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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4-09 15:17
[공군] KT-1 비하인드 스토리
 글쓴이 : 넷우익증오
조회 : 1,603  

지난 2000년부터 우리 공군의 기본 훈련기로 사용하고 있는 KT-1은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해 우리 항공역사의 큰 이정표를 세웠으며,

항공기 수출시대를 활짝 열어놓은 선두주자 역할을 하고 있다. KT-1이 만들어지기까지 ‘과연 우리 손으로 항공기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앞섰지만, 도전과 희생정신을 통한 끈질긴 집념으로 마침내 독자개발을 일구어낸 것이다. 뜨거웠던 KT-1의 탄생과정을 살펴보자.

KT-1의 전신인 KTX-1 개발의 시작

KT-1은 국내 독자 기술로 개발한 최초의 항공기로서 지난 1988년 이후 국방과학연구소(ADD, 이하 국과연)와 우리회사가 약 1천억 원을 들여 10여 년간 개발한 기종으로, 엔진 출력 950마력의 터보프롭 엔진을 탑재했으며 최고 시속 648km/h, 항속거리 1,700km의 성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KT-1을 완성하기까지에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나간 역사가 숨쉬고 있다.

1980년대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호황을 맞아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내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 항공기 제작기술은 1953년 공군기술학교에서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기인 ‘부활호’ 이후 그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1972년 경비행기 새매호가 제작되어 시제기를 포함해 총 4대가 만들어졌지만 생산은 되지 않았다. 정부는 1980년대 들어 국내산업의 균형발전을 위해 항공산업의 해외 진출을 목표로 잡고 투자를 늘려나갈 방침을 세웠다. 당시 우리는 외국산 항공기의 국내 면허 생산을 통해 항공기 제작 기술을 축적하고 있어 항공산업을 육성할 대안으로 비교적 기술 난이도가 낮은 저속 초중등 훈련기를 개발대상으로 확정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술로 항공기를 만드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1983년, 우선 국과연 내의 연구원 4명으로 구성된 공군사업담당부서를 설치해 국산 훈련기 개발타당성 연구를 위한 ‘개념설계(Conceptual Design)’에 착수했다. 바로 KT-1의 전신인 KTX-1 탄생의 시작이다. 이듬해인 1984년 최대속도 360km/h, 엔진 출력 420마력의 형상을 설계했으나, 1985년 형상의 날개와 동체를 변경하고 최대속도 450km/h, 엔진출력 550마력으로 목표를 상향했다. 연구진은 당시 공군이 운용하던 항공기들의 수명이 1990년대 후반부터 도태될 것으로 파악하고 1986년 선행연구에 돌입했으며, 1987년 국방부는 개발을 승인

하기에 이른다.

1988년 탐색개발 시작해 4년 만에 초도비행 성공


1988년 2월, 시제기 2대 생산을 목표로 4년간 KTX-1의 탐색개발이 드디어 시작됐다. 이후 1998년까지 10년간 국과연 개발진 100여명을 비롯해 당시 주계약업체 대우중공업과 협력업체 구성원 150여 명, 공군 조종사 20여 명이 KTX-1 개발사업에 참여했고, 양산 시기에는 우리회사를 포함해 8천여 명의 인력이 KT-1의 생산을 이끌어갔다.


탐색개발이 시작되자 미국과 영국, 스위스, 핀란드 등의 해외 항공업체들이 공동개발을 제안했으나 독자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모두 거절했다. 단, 기술자문을 위해 PC-9을 개발한 스위스 필라투스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필라투스사는 공동개발을 요구하며 자신들이 개발한 날개형상을 사용하라는 조건을 내세워 협력관계는 결국 깨지고, 오로지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집중하게 된다.


당초 시제기는 6개월 간의 총조립과 지상시험을 계획했지만, 4개월로 축소한다는 방침에 따라 시제기의 초도비행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91년 9월 미 공군요원 10명이 방한해 KTX-1 시제 1호기의 설계를 검토하고 11월 초도비행 준비를 마쳤으며, 제3훈련비행단으로 옮겨진 1호기는 마침내 12월 12일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시제 1호기는 당시 명칭 공모를 통해 ‘여명(黎明)’으로 결정됐다.


