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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8-23 00:15
[감동] 조선개국과 정도전
 글쓴이 : 애국자연대
조회 : 10,390  

조선 개국과 정도전 (1) 혁명을 꿈꾸는 자
조선 개국과 정도전 (1) 이미지 1
때는 고려 후기. 친원파 권문세족이 권력을 휘두르고 백성들의 삶은 날로 궁핍해지던 시대. 이 난세를 끝내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야심찬 혁명가가 있었다. 삼봉 정도전. 그는 공민왕 사후 실권을 잡은 이인임과 대치하며 북원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권문세족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이를 고깝게 여긴 권문세족은 정도전에게 북원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라는 명을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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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보는 주요 사건
1374 공민왕 23년
9월 공민왕자제위들에게 살해되자 사후 처리를 책임진 이인임우왕을 세우다.

1375 우왕 1년
8월 정도전북원 사신의 접대를 거부하고 도리어 북원 사신을 베겠다며 이인임 정권의 친원책에 반대했다가 유배되다.

1381년 우왕 7년
2월 이인임이 문하시중을, 최영수문하시중을 맡다

1383년 우왕 9년
이 해에 정도전이 함주 막사로 찾아가 이성계와 의기투합하다.
8월 이성계가 호발도를 물리치고 정도전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안변지책’을 올리다.
9월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다.
 
이인임과 그 측근들에게 빼앗긴 왕권을 찾고 싶어진 우왕. 이인임이 노환을 이유로 은퇴를 자청하자 왕은 이 기회를 틈타 권신들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왕의 계획에 따라 최영이성계는 당대의 실권자인 임견미, 염흥방, 도길부 일당을 잡아 목을 벤다. 최영은 늘그막에 권력의 정점에 섰고, 외곽만 맴돌던 이성계도 권력 핵심부로 진입했다. 고려는 그렇게 회생의 기회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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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보는 주요 사건
1387년 우왕 13년
8월 이인임이 노환으로 사임하다.

1388년 우왕 14년
1월 최영이성계가 손을 잡고 우왕의 명을 좇아 염흥방, 임견미 일당을 죽이다. 최영이 문하시중에, 이성계가 수문하시중에 임명되다. 이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다.
2월 왕과 최영이 명을 치기로 은밀히 의논하다.
3월 왕이 최영의 딸을 비로 삼고 최영의 집에서 잔치를 열다. 명나라가 강계에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다. 해주에 사냥을 간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징발하고, 요동정벌을 개시하다.
4월 봉주에 이르러 최영과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말하다. 이에 이성계는 4불가론을 제시하며 반대하다. 평양에 이르러 지휘부를 편성하여 최영이 8도 도통사, 조민수가 좌군도통사, 이성계가 우군 도통사가 되다.
5월 이성계와 조민수가 위화도에 머무르다가 전격적으로 회군하다.
6월 회군 세력이 최영을 유배 조치하고 조정을 장악하다. 조민수를 우시중에, 이성계를 좌시중에 임명하다. 우왕이 내시 80명을 무장시켜 이성계 등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하다.
우왕이 영비(최영의 딸) 등과 함께 강화도로 유폐되다. 조민수가 이색의 손을 잡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세우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회군 세력은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꼭두각시 공양왕을 왕위에 앉히고 평화적인 역성혁명을 도모하지만 의외로 녹록치 않은 왕과 정몽주의 반격에 부딪힌다. 정몽주는 이색, 이숭인, 우현보 등 이색 계열과 구세력들을 유배지에서 불러들여서는 삽시간에 조정의 요직을 장악한다. 이로 인해 조정은 이성계 세력과 정몽주 세력으로 뚜렷이 양분되었다. 고려를 지키려는 자와 무너뜨리려는 자의 마지막 승부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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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보는 주요 사건
1391년 공양왕 2년
1월 3군 도총제부를 설치하고 이성계가 지휘권을 장악하다
5월 과전법을 제정하다
9월 정도전정몽주파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다

1392년 공양왕 3년
4월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다. 정몽주파의 총공격으로 조준, 남은 등도 유배되다.
이성계가 집으로 돌아오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의 반대를 뒤로 하고 수하를 시켜 정몽주 암살하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죽었다. 이성계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는 정몽주를 해치워야 한다는 냉혹한 결단 아래, 이방원이 신속하게 벌인 일이었다. 정몽주는 참수되어 개경거리에 내걸리고 공양왕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렸다. 고려 멸망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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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보는 주요 사건
1392년 공양왕 3년
7월 공양왕이성계와의 군신동맹을 시도하다.
배극렴, 남은 등이 대비를 압박하여 공양왕을 폐하다.
7.17 이성계를 새 왕으로 추대하다.
 
