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일본의 전쟁양상, 자원, 기술력을 생각하면 그에 맞추어 나타난 적절한 무기였을 뿐, 일본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알려진 이미지와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세나 검, 무장 등에 관심이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이런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드물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관심도나 접근이 떨어지기에 대중매체 등에서 보여주는 그대로 쉽게 인식하니... ㅎㅎ
일본도는 사람을 배는데는 최적이죠,수십번 구부리고 열로 가열한 접쇠방식으로 강철검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임진왜란때 일본도에 많이 당했습니다 일본도는 갑옷을 입은 상대개에게는 위력이 되지 않지만
대부분 조선관군들은 포졸복이였다는데서 일본도에 발린거죠
임진왜란때 일본은 단병접전만
하지않았으며 대부분 장창부대를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야리라는 창끝에 칼을
단것도 사용했습니다 일본 장창대형이 조선관군을 휩쓸면 조선관군들 낙오병이나
전의를 상실한 관군들에게
일본도를 뽑아 달려들었다고합니다
사람은 10 센치 이상만 배도 과다출혈로 전투불능입니다 특히 일본의 고류검술을 배운 사람들은 조선관군과
전투시 손목과 목.허리 되퇴부만을 골라배었습니다
지금의 일본도의 이미지는 거의 판타지죠.
조선관군이 포졸복이었다니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십니까? 포졸복은 지금으로 치면 통상적인 군복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 전장에서는 제각각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다양한 갑주를 착용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통상 갑주만 하더라도 찰갑과 가죽갑옷이 흔하였고, 임진왜란 당시의 제승방략 체계가 문제가 많았다지만 적어도 조선의 행정력이 뒷받침되어 많은 물자를 준비할 수 있었는데. 갑옷이 없었다니?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그 멍청한 연출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하다못해 조선 수군이라면 그 사정상 갑옷을 덜 착용하였을 수는 있었겠지만, 육군이 갑옷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진실로 헛된 이야기입니다.
제승방략 체계에서 단순히 사람만 모은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해도가 매우 낮으신 겁니다. 즉 상식이 아니라 잘못된 속설을 그대로 믿고 계신 것입니다. 소집령이 내려가면 중앙에서 지휘관을 보냄과 동시에 각 군관에서 병장기와 비축된 식량역시 준비합니다.
징집자체는 둔전병제와 유사하지만, 자체적으로 그 외의 모든 것을 준비하는 둔전병제와 달리 제승방략 체계는 강력한 중앙행정의 권한으로 필요시에 인력과 물자 모두를 동원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례적인 비상시에 수만에 달하는 인원에 맞추어 모든 물자를 준비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포졸들이 마냥 포졸복과 다름없는 천옷상태로 나갔다는 건 정말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당장 조선 세종때부터 선조 이례로 병장기를 위해 운영하던 광산만 전국 40여개가 넘어갔었는데 말입니다.
본인이 무기나 갑옷을 지참할 수 있다면 그것을 지참하고, 사정이 여의치않으면 소집된 장소에서 가능한 보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급하였습니다. 조선시대 군영의 열악한 사정을 소개할 때에 무기가 녹슬었다, 갑옷이 없다는 것은 비축한 물량을 모두 사용해도 부족할 만큼 많은 장정들이 동원되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점점 말이 짧아지십니다? 일본에 대해선 그렇게 해박하다는 듯이 이야기하시면서 정작 조선에 대해서는 그 지식이 빈곤한 것은 본인 스스로 참 아이러니하다고 여기지 않으십니까? 게다가 조선에 대한 경멸과 폄하만 가득하여, 객관적인 시선도 없으며 그럴려는 의지나 노력조차 없이 까내리는게 추합니다.
분명 임진왜란 시기 제승방략 체계는 그 이론과 다르게 현실과의 괴리가 심하였고, 이에 대한 관리나 준비를 오랜 시간동안 제대로 갖추지 않은 탓에 정작 큰 사건을 마주하였을 때에 수많은 문제점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상의 제 기능 자체는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생각처럼 보급조차 안될 정도로 열악했다면, 어떻게 사람이 5만명이나 징발될 수 있었을까요? 그마저도 그간 제대로 관리가 안된 탓에 모인게 이 정도인데. 5만명이나 징발할 수 있는 행정력이 있었다면, 왜 물자는 그걸 따라서 못움직일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조선의 형편없는 가도에 때문에? 한심한 것도 좀 적당해야하는데. 고대 로마같이 멋들어진 가도만 없었을 뿐이지, 주요 도시를 잇는 비포장된 가도는 이미 조선시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하다못해 조선은 강을 따라 물자를 나르는 운송에 특화되어있었는데. 단순히 길좀 덜닦았다고 아무것도 못옮기는 그런 무기력한 나라로 보셨습니까? 천만에 말씀.