1호기의 탐색개발 종료 후 2호기가 최대속도 450km/h 이상, 엔진출력 750마력으로 상향 제작되어 1993년 2월 5일 초도비행에 성공했다. KTX-1은 개발과정을 거치면서 성능이 점차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1992년 시작된 선행개발에서 국방부는 KTX-1의 엔진을 1,000마력 급으로 높이도록 결정했고 950마력의 엔진이 장착된 시제 3, 4호기 제작을 착수했다. 3호기는 1995년 7월 초도비행을 실시했으나 비행안정성 문제가 제기됐다.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팀인 스컹크 웍스팀이 구성되어 항공기 날개를 4도에서 6도로 수정하는 100일간의 고난이도 작전을 개시했다. 한 편,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KTX-1에 ‘웅비(雄飛)’라는 공식 명칭을 명명했다.



양산 1호기 2000년 첫 출하, 공군 실전배치


1997년 11월 KTX-1의 실용개발에 착수해 다음 해에 시제 5호기의 초도비행을 성공시켰다. 1998년 운용시험 및 평가를 마치고 합참으로부터 ‘전투용 사용가’ 판정을 받음으로써 KTX-1은 우리 공군 최초로 국산항공기에 무기를 채택할 수 있게 됐으며, 12월 국방규격을 승인받아 ‘KT-1’이라는 현재의 명칭을 얻게 됐다. 마침내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 모델 항공기인 KT-1의 개발이 완료되는 순간이었다. 1998년 KT-1을 시승해본 영국의 항공전문지 ‘플라이트 인터내셔널’ 측은 성능과 안전성에서 우수한 기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KT-1은 1999년 양산 1호기를 생산 개시해 2000년 8월 공군에 첫 납품되어 실전 배치되기에 이른다. 군용기로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개발되어 양산에까지 이른 KT-1은 군 운용을 위한 필수요소인 종합 군수지원체계를 직접 개발했으며 동급 훈련기 중 유일하게 컴퓨터로 설계된 현대화된 훈련기다.


2000년 11월 3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국내외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KT-1 기본훈련기 1호기 출하기념식이 우리회사 사천1공장에서 개최됐고, 2002년 우리나라 최초로 싱가포로 에어쇼에 출품되어 해외 관계자들로부터 놀라움과 찬사를 받기도 했다. 2004년 KT-1 85호기가 비행시험에 성공하고 공군에 최종 인도됨으로써 사업이 완료됐다.


  

파생형에서 수출기까지 항공산업 도약의 신호탄


한편, 1999년 4월부터 KT-1 기본훈련기 후속사업으로 KO-1 저속통제기 개발을 착수, 2003년 7월 국방부로부터 전투용 사용가 판정을 받았고, 2005년 7월 양산 1호기를 출고했다. KO-1은 2006년 12월 20기를 출고함으로써 사업이 종료됐으며 2007년 10월 1일 KA-1으로 명칭을 변경해 KT-1의 파생형 항공기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KA-1은 공군에서 전술통제기로 도입된 지 30년이 넘은 O-2 항공기를 교체하기 위해 개발한 항공기로, 전장에서 전술 통제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KA-1 파생형 항공기와 더불어 수출형 항공기도 본격적으로 제작되어 우리 항공산업의 도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KT-1의 우수한 성능은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아 2001년 2월 국내 항공기 최초로 인도네시아 공군에 7대의 KT-1 수출계약을 체결하는 쾌거를 올렸다. KT-1B로 명명된 수출기는 인도네시아 공군의 요구도에 부응하는 기체로 제작되어 2003년 수출 완료했으며 2005년 2차분 5대, 2008년 3차분 5대, 2018년 4차분 3대 수출을 계약해 추가 납품했다. 또 2007년 8월에는 터키 공군과 40대의 수출계약을 맺고 2012년까지 터키 수출기 KT-1T의 납품을 완료했다. 이외에도 KT-1은 페루(KT-1P 20대, 2012년)와 세네갈(KT-1S 4대, 2016년)에도 수출이 성사되어 총 84대의 KT-1이 각국의 영공을 수호하고 있다. 1948년 미국으로부터 무상 원조 받은 10대의 L-4 연락기 정비사업에서 시작한 우리나라의 항공산업이 KT-1으로 인해 50년 만에 항공기 수출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Episode 1


