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존재'에서 '보이는 존재'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얘기가 하나 있다. 아시안컵에서 극적 결승골로 일본을 우승으로 이끈 이충성이 한 말이다. 자이니치 축구선수들을 다룬 <우리가 보지못했던 우리선수>의 취재를 위해 ‘당신의 아이덴티티(Identity)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내게, 재일교포 3세이자 2007년 12월에 일본으로 귀화한 그는 이렇게 답했다.
“뿌리는 한국이고, 태어나 자란 곳은 일본입니다. 조국(祖國)과 모국(母國)이 같은 의미를 갖는 것처럼, 제게는 한국도, 그리고 일본도 똑같이 소중합니다. ‘너의 아이덴티티는 어디에 있냐’라고 묻는다면, 일본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고, 더 말하자면 ‘자이니치’에도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충성이라는 인간입니다” ‘자기동일성’이라고도 표현되는 아이덴티티가 ‘귀속의식’이라는 뜻도 포함한다면, 이충성은 자신의 베이스가 일본과 한국, 그리고 자이니치 코리안에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시안컵 결승에서 골을 작렬시킨 뒤 자신의 성인 'Lee'를 가르키고 있는 이충성 선수(사진 : OSEN) |
자이니치 코리안은 오랜기간 일본사회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겨져왔다. 외모상 일본인과 거의 차이가 없는데다가, 최근엔 언어도, 생활스타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까닭에 설령 눈 앞에 있다 해도 그 존재를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의미로 말한다면 자이니치 코리안은 확실히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현재 일본에는 한국 및 북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약 63만명 가까이 되는데, 그에 따라 각 지역에는 다양한 커뮤니티도 형성되어 있다. 1억 2천만의 일본 전체인구에 비하면, 200분의 1도 되지 않는 자이니치가 일본사회에서 마이너리티 인 것은 확실하지만, 자이니치 코리안은 일본에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최근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닌 ‘보이는 존재’로 변화해가고 있다.
한 예로, ‘소프트뱅크’의 창업자 손정의는 일본에 귀화한 것을 공언한 자이니치 코리안이고, 도쿄대학 정치학교수로 인기비평가이자 작가이기도 한 강상중씨도 자이니치 코리안이다. 자이니치 코리안의 삶을 테마로 한 문학(‘피와뼈’ 등)이나 영화(‘박치기’ 등)들은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포츠계에서는 많은 수의 자이니치 코리안들이 그들의 출신을 밝히고 활약하게 되었다. 격투기의 추성훈, 복싱의 이열리, 월드컵에서 북한 대표로 뛰었던 정대세와 안영학, 그리고 이충성. 특히 이충성은 아시안컵 결승에서의 발리슛으로 일약 시대의 총아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그에 대한 기사가 많이 보도됐지만, 일본에서도 신문이나 잡지, TV 등에서 이충성 특집이 대거 제작되었다.
본명을 밝힐 수 없었던 위대한 선인들. 야구계는 지금도..
2009년 WBC 한국전에서 시구하고 있는 장훈 선수(사진 : 연합뉴스) |
자이니치 스포츠맨들이 일본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최근의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후 일본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역도산. 거구의 서양인 프로레슬러를 후려쳐 넘어뜨리는 그 강인함에 일본국민은 그를 영웅이라고까지 칭송하며 받들었고, 그는 ‘일본프로레슬링계의 아버지’ 혹은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남자’로까지 불렸다. 그런 역도산의 출신지는 현재의 북한, 본명은 김신락이다. 일본에 가라테를 널리알린 극진가라테의 창시자 최배달(오오야마 마쓰다츠 ; 마쓰다츠는 배달의 일본식 발음)도 자이니치다. 일본에서는 만화 ‘무한의 파이터’의 주인공으로 알려져있고, 한국에서도 ‘바람의 파이터’를 통해 그 일대기가 소개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3085안타의 기록을 달성한 강타자 장훈(하리모토 이사오)과 400승을 기록한 김정일(가네다 마사이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위대한 두 선수도 본명을 당당히 밝히고 활약하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당시엔 그 출신을 말하는 것조차 터부시되는 풍조가 만연했었다. 실제 앞서 밝힌 선수들 외에도 프로레슬링이나 복싱 같은 격투기, 혹은 야구계에서 활약한 자이니치 선수들이 많았지만, 모두 ‘통명(通名)’이라고 불리는 일본이름을 사용해 플레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프로스포츠는 돈이 걸린 산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예전에는 지금보다 자이니치 차별이 훨씬 심했고, 본명을 밝히는 것은 선수로선 큰 핸디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성공을 위해서는 출신을 밝히지 않고 활약하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출신을 공언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그들은 항상 자신이 자이니치임을 드러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도산이 한반도출신이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뿐더러, 최배달의 배달이 한민족을 가르키는 ‘배달민족’에서 온 것이라는 것도 유명했다. 장훈 등은 비방중상이나 차별도 각오하고 출신을 밝힌 채 현역 생활을 보냈다. 그런 그들은 자이니치 사회에 있어서 ‘용기’였고, ‘희망’이었으며 ‘자랑’이었다. 1946년에 태어나 자이니치 2세였던 내 아버지도 이런 얘기를 자주하곤 했다.