게다가 신립을 비롯한 중앙에서 장수를 보낼 때 소집 장소를 충북으로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만 아니라 위에서건 아래에서건 물자를 징발하고 소집되기 좋은 장소로 충북을 지정할 정도면 그 시대 사람들이 물자의 중요성을 몰랐다고 보여지십니까? 당장 신립이 어이없는 오판으로 패전을 하였다하지만, 물자 하나하나가 소중한 함경도/평안도 일대에서 여진과 싸우던 인물이 그정도도 챙기지 못했을 것이라 여기신 겁니까?
제승방략의 문제와 임진왜란 초기에 가장 큰 패착은, 조선군 자체의 훈련도가 전무하였다시피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비가 있어도 사람이 있어도 정작 전쟁에 대한 경험과 이에 대한 최저한의 훈련조차 없었다는 게 가장먼저 지적해야할 문제였지. 그 외에는 부수적이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조선의 보급문제가 심각하게 발전한 건 각 지역을 조율하고 통제해야할 한양이 함락되고, 조정이 피난간 이후부터 나타난 현상입니다. 더불어 주요 곡창지였던 전라도는 왜군에 의해 충청도를 비롯한 내륙의 중심지 육로가 단절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곡창지를 대상으로한 전장이 활발해지자 그 한계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선 아무리 가도가 잘 닦여있다한들 무슨 방법이 있었을까요? 어느 나라건 내륙 중심지가 적의 손에 넘어갔는데 보급이 잘 될거라 생각하십니까?
"왜구도는 사람을 배는데는 최적이죠,수십번 구부리고 열로 가열한 접쇠방식으로 강철검은 되지 않습니다" .... 어느 나라 어느 칼이 사람을 배는데 최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고 선동질을 할까?
탄소함유량이나 황,인에 대해 조금도 모르면서 강철을, 또 무기를 논하네...
덩차 정화조 덩 빨아댕기는 소리 그만하셨음. 왜구들이 쓴 왜도는 긴 칼날에 긴 자루가 달린
일종의 창인데 소설을 쓰네... 덩 푸는 소리는 왜국에서 왜구들에게....
서양애들도 일본넘들이 하도 이미지 메이킹하다보니 실제와 허구를 구분을 못하죠.
무슨 무사도니하는 허구적인 망상을 진실인양 포장하고 날조하는 등 정말 웃기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칼을 쉽게 만들수 있는 기술이 있었으면 칼을 그렇게 신성시 여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기껏 무기에 불과한데 의미를 부여할 필요없죠. 귀한 물건이니 신성시 여기고 권력의 상징이 된거지.
일본도가 소재의 한계로 인해서 천하의 명검 수준은 아니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동아시아에서 카타나처럼 긴 양손검이 별로 없어서 효과가 꽤 있었다 들었습니다. 일단 리치가 길면 대부분의 상황에서 유리하니까요. 그 시절 오랜 전쟁으로 동아시아 한정해서 가장 효율적으로 발전한 도검이긴했죠. 구조적으루요. 물론 동아시아 한정이고 유럽과 비교하면 이야기가 많이 달리지는건 맞는거 같아요.
산업혁명 시기 이전에 무기는 품질 좋은 철광석이 핵심이었습니다. 아무리 제련기술이 발달 했더라도 저품질 철광석으로 만든 무기들이 고품질로 균일하게 대량생산이 되지 않으면 그게 무기로서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일본의 철광석은 사철이 많아서 굉장히 저품질이라 합니다.
근데 일본도가 왜 유명해졌냐면 한국과 중국에서 주력인 일반 보병들이 쓰는 창보다 길이가 길었기 때문이죠.(전체 길이가 아니라 유효 타격범위) 게다가 임진왜란에는 한국과 중국 모두 주력군이 축소된 시기라 양에 밀린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