우여곡절 많았던 KTX-1 시제 1호기의 첫 비행


1991년 각고의 노력 끝에 KTX-1 시제 1호기가 탄생했다. 그러나 아직 비행성능이 입증이 되지 않은 만큼 첫 비행은 외국의 전문 시험비행 조종사가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섭외가 진행됐다. 당시 국내 최초의 시험비행 조종사였던 이진호 소령은 KTX-1 개발을 통해 국과연과 동고동락해왔고, 당연히 우리 손으로 만든 비행기를 외국 조종사의 손에 맡기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믿어준 연구원들의 마음에 보답하는 길도 최선을 다해 조종간을 잡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이진호 소령이 시험비행의 주인이 됐다. 첫 시험비행을 할 비행장을 물색하는 하는 것도 모두 거절하는 탓에 난관에 봉착했다. 마지막에 선정된 곳이 바로 공군 조종사의 기본 훈련을 담당하는 사천 제3훈련비행단이었다. 대전 국과연과는 지리적으로 거리가 있었지만 훗날 KTX-1의 양산형인 KT-1을 운용하는 기지가 되는 운명적인 인연이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미군 사령부의 협조로 방문한 EIRT(Executive Independent Review Team)라 불리는 사전 점검단의 이해하기 힘든 지적사항과 국내 조종사의 체격 조건과 전혀 다른 미국 조종사에 의한 러더(RUDDER) 페달 파손사건에도 문제없이 대응해 훗날 그들로부터 ‘당신들이 한 일은 기적’이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1991년 12월 12일, KTX-1은 30여분 간의 역사적인 첫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Episode 2


기적과도 같았던 인도네시아 수출 성공 스토리


2001년 KT-1을 인도네시아(이하 인니)에 납품하는 계약을 체결한 뒤 20일 만에 주한 미국대사관은 우리회사로 한 통의 전문을 보냈다. “인니에 군사 물자나 교육 프로그램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매 건마다 미국 당국과 협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인니 티모르 섬에서 일어난 분리독립 투쟁 때문에 미국이 인니를 수출금지국가로 분류했고, 이에 따라 미국 부품 납품업체들도 공급이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해 왔다. 우리회사 관계자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해결방법은 우리회사가 미국 정부로부터 수출승인(EL)을 받아야만 가능했던 것. 납기 때문에 다른 나라 부품으로도 대체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우리회사는 당장 EL 확보팀를 구성하고 우리정부의 협력 하에 곧장 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현지 부품 공급업체는 수출이 불가능하다는 입장만 내놓았고, 어떤 컨설턴트는 계약 파기를 주장하기도 했다. 미 국방성과 국무성, 미 의회 관계자들도 손사래를 쳤다. 관계자들은 다시 한 번 부품 국산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더욱이 9월 11일 끔찍한 세계무역센터 테러까지 발발해 동남아 이슬람 세력권인 인니에 KT-1 수출은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까지 닥쳤다. 그런데 뜻밖에 인니 메가와티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911 테러에 대한 반 테러 입장을 담은 애도의 메시지를 보내왔고 테러분자 색출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를 계기로 2개월 후 미 국무성은 KT-1B 부품에 대한 수출승인을 발표했고 이듬해 5월 EL을 마침내 확보하게 됐다.

https://blog.naver.com/koreaaerospace2030/221460276818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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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구화 19-04-09 20:26
   
내가 반한 기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