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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7-31 11:05
수,당이 고구려와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이유
 글쓴이 : 예맥사냥꾼
조회 : 6,974  



위 두 지도사진은 현재 중공측이 파악하고 있는 수당시기의 아시아 세력판도입니다.

6세기후반~7세기의 수당시기는 중공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시대로서
중공인들은 이때의 자신들의 역사에 대하여 지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 금, 원, 청 등과 같은 북방오랑캐?들의 중원지역 정복왕조에 대하여는
현재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민족통일과업이니 뭐니 하는 개소리로 자위하고 있지만

절대다수의 한족들은 이때의 역사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이들 몽골, 거란, 여진족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죠.

물론 북위, 수, 당은 엄밀히 따진다면 5호16국시대에 중원지역으로 진출했던 선비족 후예들이
세운 나라이긴 하였으나 이미 그당시엔 한족화되어버려 당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은
스스로를 도교의 창시자 노자의 후손이라 족보를 위조할 정도였으니
한족의 왕조라 하는게 분류하기가 편할따름이죠.

요근래 동북공정으로 인해 웃지못할 코미디가 되어버린 남송의 민족영웅 악비가
여진족 오랑캐 금나라의 중원통일과업을 방해한 분리주의자 심지어 중화의 반역자로까지
추락해버린 촌극은 다들 잘 알고 계실겁니다.

한편, 수와 당시기는 중국역대왕조들 중 가장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번영했던 시기로
7세기 무렵 동서양을 통틀어서 수나라만큼 막대한 경제력을 가진 나라도 없었고
수와 당만큼 강력한 대규모 군대를 보유한 나라도 없었습니다.

물론 돌궐이 있는데 사실 돌궐이 서,동돌궐로 분열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수문제가 돌궐의 가한에게 엎드리고 비단을 받쳤던것도 사실이고

동고조 이연과 이세민이도 돌궐의 군대를 얻어내거나 돌궐군의 침공을 무마시키기위해
엎드려 빌고 여자들과 비단을 바리바리 받쳤던것도 사실이죠.

다만, 수양제와 당태종의 돌궐분열책과 몽골초원에 불어닥친 엄청난 한파로 유목민들과
가축들이 떼죽음 당하는 통에 돌궐의 힘이 약해져서 잠시나마 돌궐이 중원세력에 고개를
숙인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수, 고당전쟁이 벌어진 시기도 바로 이때인 돌궐의 힘이
약해져서 수,당에 붙어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강력했던 수와 당이 국력을 총동원하여 현재의 중공측 지도상에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땅 쪼금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던 고구려를 그토록 무너뜨리고자
혈안이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한, 고구려가 중공이 파악하기로 그리 강대한 나라가 아니었다면
어째서 수와 당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문학적 수치의 물자와 군대를 요동으로
보내 개죽음시키고 결국 수와 같은 강대국을 스스로 무너지게 만든 것일까요?

결론은 위의 중공측 지도상으로는 당시 고구려의 진가를 알 수 없다는 얘깁니다.

사실, 고구려는 당시 수와 당뿐만 아니라 북방의 돌궐도 어쩌지 못하는
동북아의 군사강국이었습니다. 이건 다들 잘 아는 사실이죠.

6세기 중반 그전까지 몽골초원을 재패하고 있었던 몽골계통의 유연을 무너뜨린
투르크가 강성해지면서 그힘을 북중국에 뻗치기 시작하고
급기야 몽골초원과 만주를 가르는 경계선이라 할 수있는 대흥안령 산맥까지 넘어
고구려 세력권으로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북중국은 북위가 분열하여 왼쪽에 북주, 오른쪽에 북제로 갈라져있었는데
돌궐의 카한들은 이 두나라를 "해마다 경쟁적으로 비단 수십만필과 수많은 여자들을
조공으로 받치는 효순한 두 아이들"이라고까지 대놓고 깔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쪽의 고구려에 대하여는 551년 무렵 신성과 백암성을 침공했다가
고흘장군이 이끄는 1만 고구려기병에게 참패를 당하자 북중국과는 달리 고구려를
함부로 어쩌지 못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관련 기록이 중국측에도 나오는데 돌궐의 이계찰이 대규모 돌궐기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대패하고 물러났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돌궐과 고구려간의 전쟁기록이 동로마 역사가 시모카테스가 쓴 책에도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 유연의 잔여 세력이 중국(북제)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겨 동쪽의 Moukri(고구려)로 갔다. Moukri는 중국에 인접해 있다. Moukri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 매일의 신체 단련으로 그들의 투지는 매우 높았다”

이는 당시 동로마와 중국비단을 대규모로 교역하던 돌궐상인들의 입을 통해 동로마에까지 고구려에 대한
소문이 전해진 것인데 그당시 돌궐인들이 고구려를 얼마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로 파악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끔 합니다.

