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국보위 참여에 대해 “부가가치세를 폐지한다고 협조해달라고 요청이 와서, 이것만큼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에서 국보위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보위 경과위원장이 부가세 도입 실무책임자인 김재익이라는 점에서 앞뒤가 맞질 않는다. 또 ‘마지못해 갔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증언과 정황으로 보면 사실과 다르다.
원래 국보위 경과위원장은 서울대 조순 교수를 염두에 뒀다. 조 교수는 육사 교관시절 전두환·노태우 등 육사 11기를 가르친 인연이 있다. 전두환·노태우는 스승인 조순을 국보위 경과위원장으로 초빙했다. 그러나 조순은 국보위 참여를 거부했다. 신군부의 ‘삼고초려’에도 거부하다 보니 국장급인 김재익이 일약 위원장으로 발탁된 것이다.(<동아일보> 1993년 5월 2일)
이는 새누리당 김용갑 상임고문의 주장과도 상통한다. 김용갑은 “당시 국보위 참여를 사양한 사람이 특별히 없었다고 한다”면서 “경제부총리를 지낸 조순 당시 서울대 교수의 경우는 사양을 했다고 나중에 들었다”라고 주장했다. 김용갑은 또 “국보위는 부가가치세 폐지를 추진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연합뉴스> 2016년 1월 31일)
교수 출신의 전국구 의원은 원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보통인데 그는 지역구를 택했다. 이는 금배지의 매력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지역구에 현직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는 등 ‘전폭적’으로 지원했지만 신예 이해찬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그는 서강학파의 일원답게 친재벌 압축성장론자다. 그러나 그는 1987년 현재의 헌법 개정작업에 참여하면서 헌법 119조 2항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을 신설했다. 이는 서강학파 입장에서는 일종의 ‘이단’이다. 하지만 이는 당시 시대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던 측면이 있다. 당시 부동산 광풍이 불고, 집값 폭등에 xx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재벌의 과도한 부동산 투기가 문제가 됐다. 이에 위기감을 가진 정부는 자연히 재벌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그가 30대 재벌 부동산 4800만평을 매각하는 5·8조치를 단행한 것도 그런 배경이다.
햇볕이 있으면 음지도 있다. 그는 1991년 권력형 비리사건인 수서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1993년 5월 동화은행으로부터 2억1000만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뇌물)로 구속됐다. 당시 김종인은 “가문의 명예를 더렵혔다”고 자책한 것으로 알려졌다.(<한겨레신문> 1993년 7월 23일) 그는 1심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1994년 1월 28일 2심에서 ‘자수 감경’돼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으로 풀려났다. 이후 1995년 10월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다시 기소돼 징역 5년을 구형받았다.
이후 김종인은 사실상 정계를 떠났고,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는 당무를 거부하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고민이 많겠다’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고민이 많아? 내가 왜 고민을 해? 나는 고민 절대로 안 해. 고민을 안 하고 오히려 맘이 편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우선 선공후사 정신의 부재다. 비대위원장의 당무 거부가 가져올 파장, 특히 선거를 불과 20여일 남긴 시점에서 득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감안하지 않았다. 이는 공천 탈락에도 불구하고 선거지원에 나선 나이 어린 정청래 의원과 크게 대비된다.
그는 자신의 공천안이 당원들과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자 설득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는 교수시절부터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셌다. 이는 바닥인 유권자들로부터 선택받지 않고 위로부터 선택된 사람이 가지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 당무를 거부하는 ‘노여움’에서 전형적인 우리 ‘노인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노여움과 고집은 나이가 들수록 더 세진다.
얄궂은 운명이라면 운명인 것은 1963년 할아버지가 민정당(民政黨) 발기 취지문을 썼고, 자신은 17년 후 이름이 같은(한자만 다른) 민정당(民正黨) 정강정책을 처음 기초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민정당은 군부정권에 맞서는 야당인 반면, 손자가 참여한 민정당은 광주의 피를 통해 만들어지는 군부정권을 합리화하는 여당이라는 점이다. 신군부가 만드는 비밀 창당작업에 참여해 의욕적으로 정강정책을 기초하던 사람이 ‘마지못해 참여했다’고 한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가 창당된 민정당 전국구(비례대표) 금배지를 단 것도 이 덕분일 것이다.
그의 실제적 지주인 가인 김병로의 비문에는 “무릇, 시대의 탁류 앞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는 거기에 굴종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피하며 숨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그 탁류와 더불어 마주 싸우며 끝까지 지조를 급히지 않는 사람으로…”라며 가인이 마지막 세 번째 인물이라고 추모하고 있다.(김진배, <가인 김병로> 1983) 김종인은 과연 탁류의 정치에서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싸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