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중공군 규모는 30만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전쟁 끝날 무렵에는 중공군 145만, 북한군 45만 합쳐서 도합 180만까지 불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공군 전투서열을 보면..
제 13 병단 (=>한국의 야전군급 규모)
38군, 39군, 40군, 42군, 50군, 66군 (군=>한국군의 군단급에 해당)
(3개 사단으로 구성된 군단급 부대가 6개.. 즉 18개 보병사단) + 병단 직할 3개 포병사단
총 21개사단이었고..
13병단 소속 6개 군단이
서부전선의 미국 1군단(미 24사단, 미 1기병사단, 한국군 1사단)과
그 동쪽의 한국군 2군단(6,7,8사단)을 공격합니다.
(여기에 나중에 9군단 미2, 미25사단이 증원되니
동쪽에선 9병단의 3개군단 12개 사단이
미 10군단 소속 미 7사단과 미 해병 1사단을 공격하죠.
즉, 6개 사단을 21개 사단으로 공격했다는 소리죠.
(물론, 중공군 편제가 사단이 9500명 정원으로 미국식 편제에 비해 인원은 작은 편)
그러자, 당시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후방의 미 9군단(미 2사단, 미 25사단)을 급하게 북상시킵니다.
그런데, 유재흥이 군단장으로 있던 2군단이 중공군 공세 초반에는 6사단이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고,
나중에 청천강 전투(덕천-영원 방어선)에선 7,8 사단이 중공군 2개군단에게 와해되어..
미 2사단이 철수 도중 군우리에서 이미 침투해있던
중공군의 매복, 기습에 걸려 인디언 태형수준의 고난을 당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서쪽을 맡은 미 1군단쪽은 그나마 무난하게 방어를 해냈지만..
동쪽을 맡은 한국군 2군단(7,8사단0이 중공군 2개 군단급의 공세에 무너지고,
그 뒤로 그 서쪽의 미 9군단의 미 2사단도 포위되어 망신창이로 깨졌다..
그런 상황으로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유엔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후퇴를 하게 됩니다.
어쨋든, 여기서 알 수 있는건..
군대에서 흔히들 듣는 공격자 3배의 원칙이라는게 꽤나 먹혀든다는 사실이죠.
1개 사단을 1개군단들이 달려들어 물어뜯는게 먹혔고..
그 뒤로 차례 차례 1개 사단이 군답급 이상의 병력에게 물어뜯혀서 각개격파당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래서 중공군이 단순히 인해전술을 안펼쳤다고 볼수도 없고,
한국군이 무능하다고 비판하는 쭝꿔런도 있지만.. 솔직히 다굴에는 장사가 없는것이죠.
장진호에서 중국군 9병단에게 포위당했다가, 탈출한 미 해병1사단이 신통한거지요.
어쨌든, 이러한 중공군의 상대적인 병력우위를 활용한 선택과 집중,
(당시 상대적으로 지휘관의 자질, 장비와 훈련이 부족한 한국군을 먹잇감으로 노린 집중공세)
그리고 산악지형과 야음을 통한, 혹은 국군, 피난민 위장등을 통한 은밀한 기동..
그러나, 이러한 중공군의 공세도..
보급이 수월치 않아 자주 정체되는 국면으로 나타났고,
미군의 신임 미8군 사령관 벤 플리트는..이런 중공군의 약점을 간파하고,
"병사들의 목숨 대신 포탄을 쓰겠다"라며..
기존의 5배에 달하는 포탄보급을 통한 무지막지한 포병 세례를 퍼부으며
적의 대가릿수를 이용한 공세를 저지시켰고,
어느 정도 안정된 전선 상황을 활용해, 한국군 장교의 재교육, 유학을 실시하고,
한국군에게도 충분한 신병교육과 재교육을 실시해 한국군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노력을 하게 되죠.
그리고 , 전쟁 중후반에 새로운 한국군 사단들을 몇개 더 창설하여 전선을 보강했구요
즉, 여기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건..
역시나 전선이 뚫리지 않을 정도의 병력과 부대 숫자를 유지하는건 중요한 문제라는 것..
그리고 그 부대 병력들이 적을 저지할만한 훈련과 장비, 보급을 갖추는 것도 당연한 부분이고..
최악의 경우엔 일단 2선급 예비 부대라도 땜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징병제와 예비군 제도는 솔까 우리나라 상황에선 어쩔수 없이라도 필요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