또한, 고구려는 6세기 후반 영양태왕 초반기까지 거란 및 서북쪽 말갈세력에 대한 영유권을 두고
돌궐과 세력다툼을 첨예하게 벌여오지만 결국 말갈은 물론이고 거란족 8부의 상당수를 자신의 휘하로
지키는데 성공합니다.

거란족은 위 지도상에서 요하 서쪽 및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을하던 집단이었고
말갈에 대하여는 아직도 학설이 분분하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나

수서에 나온 기록을 보면 말갈은 총 7부로 나뉘어 있는데 주로 한반도 북부 및 연해주남부 지린성 일대에
살던 백산말갈과 만주 중부지역의 송화강 유역에 살던 속말말갈, 그리고 흑룡강 일대 추운지방에 살던
흑수말갈이 가장 강성했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은 예맥족으로서 이들이 훗날 고구려 멸망후 발해건국의 중심세력이 된것은
주지의 사실이죠.

따라서 말갈을 미개한 이민족으로 단정짓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대조영과 걸사비우 등의 출신지였던 속말말갈은 옛 북부여지역으로 대조영의 아들 무왕은
왜국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회복했다"고 하는데
즉 속말말갈이나 백산말갈로 불린 사람들은 고구려와 혈통이 다른 이민족이 아니라
고구려에 의해 흡수된 부여계 세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 북부여 지역은 속말말갈고 옛 동부여 지역은 백산말갈로 불리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흑수말갈입니다. 흑수말갈은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고 그 아들 무왕이
영토를 크게 넓혀 연해주 북부까지 치고 올라가는데 이들 흑수말갈은 발해건국세력에 대하여
가장 저항이 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여진족이 바로 이들 흑수말갈이 중심이 되어 내려온 종족인 것입니다.
흑수말갈은 속말, 백산말갈과는 달리 고구려와 말과 풍속이 상당부분 달랐는데 이는 중국측의
읍루, 숙신관련 기록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흑수말갈의 위치는 위 중공측 지도상에 보이듯 지금의 흑룡강 일대입니다.

위 지도들에서 고구려의 영토를 아주 코딱지만하게 그려놨는데
이 지도가 축소왜곡된 것이란걸 알 수 있는 것이

당태종이 주필산에서 맞붙었던 고구려 15만 기병 중 몇만 정도가
북부욕살 남부욕살 고연수 고혜진이 각각 이끌고온 말갈기병들이었습니다.

그 말갈기병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북부욕살이 데리고온 흑수말갈병들이었다고
당나라측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위 중공측 지도상에서 보이는 흑수말갈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고구려가 전쟁에 이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고구려는 직할지였던 한반도 중북부와 남만주 일대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시라무렌강 일대 (당나라 기록에 고당전쟁 당시 고구려가 내몽골 적봉진에
수백의 수비병을 상시 배치하고 3만의 고구려기병이 이곳에 쳐들어온 당군과 싸웠다
고 합니다)의 거란족 등과 북쪽으로는 실위, 흑수말갈 등까지 지배하고 있던
북방의 강자였다는 얘기죠.

13세기 당시 몽골의 쿠빌라이칸이 수십년간 지속됬던 고려의 대몽항쟁끝에
고려의 태자가 스스로 자신을 찾아오자 "지난날 당태종의 백만대군도 궤멸시켰던 고려의
태자가 나에게로 오는구나. 이는 장차 하늘이 나를 돕는다는 징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하며
더럽게 좋아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옵니다.

그럼 쿠빌라이칸은 중국의 사서를 통해 고당전쟁의 일을 알고 있었던걸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오래전 완장촌이가 진행했던 역사스페셜에서 몽골인 노인이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싸웠던 영웅적
전투장면에 대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방송으로 보여준적이 있는데

이 노래는 조상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당전쟁당시 훗날 몽고부족의 조상이 되는 실위 등의 부족등도
고구려 욕살 등의 지휘하에 고당전쟁에 참전했고 이곳에서 고구려군의 용맹한 전투력을 지켜보았던
그들이 노래로 이것을 자손대대로 불러왔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13세기 급성장한 몽골의 선조인 실위까지 장악했다는 주장은 너무 과대망상적인 억측아니냐고
할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허나, 이미 5세기인 479년 장수태왕때에 고구려는  유연과 협정을 맺고
실제로 대흥안령산맥 주변에 위치한 지두우와 그 남쪽의 거란족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한바 있습니다.

