위무 대신 승자의 오만과 무자비한 복수가 횡행한 게 9.28 수복 후의 상황이었다. 나는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분통이 터지고 생생하게 억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