398년 태조 7년. 불만 세력의 구심에 서게 된 이방원. 아버지 태조정도전이 주도하는 조선의 정세는 점점 그를 조여오고 방원 일파는 위기로 몰리게 된다. '위기는 기회!' 목숨을 건 일전을 준비하는 이방원, 정도전을 겨눈 그의 칼끝은 새로운 권력을 꿈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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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보는 주요 사건
1398년 태조 7년
2.4 태조송헌거사라는 이름으로 정도전에게 편지를 보내다
3.20 정도전과 이지란을 위한 술자리에서 남은이 사병 혁파를 주장하다. (5월부터 8월까지 진법연습에 박차를 가함.)
8.9 진법 연습을 게을리한 죄를 물어 공신들과 왕자들의 휘하 사람을 불러 곤장을 치다.
8.26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다. 정도전 세력이 제거되고 이방원이 실권을 장악하다. 영안군을 세자로 삼다.
9.5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1398년 정종 즉위년
9.17 정사공신을 선정하다.
10.9 정종이 정사공신 29인을 거느리고 맹약을 하다.
12.15 정종이 이방원 등 형제들을 개국공신으로 추가하다.
 
1~5편까지 한꺼번에 엮었습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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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드르 14-08-23 00:33
   
대단하군요... 잘 읽었습니다.
칼리 14-08-23 01:04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의 판단이 옳았음.

 만약 정도전의 뜻대로 됐으면 결국 왕은 어린 허수아비가 됬을거임. 정도전이 요즘에 와서 갑자기 추앙받는데, 정도전은 그냥 한명회 같은 모사꾼일뿐임.

 이방원이 결단을 내려 거사를 치룬게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했고, 조선전기의 찬란한 문화발전을 이룰 수 있었음.

 조선 개국의 1등공신은 누가 머래도 정도전이 아니라 이방원이고, 그런 이방원을 제치고 어린 배다른 동생을 왕위에 앉힌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으니, 이건 다 정도전이 자초한 일임.

 당나라 태종과 조선의 태종이 묘호가 같은 게 다 이유가 있음. 둘 다 새 왕조 개척에 1등공신이었고, 왕조의 기틀을 다진 명군들임.

 조선 초 세종을 현군이라고 보지만, 그런 세종이 현군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다져놓은 사람이 바로 태종임.
     
이궁놀레라 14-08-23 02:41
   
정도전을 한명회랑 비교하여 같은 모사꾼이라는 점은 동의를 할 수 없네요.
그러기에는 정도전의 업적이 높기 때문이죠.

역사를 잘 모르는사람들도 경국대전을 알고있을만큼 조선시대는 법치주의와 왕도정치를 표방하는 국가였습니다.
왕도정치란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 나라를 가장 올바르게 이끌고자함이 있엇죠.
경국대전 내용증에서는 왕들의 독단을 막기위해서 삼정승합의제(의정부 서사세)도 있었죠.
정도전 성리학을 기초로하는 정책에는 우리역사에서 찾아볼수없는 현대사회의 이념들을 포함하고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중 가장 기여를 많이한 인물은 정도전이 아닐까요?
정도전은 왕의나라가아닌 백성들의 나라를 만드려고 했던겁니다.