이 군사행동이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중국, 우리측 사서에 분명히 나와있지는 않으나
중국측 사서에는 이때의 고구려군의 침공으로 지두우 부근에 있던 거란족들이 난리가 나서
이 중 일부가 1만의 부족민들을 수레에 실고 북위 내지로 귀부해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의 군사행동이 그저 모의 내지 행동에만 그친게 아니라
적어도 대흥안령 산맥 以東 지역에 대해서 만큼은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얘깁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군사행동은 당시 몽골초원의 패자였던 유연이 대흥안령 동쪽 지역에 대하여
고구려의 목소리를 묵인 및 인정하고 있었다는걸 방증하는게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당시 대흥안령 동쪽지역에 거주하던 실위 물길 등과 같은 여러 수렵, 유목민족들은
고구려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이죠.

서영교 교수님은 유목민족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 고구려는 땅이 척박하여 농사도 유목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결국 약탈에 의존하지 않을수
없었고 이러한 약탈은 농경민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수렵민들에 대한 제압, 그리고
용맹한 유목민들로부터 그들의 풍부한 말 소 양 등의 가축까지 빼앗아 왔다.
고구려인들에게 있어 유목민들은 약탈의 대상일 뿐이었다. 고구려인들은 방목할 좋은 초지가 모자라니
가축을 기르기보다 중국인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유목민들을 약탈하고 정복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중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유목민들이 뛰는놈들이라면 고구려인들은 이들을 우습게보는
나는놈이었다는 소립니다.

실제로 이미 고구려 초기에 선비족을 전쟁에서 무찌르고 부용세력화하여 한나라의 북부지역을
유린한 바 있는 고구려였습니다.

아무튼,
중원의 왕조가 중원지역의 여러 세력의 중심이자 하늘로써 군림했던 것처럼
고구려가 멸망하기전까지 거란족 실위 흑수말갈 등에게 있어서 중심이자 하늘은 고구려였던 것이죠.
고구려의 임금이었던 '가(aka)'가 스스로 태왕이라고 불렀던 것도 당연하다싶습니다.
( 고구려의 반역자 연남생이가 당나라에 스스로 찾아가 항복할때 거란의 추장들도 그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구려 멸망직전까지 거란족 8부중 적지않은 비율이 고구려에 붙어있었다는 얘깁니다.)

이렇듯 고구려는 대흥안령산맥과 시라무렌강 동쪽의 세계를 재패하는 강국이었고
돌궐도 몇차례 고구려와 맞붙은 이후에는 고구려세력권에 대하여 진출을 단념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와 당과 같은 막대한 경제력 군사력 인구빨 기술력을 가진 중원통일왕조도 80년에 걸친
고구려와의 맞대결에서 수백만의 인명손실만 남긴채 패배하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수,당이 일으킨 전무후무한 수백만 대군의 원정군 규모를 꾸릴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중원통일세력과 고구려가 최초로 맞붙었던 수문제 (고구려에서는 영양태왕) 시절의 제1차 30만 대군이
육지에서는 요하, 바다에서는 비사성을 넘어보기도 전에 고구려군에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당했기 때문입니다.

수문제가 출정시킨 30만 대군은 절대로 오합지졸이 아니었습니다.