“자이니치라고 비굴하진 말아라. 자이니치면서 빼어난 활약을 펼치는 선수들도 참 많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자이니치 없이는 NHK의 홍백가합전도 불가능하다.” NHK 홍백가합전은, 매년 12월 31일 그 해 히트곡을 낳은 인기 가수가 총집결하는 일본의 국민적 프로그램이다. 연예계도 출신을 밝히지 않는 자이니치가 많은 까닭에 ‘스포츠도 예능도, 자이니치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 자이니치 사회의 상식이었다.
참고로 그런 느낌이 지나쳐서,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뛰어난 스포츠선수와 연예인을 가르켜 “실은 저 녀석도 자이니치야”라며 거짓인지 사실인지 모를 소문이 자이니치 사이에서 유포되곤 했다. 우수한 인재가 동포였으면 좋겠다는 강한 소망이 그렇게 시킨 것이긴 하지만, 그만큼 출신을 숨기고 활동했던 자이니치들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 야구계에는 지금도 본명을 밝히거나 출신을 분명히하지 않는 선수가 많다. 대표적으로 한신타이거즈에는 2001년 7월, 결혼을 계기로 국적을 일본으로 바꾼 강타자 가네모토 토모아키가 있는데, 같은 한신 소속이자 2004년 7월 자이니치임을 공언한 황진환(히야마 신지로)도 “일본 야구계에는 귀화한 선수를 포함 자이니치가 많다”고 전한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재일혼(在日魂)’ 이라는 책을 발간한 김의명씨의 말을 들어보자. “어떤 팀의 4번 타자에게 ‘당신도 자이니치?’라고 물으니 안색을 싹 바꾸고 부정하더라. 슬픈일이지만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부모가 자이니치임을 숨긴 까닭에, 자신이 코리안임을 모르고 자란 선수도 많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렇다. 최근에는 재일사회도 교포 3-4세가 주류가 되면서 민족색도 점점 옅어지고 있다. 국제결혼이 급증하고, 한국인의 피를 물려받지만 태어난 시점에서 이미 국적이 ‘일본’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상황을 생각해보면 야구계에 자이니치라고 공언하는 선수가 적은 것도 일견 이해가 가지만, 최근엔 요코하마의 모리모토 히초리(이희철)처럼, 일본에 귀화는 했으나 본명인 희철을 그대로 사용하는 선수도 등장하고 있다. ‘드래곤볼’의 피콜로 대마왕 코스프레도 하고, 스파이더맨 마스크도 쓰는 등 팬서비스에도 적극적인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야구계에 있다보면 ‘저 사람도 자이니치 아니야?’라는 질문을 종종 듣습니다만,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누가 자이니치라는 걸 의식하지도 않고, 저 또한 자이니치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거든요. 저로서도 자이니치라고 해서 그 무리 중에 굳이 끼려고 하지 않아요. 일본인이든 자이니치든 야구를 하는데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한국에 사는 걸 생각해본 적도 없고, 일본도 좋아합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으니까요.”
일견, 국적이나 민족, 아이덴티티에는 무관심한 얘기같아 보이고, 본인도 평소에 자이니치임을 그렇게 의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긴 일본프로야구의 역사에서 본명으로 1군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는 그가 최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히초리의 출현은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64&article_id=0000002007출처
그들이 우릴 버린것이 아니라 우리과 이두사람을
외면하고 버린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