태종과 세조의 평가는 역사의 관점에 따라서 이견이 있습니다.
조선의 역사에서 태종과 세조가 유일하게 삼정승합의제를 페지하고 6조직계제를 한 왕들이죠.
태종의 왕의자리 욕심으로 왕자의난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죽죠.
또한 세조도 계유정난을 통해 왕의자리에 오르게되는데 그중 한명회가 계유공신입니다.
태종후 세종, 세조후 성종이라는 현군들이 나왔다는건 부정할 수 없으나...
그건 태종이나 세조가 기반을 잘 잡은거라기보다는
세종과성종의 성품도 훌륭하거나와 당시 훌륭한 재상이었던 황희,청백리 등의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 인해 훌륭한 업적이 많이 나오지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이유는 단지 왕의자리를 오르기 위한 이었고 조선의 대부븐 역사에서
정도전을 폄하받았던 이유는 사림들의뿌리인 정몽주와 대립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이듭니다.
정도전 자신이 성리학에 기초를 두고있었지만 교려왕조를 배신하고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이었기때문이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또한 명나라와의 외교적마찰도 이유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위인들을 폄하하고 왕자를 죽이고 왕의자리에 오른 태종을 왜 옹호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태종과 세조와 비슷한 일이 근대에 두번 일어나긴 했었죠
          
로이스 14-08-23 03:03
   
정도전이 조선초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건 공감합니다
태종이 정도전을 숙청하고 볼트모트로 만들었지만
사병혁파등 그의 사상이나 정책등을 대부분 수용했으니깐요

하지만 그 뒷부분은 좀 아닌게 있네요
세종은 신하들과 으쌰으쌰한건 사실이지만 세종또한 강력한 왕권을 쥐고 정치를 펼쳤던 왕입니다
그의 파격적인 인사 ,기득권의 분노를 산 훈민정음,황소걸음과 같이 장기적이였던 정책들은
다 태종의 정제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거였으니 이를 가볍다 볼수없고
세종을 빼고 태종 자체로만 보더라도 호패법,신문고,국방력과 영토확장의 업적도 있고요

이것은 세조와의 비교로도 알수있듯이 공신들의 대대적으로 숙청한 태종과 달리 계유정난 후 공신들을 웬만하면 건들이지않고 막강한 권력을 준 세조는 결국 성종때 훈구세력을 키우게된 원인이 됩니다
성군이였던 성종은 이를 잘 극복했지만 아들 연산군은 훈구의 고나리질을 초장부터 잡겠다고 했던게 결국 폭군의 마인드를 가진거고 흔히 알고있는 어머니 폐비윤씨 사건은 실록에보면 그냥 연산군이 공포정치를 대한 핑계거리라는걸 알수있습니다
               
이궁놀레라 14-08-23 03:34
   
흠...님 글읽어보니 그러네요.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끄으랏차 14-08-24 00:47
   
저도 조금 보태면

세종은 정말 태종이 막강하게 마련한 기틀이 있었기에 원하는대로 집권을 할수 있었습니다.
태종이 어느 정도로 철저했냐면
자신의 처가도 모두 죽이고
세종의 처가도 전부 죽입니다.
세종에게는 외가와 처가가 없습니다.
왕의 권력을 등에 업을수 있는 세력자체를 일소시켜버린겁니다.

가뜩이나 태조와 태종을 거치며 모든 군사력을 왕권이 틀어쥐고 있는데
그 왕권에 가족간의 정으로라도 호소할만한 사람이 아무도 안남은 셈인거죠.

즉 왕이 하는 일에 브레이크를 거는게 불가능한 구도를 태종이 다 만들어놓은겁니다.
세종의 능력이 출중한것도 인정해야하지만
조선조의 많은 왕을 보면 비교적 영민한 모습을 보이고도
왕에 올라서는 하고 싶은대로 못하고 신하에게 끌려만 다녀서
능력을 전혀 펼치지 못해 두고두고 욕을 먹는 왕들도 많다는걸 생각해볼때에
태종의 공이 결코 적다고 할순 없죠.
               
서라벌 14-08-24 01:41
   
와 정말 훌륭한 식견이십니다. 감탄하고 갑니다.
          
칼리 14-08-23 03:43
   
세종의 치적은 강력한 왕권하에서 이뤄진 겁니다.

 정도전의 이상세계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거였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부터 장영실 같은 천민등을 등용하는 걸 정도전 체제하에서는 추진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세종이 신권을 배려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자신의 의지였을 정도로 왕권이 강했던 겁니다.