수문제가 남쪽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토번 등과의 대치시에 활약했던 수나라 정예부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하를 건너기도 전에 강이식 등과 같은 장수가 이끄는 고구려군에 의해 무참하게 궤멸당하자
수는 춘추필법으로다가 무슨넘에 장마와 전염병, 해풍을 만나 수군 전멸 이런식으로 자신들의 역사에
왜곡된 사실을 기록한것일 뿐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수양제가 제2차 고구려원정을 준비하면서 신하들과 나눈 얘기들을 기록한 것 중에
한왕 양 등이 고구려군과 실전을 벌였다가 궤멸당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결국 1차 원정에서 30만이나 되는 정예군을 출정시켰음에도 요하 부근에서 막강한 고구려군에 궤멸당했던
사실때문에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결국 강력한 기병을 거느리 돌궐군을 대규모로 참전시키는
수밖에 없었는데 수양제 밑에 엎드리고 있던 동돌궐의 계민가한은 수양제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고구려 원정에 돌궐군 참전을 거부해버립니다. 이건 제생각이지만 고구려와 이웃한 동돌궐읜 계민은
고구려군의 위력을 잘알고 있었기에 거부한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무튼 동돌궐이 고구려원정 참여를 거부하자 수양제는 어쩔수없이 113만이라는 전투병과 별도의 200만
병참부대라는 전무후무한 원정군을 꾸릴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30만가지고 안됬으니 고구려같은 강력한 군사력과 난공불락의 요동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이정도의 대군은 불가피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태종이는 645년 일으킨 고구려원정에서 고작 10만 정도의 군대만을 동원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전투병만 대략 50~70만 이외 별도의 병참부대 30만까지 하여 최소 70만에서 100만을 동원했다는것이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뿐만아니라 당태종이 이끌고온 원정군에는 상당수가 서,동돌궐의 기병들로서 수나라의 원정군때보다
그 전투력이 더 앞서있다고 봐야합니다.





러시아 학자들이 추정하는 6,7,8세기 흑수말갈의 중심지역.


마지막으로 중공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다는 중공 드라마 '정관의 치'라는 작품에서
당태종의 고구려원정 관련 부분을 편집하여 유튜브에 올린 것을 여기서 소개해볼까 합니다.

위에 제가 올린 제반지식을 참조하여 이 영상을 보시면 중공인들이 얼마나 고수전쟁 고당전쟁의
대참패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이와 함께, 중공이 고구려를 자신들의 속국이었다는 식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과
백만 대군을 출정시켰음에도 고구려에 궤멸되어 죽음의 늪인 200리길이나 되는 요택에서
허둥대며 연개소문의 추격군으로부터 줄행랑시키 바빴던 당태종과 당군의 실상을
감추고 되도록 당나라의 수치를 감추고 싶어하는 저들의 속내를 염두에 두고 보세요 ㅋㅋ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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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바트 12-07-31 11:19
   
흠.. 제가 보기엔 보는 이로 하여금 '고구려는 당의 제후국이었다' 라는 늬앙스를 아예 바닥에 깔고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공물 운운하는 것도 그렇고, 고구려 내부의 일에 분노하며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며 참견하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튼 이런 드라마를 지속적으로 보다보면 알게 모르게 시청자들 무의식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 라는 의식이 저절로 생길 것 같아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렸네요.
     
예맥사냥꾼 12-07-31 11:33
   
맞습니다. 중공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중원의 신하국으로 치부하려 들죠.

 물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살아남기위해 당나라에 신하를 자처한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대대로 중원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은 개소리죠.

 영류태왕때 잠시 중원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고개를 숙인것은 사실이나

 전통적으로 중원에 강경한 입장이었던 고구려귀족세력의 반발로 인해
영류태왕은 시해당하고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굿잡스 12-07-31 12:45
   
예맥님 중원이라는 말은 안썼으면 하네요^^. 우리도 중원 고구려비등을 세웠듯
얼마든지 우리가 천하의 중심이요 중원이니.
굳히 지나쪽에 중원이니 어쩌니 말보다는 서토니 서토왕조로 말하는게 더 낫아보임.
용어 하나도 우리 스스로의 사고나 중심이 아닌 저들이 선택한 용어에 따라 동조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데스투도 12-07-31 11:49
   
지금도 일부 중국인들 보면 한국은 중국에서 떨어져 나온 나라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즉 우리나라도 자기들 영토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위,아래로 썩을 놈들의 땅 욕심은...
자기들의 제후국이여서 독자적인 연호와 태왕이라는 호칭이 있었나.. 조금만 생각해 봐도 뻔히 알 만한 일들인데.. 역시 공산국가의 세뇌와 의식수준은 답이 없네요 ;;;;;;
대략난감 12-07-31 11:51
   
남에나라 쳐들어오는 지들이 선이고 자기나라 지킨 영웅 연개소문이 개망나니라니..ㅋㅋ
중국인들 이런거 보고 자라면서 자위하는건가?..ㅋㅋ
굿잡스 12-07-31 12:43
   
덕분에 유익하고 재미있는 내용 잘봤습니다^^
굿잡스 12-07-31 12:50
   
고수 전쟁이나 고당 전쟁은 단순한 국가대 국가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 고구려 문명권(동방문명권) VS 서토 문명권 간의 문명 대전이라고 표현하는 걸 저도 선호합니다.

