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fnnews.com/news/200707151835142588?t=y
중고등학교 때 들은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중의 하나는 국기 하기식에 관한 것이었다. 담임선생의 말씀을 지금 기억해 내자면 대강 이렇다. 동네 어디선가 무슨 체육대회가 열렸고 심판 판정을 놓고 양팀이 엉겨 붙었다. 사람들이 달려 나와 아무리 뜯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 순간 국기 하기식이 시작돼 트림펫 소리가 나자 순식간에 싸움은 중단됐으며 이후 경기는 속개되고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지금의 중년들은 국기 하기식이란 말을 들으면 여러 가지 소회가 떠오를 것이다. 성장기에는 정각 오후 5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모두가 부동자세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했고 대학생이 돼 앞장섰던 80년대 반미집회에는 으레 불타는 미국의 국기가 등장하곤 했다. 게다가 ‘자랑스런 태극기’ 운운하는 문법적으로도 맞지 않은 문구를 외우느라고 곤욕을 치렀으며 스스로 생기지 않은 애국심을 억지로 만들어내느라 고생한 기억도 생생하다.
그뿐인가. 유신시대에는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경남 김해의 한 여고생이 교련시간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자 제적 처분되는 기상천외한 일도 있었다. 이 여학생은 제적처분을 취소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당시 대법원은 종교의 자유 역시 그들이 재학하는 학교의 원칙과 교내질서를 해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보장되는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학교 당국의 손을 들어주는 황당한 일까지 나타났다.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의 하나인 종교의 자유가 고등학교 학칙 밑에 존재한다는 그 시절 대법원 판결을 생각하면 낯이 화끈거린다. 판결을 내린 그분들은 지금 무얼하고 계실까 갑자기 궁금하다.
하기야 이런 시대에 국기를 다치게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불경한 행위이고 심지어 시위 도중 남의 나라 국기인 성조기를 불태우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일도 잦았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사실은 정작 미국 본토에서 미국 시민이 자기네 나라 국기를 불태우더라도 아무런 제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태평양 건너 한반도에서는 같은 행위가 황당하게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일군의 미국 대학생들이 학교 캠퍼스에 대형 성조기를 깔고 침을 뱉으며 방뇨하는 행위가 열병처럼 번지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에는 많은 미국의 대학생들이 그랬다. 하지만 그들은 별달리 제재를 받지 않았다. 국기에 대한 이 같은 행위는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의 하나며 국가적 단일성의 상징인 국기를 보존한다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없다는 게 미국 대법원의 법 해석이다. 즉 국기가 아무리 소중하다 하더라도 이를 불태우며 항의하는 인간의 기본권을 제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사안에 대해 너무나 다른 시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해석이 어려운 대목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 문안이 바뀐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국민에게 국가에 충성하겠다는 문장화된 맹세를 강요하는 것은 개개인이 가지는 양심을 침해하는 행위다. 정부가 만든 획일적인 맹세로 애국심을 고취시키자는 생각은 배타적인 국가주의를 부를 위험이 높고 지금의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애국심이나 충성은 진심으로 우러날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세계를 둘러봐도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강요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미국뿐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기본적으로 이민자의 나라, 일찍이 알렉시스 토크빌이 간파했듯이 불안정과 개인주의가 팽배한 나라다.
이민 국가로서 구심점을 찾기 위해서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 미국에서조차 우리처럼 강제적인 모습의 맹세는 찾기 힘들고 또 성조기에 대한 훼손을 처벌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국기에 대한 맹세에 관한 논란을 지켜보며 아직도 대한민국이 국가가 앞장서 획일적인 충성을 강요할 만큼 미련한 사회인지 되묻고 싶다. ‘남과 다를 수 있는 자유(freedom to differ)’도 인간의 기본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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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남을 욕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표현하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 자연 스럽다고 생각되는 군요.
그리고, 애국심은 강요하거나, 연습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고, 내면화 되서 자연 스럽게 밖으로 표출 되는 것이 중요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