 정도전이 한명회나 마찬가지인 이유는 태조 이성계의 후계자로서 말도 안되는 어린 막내 방석을 밀었던 겁니다. 어린 허수아비를 밀어서 자신의 맘대로 할려고 했던게 정도전이고, 결국 이랬기에 태종한테 제거당한겁니다. 결국 정도전과 태종 이방원은 서로 권력을 탐했기에 벌어진 일이고, 그건 정도전이 자초한 일입니다.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위대한 황제로 일컬어지는데, 태종 역시 골육상잔을 통해 이루어진 왕이었으나 명군으로 칭송 받았죠. 그나마 당태종과 달리 이방원은 방석보다 형이었습니다. 애당초 당건국에 1등공신이었던 당태종이나 조선건국의 1등공신인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건 당연한 이치인 겁니다.

 정도전이나 한명회나 결국 권력을 탐한 건 같습니다.

 그리고 정도전의 민본을 드라마가 오해하기 좋게 포장해서 그렇지 결국 한낱 권력욕에 취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성계 부자의 힘에 단지 명분을 실어준 학자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jclulu 14-08-23 01:23
   
오랜만에 가생이에서 유익한 글을 보네요...잘 봤습니다....^^
꾸리한 14-08-23 01:29
   
재밌네요
로이스 14-08-23 02:41
   
정도전이 세자 이방석이 아니라 이방원을 밀었어도
신권정치를 원했던 정도전은 세자의 자리에 개차반이였는지 개차반인척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질있던 양녕과 아주 유능했던 충녕보다 존재감없던 효령을 밀었을겁니다
형 정종의 세제가 아닌 세자로부터 시작했을 정도로 정통성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태종은
적장자였던 양녕에게 거는 기대가 컸던만큼 초반 정도전의 효령밀기가 밉보였을 가능성이 컸을거고
그때도 잘넘겨서 살아남았다고해도 태종은 세종의 왕권정치의 기반을 위해 며느리의 집안까지 숙청시켰을 정도니
제거대상 1호로써 반드시 숙청했을거라봅니다
멍게 14-08-23 02:47
   
정도전도 그냥 시대가 요구하는 혁명을 이루고 그 후 역할이 다해서 사라진거라 봅니다
무엄하다 14-08-23 02:51
   
부인 민씨가 참 대단함 ㅋㅋ
Meteo 14-08-23 03:45
   
조선 건국 이야기를 보면 늘 빠지는 이가 있으니
바로 이성계의 첫째 아들 진안대군 방우 입니다. ㅎ
이성계가 행적을 지워버리고 싶어했다는 장남, 고려의 충신이었던 진안대군 방우...
이것도 나름대로 재밌습니다. ㅎㅎ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1789년(정조 13년) 할아버지(영조)의 능(구리 원릉)에 행차하고 돌아오던 정조의 어가를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충주 사람 이국주였다. 
“신은 진안대군(이방우)의 15대 손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잃어버린 무덤을 돌본 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2년 전 홍수 때 비석이 드러났습니다. 무덤을 새로 봉축해야 할 것인데….”
진안대군 이방우가 누구인가. 바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적장자였던 인물이다. 이국주의 상언을 들은 정조가 가슴을 쳤다.
“아! 그 분이 우리 집안의 오태백(吳太柏)이신데….”
왕명으로 묘소가 정비되던 날 정조가 직접 비문을 지었다.
“태조의 장남으로(太祖長胤)~가정에서는 효성스러웠고(在家而孝) 신하로서는 미더웠네(爲臣也藎). 의로운 군대가 서쪽으로 돌아오자(義旅西回) 필마로 동쪽으로 떠나가니() 북산의 옛 마을로(北山故里), 곧 오태백이셨네.(卽泰伯吳)”(홍제전서)