당연히 농경 기반의 화한족의 수리관이나 문명과 우리 고구려 문명권은 그 문명적, 기질적, 세계관도 달랐고

엄연히 우리 고구려 문명권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잎선 오랜 시원 문명인 발해(요하)문명의 장자인 고조선 문

명을 이어 받아 하늘의 자손이라는 자긍심과 독자적이고 오랜 전통을 가진 당당한 군사강대국이자 문명대국.
끄으랏차 12-07-31 13:34
   
걍 중국은 간단하게
지들 주장대로 지방정권이고 신하면.

자기 왕조가 무너질 위기때 고구려, 발해에 명령을 내려 병력을 동원한 사실을 입증하면 되잖어.

왜케 말로만 신하가 어쩌고 들먹여?

신하면 황제가 위기에 처하면 당연히 충성심으로 군사 일으켜 달려가서 황제 구하겠지.
하다못해 황제가 명령이라도 내리겠지.

삼국지 보니 유비한테는 첩지까지 내려서 지 구해달라고 하더만.
당시 유비따위와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강한 세력인 고구려한테는 왜 안보낸건데? ㅋㅋ

신하라매?
데스투도 12-07-31 13:39
   
중국애들은 북방 유목민족은 모두 중국인이라고 외칠 기세~ (...)
이러다가 보면 훈족도 중국인이 되고 헝가리도 그리고 몽고족이 지배했던 러시아와 현재의 몽고 역시 중국 영토가 되겠군요.
신강에 위치한 투르크 계도 중국인 고로 터키와 중앙 아시아 국가들도 중국땅
뭐 이런 병맛나는 외침을 실제로 부르짖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실제 한족의 국가는 중국 역사상 한, 송, 명 정도밖에 없는데 말이죠 수 많은 세월을 이민족의 노예로 지내온 것을 감춰야 할테니 동북공정을 할 수 밖에요...;;;;;;
산골대왕 12-07-31 13:47
   
중국의 지금 역사기준은 일본이 한국 점령했으니 일본또한 한국역사이고 일본이 대동아 전쟁 일으켜서 한때 거대한 영토를 보유했으니 그또한 한국영토라고 울부짖음과 다를바가 없네요.

글쓰신 예맥사냥꾼님 흥미로운 글 잘 보고 갑니다. 저도 역사를 좋아해서 이상하게 생각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였었거든요. 특히 고구려의 중국과의 대당..대수 전쟁이 미심쩍은부분이 많았었는데,,,,,
fuckengel 12-07-31 15:55
   
한족들이 북방족들에 대해 열등감이 좀 심하죠..물론 문화,문명면에서 먼저시작했지만.
곰방따라잡혀 여러번 정복을 당했으니깐요,,북방민족들은 인구가 작은대신 신체가 한족보다 4~6cm
컸기에 적은수로도 중원을 정복하구 벌벌떨게 만들었답니다..

옛날 칼싸움시절 아무리 무술운운해도 신체가 가장큰무기였죠...돌궐,고구려병사들이 신체적으로 압도
적이었기에 그들과 대치하면 한족병사들은 사기까 꺽였을 정도니깐요,,  그래서 당나라 이세민이가
북방출신으로 구성된 모병을 모집했구 이때 고구려도 고전을 합니다..

중국에서 막강한 전투력으로 소문한 장수중 절반 이상이 북방계 출신입니다.. 삼국지의 여포
도 고구려-몽골쪾의 북방계죠  그러나 그의 전투력이 워낙강력했기에  삼국지에서도 그걸
인정할수밖에 없었구,,  대신 그의 인격면에서 흠집을 내버리죠,,아무래도 비한족출신을 주인
공으로 할순없었으니깐요..  민족차별의 가장큰 희생자중 하나가 여포입니다.
     
