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던 북한군에 의해 납북됐던 김규식이 1950년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에서 서거했다. 갑신정변 3년 전인 1881년 동래에서 태어난 김규식은 만 70세 생일을 한 달 반여 정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919년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직후 외무총장과 학무총장을 역임했던 김규식은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노선의 문제로 분열되자 임시정부를 떠나 민족혁명당을 조직했지만, 1940년 민족주의 좌우파 간의 합작 때 다시 복귀해 해방 이후까지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활약했다.
김규식은 김구나 이승만·여운형처럼 정치인으로서 카리스마가 있었던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교육자적인 풍모를 갖고 있었다. 김규식은 미국의 르녹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의 명문인 후단대학과 베이징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해외로 유학을 하기 위해 상하이로 오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학원을 개설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중심적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분열된 정치지도자들의 통합을 위해 활동했다. 1930년대의 민족유일당 운동, 1940년 임시정부 합류는 모두 분열된 독립운동가들의 통합을 위한 것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운동과 1948년의 남북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고 좌우 정치지도자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사실 1940년대 임시정부의 확대개편을 제외하고 김규식의 정치세력 통합을 위한 노력이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좌우합작운동이나 남북협상뿐 아니라 임시정부까지도 모두 비현실적이었으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1945년 이후 냉전적 세계질서가 확산되고, 이로 인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로 나뉘었던 상황에서 좌와 우의 소통을 통한 제3의 길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긴 안목에서 보는 것이다. 의병운동이나 3·1 운동이 결코 성공한 운동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 의미를 폄하하거나 무시하지 못하는 것처럼 단기적인 관점에서 실패한 사건이라고 해서 그 의미를 축소할 수는 없다. 좌우합작운동이나 남북협상이 당시 세계질서, 또는 김규식이라는 개인의 정치적 능력, 또는 정치세력들의 뿌리깊은 갈등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소통을 위한 그의 노력은 현재까지도 소중한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다. 김규식이 미군정에 의해 수립된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직에 있을 때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북한도 그 소중함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그를 소위 ‘애국열사릉’에 안장했다. 사회적 소통이 절실한 오늘 그를 기억하면서 또 다른 김규식이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면 너무 욕심일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