조선의 오태백

정조의 어제시가 표현했듯 이방우를 왜 조선의 오태백이라 하는가. 오태백은 중국 춘추시대 ‘춘추5패’ 중 하나였던 오나라의 시조다. 본래 주나라 태왕(고공단보)의 장남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인 태왕은 내심 막내아들인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갖고 있었다. 사실 태왕의 가슴 속에는 또 다른 심모원려가 있었다. 
막내아들인 계력도 현명했지만, 계력의 아들인 희창이 더 현명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태왕은 “대업을 일으킬 사람은 나의 손자 희창(훗날의 주 문왕)일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태왕은 막내아들 계력~손자 희창으로 후계를 이어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린 장남 태백은 둘째인 우중과 함께 오랑캐 땅인 형만(장수성 쑤저우 지방)으로 피했다. 거기서 태백은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잘라 절대 왕위를 이을 뜻이 없음을 전했다. 덕분에 막내아들인 계력은 왕위에 올랐고, 계력의 다음 왕위는 훗날 주나라 문왕이 되는 희창에게 이어졌다.
주나라는 주 문왕 때 반석 위에 올랐다. 주 문왕의 아들인 무왕 때 은을 멸하고 중원의 천자로 우뚝 선 것이다. 한편 태백은 형만 사람들의 추대로 오나라의 시조가 됐다. 훗날 공자는 “태백이 세 번이나 천하를 양보했으니 지극한 덕이라 할 수 있다”(논어 ‘태백’)고 칭송했다.
그런데 정조를 비롯한 조선 사람들은 태조 이성계의 장남(이방우)을 ‘조선의 오태백’이라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위화도 회군으로 뒤바뀐 운명

과연 그럴까. 이방우는 과연 중국의 오태백처럼 ‘쿨’한 마음으로 동생(방과 정종과 방원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초야에 묻혔을까?

이방우의 무덤을 수축하면서 그의 삶을 재조명한 <정조실록>을 보자.

태조 이성계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와 6남2녀를,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와 2남1녀를 각각 두었다. 한씨와의 사이에서 이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을, 강씨와의 사이에서 방번·방석 등의 아들을 낳았다. 이방우는 어렸을 때부터 효자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했다.

“조금 자라서는 시서(詩書)에 몰두하고 검약을 실천하였으며 부귀영화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고려조에 벼슬해서 벼슬이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정조실록)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1388년(고려 우왕) 아버지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면서 운명이 뒤바뀐다.

"진안대군은 고려 우왕 14년(1388) 밀직부사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태조께서 요동정벌 출정 시 회군하지 말 것을 강력히 청원하였다."

“태조(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명나라를 받들자 대군(이방우)은 가족을 이끌고 철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은거한 것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기록이다. 아버지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역성혁명의 뜻을 노골화하자 철원으로 몸을 숨겼다는 것이니까…. 결국 이방우는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반대했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다는 것이 시사해준다. 이후 이방우의 행적은 어땠을까.

“1392년, 태조가 조선개국 후 왕위에 오르자 대군은 마음 속으로 두 동생(정종과 태종)이 모두 성덕이 있음을 인정하고 고향(함흥)으로 낙향했다. 두 동생이 마치 (중국) 주나라 계력 및 문왕(희창)과 같다고 여겼다.”

술병에 걸려 죽은 까닭

<실록>은 점입가경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군(이방우)은 스스로 부족한 사람을 자처하고는 국가의 일에 일절 간여하지 않고 함흥으로 물러가 살았다. 태조께서도 대군의 뜻을 대략 아시고 땅과 집을 하사했다. 장남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그 행적을 묻어버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태조는 주 태왕이고, 이방우는 태백이며, 정종(방과)은 계력이고, 태종(방원)은 계력의 뒤를 이은 희창(문왕)이라는 소리다.
한마디로 스스로 왕의 재목이 아님을 스스로 간파한 이방우가 왕의 기품을 갖춘 두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함흥으로 은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 철원으로 은거했다”는 <실록>의 내용은 심상찮다. 또 “태조가 이방우의 행적(자취)을 묻어 버리고 싶어 했다”는 내용도 허투루 넘길 수 없다.

종합해보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은 맏아들 이방우에게 결코 용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맏아들은 새 나라 조선의 세자이자 2대 임금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 때문일까. 이방우는 조선 건국 1년 만인 1393년(태조 2년) 죽고 만다. 그것도 술병에 걸려서.