맘마밈아 12-07-31 17:27
   
몽골이 세계정복한건 체격때문은 아니죠. 몽골말보면 아시겠지만 조랑말이고 서양말에 비해서 크기가 작아요. 그거 타고 전쟁한 몽골기마궁사도 큰편은 아니죠. 북방민족이 전투력이 강한건 사냥으로 식량을 충당하기에 일상이 전쟁과 유사한데 있습니다. 북방민족 남자는 전원이 훈련된 전투원이고 농경민족 남자는 그냥 농민일뿐이죠. 괭이와 활의 차이라고나 할까.
맘마밈아 12-07-31 17:29
   
중국이란게 그냥 가상의 제국이죠. 어떤 민족이든 그냥 중원을 차지하면 황제를 자칭했으니 민족과 연관된 개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국사는 민족사가 아닌것이죠. 그냥 명사 청사 송사가 별도로 있는거에 불과하고 연속성이 없죠. 다 통치민족이 달랐으니 특히 청사는 소수의 만주족이 대다수의 한족?을 노예화한 역사죠. 청사를 중국사라한다면 1940년까지 일본사가 한국사가 되는셈입니다.
fuckengel 12-07-31 18:22
   
몽골애들이 지금 못먹어 성장이 정지되서 그렇지 갸들도 DNA신장은 큽니다. 몽골이 자연재해가 심해
그렇게 잘먹는편이 아닙니다.  몽골은 고구려와같은 계통이에요..지금 북한과 몽골과의 DNA싱크로율이
가장높습니다. 북한은 일제시대 검사자료만봐도,  함경도지역이 167~8 에 이르던곳이죠(당시 조선은 163~5,
일본은 158~160)    몽골,만주가 당시에도 인구가 50만100만정도였는데 제아무리 전략전술 운운해도
기본전투력이 받쳐줬으니..  8천만1억넘는 중국을 먹을수있었던거죠..

우리민족도 한족들과의 전쟁에선 크게밀리지 않앗지만 같은 북방계인 선비,몽골,여진과의 전쟁에선 한족
보다 고전을 많이한거뚜 그런이윱니다.
     
데스투도 12-07-31 18:34
   
유목민족에 가깝던 한민족이 지나인들에게 고전한 건 생활방식이 농경민족을 닮아가면서 개인별 전투력이 예전만 못했던 이유도 있습니다. 농경민족대 농경민족의 싸움이 되어버린 뒤에는 숫자가 많은 쪽이 유리할 수 밖에요 ;;; 하지만 농경사회로 변모된 후에도 우리나라의 궁기병과 철기병은 상당히 강력한 전력이었습니다. 무려 조선 중기까지도 강력함을 자랑했으니까요.
그놈의 정치적인 이유와 돈 때문에 대대적으로 병력을 양성할 수 없었기때문에 문제였지만요.
          
예맥사냥꾼 12-07-31 21:16
   
그런데 장수태왕 이후 후기 고구려사회가 농경민족화되었다는 주장은 좀 신중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고구려 먹을거리산업의 핵심은 농산물이었습니다. 만주땅은 몽골고원 초원지대와 같은 유목지대가 아닙니다. 유목이란 목축을 하되, 광범위한 지역을 이동하며 하는 목축방식을 일컫는 것으로서, 부여 및 고구려는 말,소, 양 등을 키우긴 하였으나 유목이 아닌 정주형 목축생활이었습니다. 가령, 흉노, 유연, 투르크같은 초원지대의 유목민족들은 이동에 여의치 않은 돼지는 거의 키우지 않았으나 고구려는 돼지를 제사용 및 생활용으로 많이 길렀다고 합니다.  이는 훗날의 여진족도 마찬가지로 여진족도 유목민족이 아닌 정주형 민족이었죠.
다시말해, 부여 고구려 같은 만주지역의 예맥계 민족은 방목(목축)과 농업을 병행하는 정주민족이었죠. 이는 고조선사회와 같습니다.  다만, 고구려는 졸본, 국내성 지역처럼 지린성과 함경도 등지의 험한 산지에 있다보니 목축, 농업의 생산이 여의치 않아 초기부터 전쟁을 통한 약탈에 상당부분 의존해 왔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영토가 넓어서 지역별로 농업,목축, 수렵 등의 비중이 각각 달랐습니다.
 한반도 서부와 요동반도, 요동평야지역은 당연히 농업이 활발했고 속말수지대에서는 목축이
강원도 함경도 지린성 연해주 산악지역에선 수렵이 활발했겠지요.

