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다 배운 고등학교 교과서라고 하지만
분량 408쪽이나 되고, 도대체 몇번을 수정하는 것인지... 마지막 수정본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쪽수는 알 수 없으나 400쪽 내외일 것이고 녹록지 않은 분량이라 다 읽는 것은 너무 지루했습니다.
저의 지식이 충분한 부분만 읽어 봤습니다.
그것만 해도 거짓말이 한 두군데가 아니였습니다.
직접 읽어보고 사실과 비교했으므로
밑에 읽어보지도 않고
교학사 한국사를 우파의 교과서니
뭐니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대도 안한 진영논리로
더이상 감싸지 말기를 바랍니다.
임오군란의 발생과 전개 (179쪽)
1882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되자 구식 군대는 차별 대우를 받았다. 이로 인해
구식 군인들은 개화 정책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구식 군대의 봉급이
연체되었고 지급된 봉급미마저 불량미였다. 이에 격분한 구식 군인들은 군란을 일으켰
고, 서울 하층민들도 이에 합세하였다(임오군란).
군민들은 조정의 대신들과 민씨 일파를 습격하고 살해하였다.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도 불태웠다. 급기야 군민들은 궁궐까지 침범하여 명성 황후를 해치
려 하였다. 이에 명성 황후는 궁궐을 빠져 나와 몸을 피하였고, 고종은 사태를 수습하고자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한편, 민씨 일파는 청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이에 청은 재빨리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구식 군인들을 제압하고 대원군을 납치하였다. 이후 임오군란은
진정되었으나, 청의 군대는 계속 조선에 주둔하였고, 이로 인해 청은 조선에서 영향력이
강화되어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일본으로부터 되찾아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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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민들이 궁궐까지 침범하게 하고 명성황후를 해치려 했던 것은
대원군이 사주한 일이였습니다.
임오군란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면 그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전기는 부패하고 불공정한 구식 군인들의 처우가 촉매가 되어 당시 개항의 부작용으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이 합세해서 불만이 일순간 터져나온 사건이었지만
후기는 이를 이용 다시 정계복귀를 노렸던 대원권이 수습하기는 커녕
오히려 사건을 더 크게 키워 일을 걷잡을 없게 만든 쿠데타 였습니다.
명성황후를 직접 지목해서 죽이려 했던 것은 군민의 의지가 아니라, 대원군의 술수였습니다.
또한 임오군란때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한 것은 명성황후도 아니고
민씨 일파도 아닙니다. 조선에서는 군사 파병을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명성황후는 임오유월 일기가 발견됨으로써 어떠한 경로로든 청에 군사를 요청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였음을 확실하게 증명했으며
당시의 조선왕조실록 뿐만 아니라 일성록에도 청의 군사가 도성근처까지 온 이유에 대한 처음에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는 기록이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청의 군사 파병은 장수성 리수창등 청나라 강경파가 주도해서 청이 독단으로 군사를 파병한 것이였습니다.
임오군란 바로 직전 고종은 청과 새로운 국제관계정립과 교역협상을 위해
김윤식과 어윤중을 청에 보냈습니다.
김윤식과 어윤중 역시 조선 정부로부터 파병요청을 원하는 어떠한 지시도 받지 않았습니다.
청 강경파는 러시아와 이리 분쟁을 통해 더이상 기존 사대관계로는 국제사회에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함을 뼈아프게 경험했고 고종이 보낸 김윤식과 어윤중은 조선이 속국이 아닌
대등한 관계로 새롭게 관계정립을 하기를 원했고 그에 걸맞는 무역협정을 요구하러 온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 어이없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명성황후도 아니고 민씨 일파라고 불리는 세력도 아닌
청의 독단으로 군사를 조선에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 학계는 이미 80년대에 연구를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임오유월일기까지 발견된 상황에서
여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쓰다보니 관련된 내용을 짧게 서술해도 상당히 길어졌네요
시간도 늦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