“진안대군 이방우는 술을 좋아하는 성질 때문에 날마다 술을 마셔댔다. 마침내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태조실록)

<실록>은 이방우가 원체 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했지만 과연 그 뿐일까. 혹시 은둔지에서 고려의 망국을 슬퍼하며 소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술병에 걸려 죽은 것은 아닐까.
게놈 14-08-23 08:36
   
명나라에 복종 하자는 마인드를 가진 자가 주체의식을 가지고 원나라 사신을 베는 기개를 가졌다는 해석은 엉터리지 싶습니다. 그냥 대세, 힘있는 쪽을 간파할만한 눈치의 달인 정도로 보는게 옳을듯.

오히려 이방원이 인물임, 그런 카리스마로 세종을 만든 사람이 이방원이니 인정해야 할듯
     
서라벌 14-08-24 01:46
   
그건 아닌것 같습니다. 사대주의는 어차피 수백 년 이상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의례행위에 불과했었고, 당시 그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명나라에 복종? 명나라를 이용한 거죠. 어디까지나 실리적인 이득을 취하고자 했던 것 뿐입니다. 사대주의가 본래 취지를 잃게 되고 맹목적으로 변질 되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명나라가 망하고 나서부터죠. 정도전이 그저 눈치의 달인에 불과했다면, 무리해서 요동정벌을 추진하려 했을까요? 저 역시 정도전이 구상했었던 재상총재제는 그저 이상에 불과한 정책이고, 태종의 판단이 옳았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만 정도전이 그 정도로 비하받을 인물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찌되었건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설계한 설계자임에는 분명하니까요.
세발이 14-08-23 11:23
   
정도전의 개혁구상과 더불어 요동정벌및 왜구박멸등등 그계획을 다마치고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나와나 14-08-23 13:23
   
흥미롭고 좋은 글이네요
잘봤습니다 ^^
슈퍼노바 14-08-23 14:21
   
요동정벌 하려는 분이 북원과 화친은 왜 거부했을까요? 거기다 이성계는 쌍성총관부출신인데 -_-;;

이래저래 지맘에 드는 나라 만들고 싶었던 거죠.

왕을 허수아비로 두고 흔들고 싶었던거죠. 입헌군주국처럼요. 자긴 왕의 재목이 안되니까요.
     
모래곰 14-08-24 23:56
   
왜냐면 북원은 가망성이 제로였기에 반대한 측면도 강합니다.
가끔 위화도 회군을 언급하면서 북원과 연합했으면 가능했다는
망상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위화도 회군 당시 북원은 몰락하고
수만명이 포로로 끌려오고 있었죠.
그리고 역대 한반도를 가장 착취했던 것이 원나라 입니다.
그 전에는 명나라 초기를 제외하고는 조공도 실제로는 이익이 남는 장사였죠.
저 말도 실제로는 구입하기를 원했다는게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성계 가문이 원나라에 벼슬을 산 적이 있지만 이자춘 시대는 벌써
원이 고려출신의 벼슬아치들을 경계하고 이권을 뺏어서 고려에 귀부한 면도 있습니다.
요동 정벌도 완전 점령이 아니라 공격하고 돌아오는, 공민왕 시절 요동정벌과 같은 성격의
공격이나 사병혁파를 위한 구실이라고 주장도 있더군요.
나하추가 요동에서 털린 것을 봐도 쉽지 않은 일인 것은 사실입니다.
별나라왕자 14-08-23 14:24
   
유겔에 부적절
♡레이나♡ 14-08-23 19:55
   
좀 기네요 나중에 봐야지
시간여행 14-08-24 06:00
   
고려왕이 조선왕의 복식을 하고있고 ....실록에 잇는 그대로 정도전을 묘사한건 좀 그렇군요
죽기전 상황말입니다...
뾰루지 14-08-24 22:49
   
이방원의 세상보단
정도전이 그린 세상이 더 기대되는건 사실이죠
모래곰 14-08-24 23:59
   
제가 봤을 때는 정도전의 이상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반영하고 더 대단한게 세종대왕이라고 생각되서
정도전은 역사적 소명에서 할 일을 잘 하고 제 때 사라졌다고 생각됩니다.
태종도 세종 즉위 후 4년에 세상을 떠나니 마찬가지로 적당히 사라져준겁니다.
오묘한 이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