고구려 후기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농경민족화됬다는 주장은 그래서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고구려의 수도와 경제 문화 인구 중심지가 농업지대에 있었던것은 사실이나 고구려가 큰영토를 가진 제국으로서 오래도록 존립,성장하기 위해서는 농업생산력이 뒷받침되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온달과 평강공주 관련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보다시피, 농업지대였던 평양에서도 대규모 마시장이 상설되어 있었고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말은 매우 보편화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쌍영총? 무용총? 개마총?인가에도 고구려 청년들이 기사를 연습하는 벽화가 나와있다시피 고구려 국당 (경당) 등에서 행해지던 활쏘기연습은 대부분 기사였습니다.

 그러니까 후기 고구려사회에서도 만주평원 등 뿐만 아니라 농업지대에서까지 말문화는 여전히 활발했습니다. 또한, 무조건 말타는 유목민족이 정주민족보다 전투력이 앞선다는 생각도 문제가 있는데, 본래 테무친이 속해있던 부족은 초원의 유목민족이 아니라 대흥안령 산맥 동쪽 인근의 수렵민족이었습니다. 나중에 주변 부족들을 흡수하면서 초원부족들의 기동성을 배워 나갔던 것이죠. 수렵민족은 대개 이동성이 아닌 정주형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용맹함, 특히 활쏘기는 오히려 유목민족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몽골초원지대는 가축을 노리는 맹수라고 해봤자 늑대가 대부분이지만 만주,연해주 한반도의 정주형 수렵민족들은 항시 곰 범 등의 맹수들에게 노출되어 있어 죽기 아니면 살기로 활을 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수렵적 성격이 본래 강하여 활쏘기와 용맹함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나라였던 것이죠.
               
예맥사냥꾼 12-07-31 21:21
   
그런데 12세기 중반 이후 한반도에 살던 우리민족의 전투력이 점점 약해져 갔던 이유는 그저 농경민족화 되버려서라기 보다는 군사제도 등 국가시책의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굿잡스 12-07-31 22:21
   
조목 조목 좋은 말씀^^
               
데스투도 12-07-31 22:28
   
그렇죠 고구려는 창건시기부터 농토가 부족했기때문에 수렵이 주요 식량 공급원중 하나였죠. 여기에 더불어 다른 이웃 국가들에게 보조금(을 빙자한 조공이나 약탈)을 조금 걷어(...)들이기도 했구요.
수렵이 발달하다보니 귀족들은 호랑이 사냥을 즐겼죠.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을 나누는 것은 정주행이나 이동형이냐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얼마만큼 말을 잘 다룰 수 있는가도 포함 된다고 할 수 있죠. 고대에는 생활 환경에 있어서 얼마만큼 말을 능숙하게 이용하는 가에서 따라서 전투력이 큰 차이를 보였으니까요.

물론 로마인들과 같은 보병집단이면서도 매우 강력한 특이한 경우도 있었지만 로마의 경우를 살펴보면 자신들이 상대한 적들의 훌륭한 점을 자신의 장점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외라고 할 수 있겠네요. 부족한 기마전력은 기마 민족들을 보조군으로 사용함으로 채웠기도 했고 말이죠.

고구려의 기세가 약해진건 농경사회로의 변화보다는 도교를 받아들이면서 무위자연 사상이 퍼진 것이 더 문제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농경 민족을 운운한 것은 발해가 멸망하면서 실질적인 완전한 농경사회로 전환 된 이후를 뜻하는 거 였습니다.

하지만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기병 전력이 전체 군에서의 비중이 줄어든 것만은 사실이죠. 여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관련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말갈족들을 복속시키지 않았다면 기병 전력이 부족할 수 도 있었던 후기 고구려니까요.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 말갈족들은 후기 로마시대의 사르마티아인들과 오버랩되는 군요. 어느정도 그들이 처한 상황이 비슷하다고 느껴져서일까요? ㅋ
백야 12-07-31 19:29
   
중원보단 서토라고 부르는게 옳다 생각합니다.
gagengi 12-07-31 20:14
   
수당시기는 중공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시대라뇨? 수나라와 당나라는 선비족이 중국을 식민지배하던 시대로 선비족은 몽골족의 일파일뿐 중국인이 아닙니다.  중국은 식민지시대를 가장 강대한 나라로 꼽습니까? 그럼 식민지배당했던 원나라도 중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합니까?
     
예맥사냥꾼 12-07-31 20:37
   
이러니 역사를 대충 알면 안된다는거임.

 내가 본문에도 수,당이 엄밀히 말하면 선비족 후예가 세운 나라라고 썼음. 허나 수,당을 중국왕조라고 하는 이유가 있음.

수, 당을 세운 수문제, 당고조의 선조가 5호16국시대에 북중국에 내려온 선비족인것은 사실.
탁발씨 우문씨 등등의 선비족 후손.

근데 문제는 북위, 북주시대를 거치면서 선비족 정복자의 후손들이 정신적으로나 혈통적으로도 상당히 한족화되버린지 오래였다는것.

당고조 이연은 스스로를 도교의 창시자 노자의 후예라고 족보조작질까지 해댔고 수,당의 핵심관료들 중에는 본래 한족출신들도 상당히 많았고 이들 수,당이 스스로 한나라 한족왕조를 계승했다고 떠들어댔는데.

이와 달리 원나라는 말그대로 정복왕조. 철저한 민족신분계급제를 실시하여 남송인을 가장 차별, 북중국의 한인들도 제3계급. 몽골인과의 혼혈뿐만 아니라 한족이 몽골어를 배워 몽골인 행세할까봐 이들이 몽골어 배우는것도 막았다함.

청나라 겉으로는 만한조화를 외쳤지만 실상은 만주땅을 봉금하여 한족의 출입을 금지,
변발강제. 한족남성과 만주족여자의 통혼 금지 내지 억제.
청나라도 실상은 만주족의 정복왕조였다는건 옳음.

허나 선비족들은 이미 5세기에 스스로 한족화하여 선비족말과 문화 정신을 상당부분 잃어버렸음. 탁발씨의 북위때 이미 스스로 한화되버린 마당에 그 후손들이 수,당을 세우면서 한족정통왕조라 자처했는데 뭐 어쩌라는건지 ㅎㅎ;;
중공을 까는건 좋은데 무턱대고 잘알지도 못하면서 까면 그것도 꼴불견임.

단, 댁이 그저 엄밀히 따져서 수,당마저 한족이 세웠다기보다는 한화된 선비족계통이 세웠고 수많은 이민족들을 받아들였던 시기라고 한다면 수긍해줄 것인데...
판타지 12-07-31 20:24
   
악비 관련 글은 예전에 어디서 본 적이 있네요. 재미있는 건 소설 '영웅문 1부'를 보면 악비는 중국(남송)의 엄청난 영웅이고 악비를 죽게 한 진회는 사악한 간신배로 묘사했던데 그 책은 어쩔겨. 다 수거해서 분서갱유 할텐가?
굿잡스 12-07-31 22:22
   
서영교 교수님은 유목민족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 고구려는 땅이 척박하여 농사도 유목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결국 약탈에 의존하지 않을수
없었고 이러한 약탈은 농경민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수렵민들에 대한 제압, 그리고
용맹한 유목민들로부터 그들의 풍부한 말 소 양 등의 가축까지 빼앗아 왔다.
고구려인들에게 있어 유목민들은 약탈의 대상일 뿐이었다. 고구려인들은 방목할 좋은 초지가 모자라니
가축을 기르기보다 중국인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유목민들을 약탈하고 정복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중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유목민들이 뛰는놈들이라면 고구려인들은 이들을 우습게보는
나는놈이었다는 소립니다.> ㅋㅋ

다시 봐도 이 부분이 걸작 ㅋㅋ
     
굿잡스 12-07-31 22:29
   
하긴 실제로 고구려가 동북방에서 폭주 기질이 다분한 이런 유목 세력을 오랜 시간 콘트롤 할때가 서토에서 그나마 좋았던 시절이죠.

왜냐?  우리 고구려는 이미 만주와 한반도의 오랜 문명적 토대를 만든 공간속에서 살고 있다

보니 딱히 서토 왕조의 문명에 대해 별 경외나 갈망이 없었던 상황. 도리어 초원길을 통한 유라시아에  관심을 두면서 놀고 있던게 고구려였으니.

이런 고구려를 나당 연합에 의해 어그지로 일시 무너뜨리는데 국력을 소비함으로서
토번의 성장이나 거란 요의 등장 이후 반요 사상이 결합한 발해인(고구려인)+신라 황제의 여진족 연합의 금나라나 이후 몽골 , 후금의 만주족등 고구려 당시의 부용세력으로 통제하던 대단히 공격 성향이 강한 세력들은 통제할 또 다른 세력이 없다보니

서토사는 철저히 정복 유린 당하는 시절을 맞이하게 되니

한족? 스스로 자승자박화된 역사의 아이러니.
서라벌 12-07-31 22:27
   
매우 흥미로운 글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