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나 누구나 변화는 기본이다. 산업의 새로운 쌀, 반도체 업계는 더욱 그렇다. 미국과 중국이 디-리스킹(de-risking)에 잠정 합의한 듯하지만 ‘너 죽고 나 죽자’는 ‘lose-lose game’을 포기한 것일 뿐 상호 견제와 경쟁은 여전하다. 당장 미국의 반도체법은 미국 내 생산 역량 강화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의 헤게모니를 추구하고 있다. 한국은 어떤 길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까. 그간 <피렌체의 식탁>을 통해 국가 반도체 전략의 얼개를 여러 차례 제시해 온 권석준 필자가 실현 가능한 네 가지 대책을 보내왔다. 읽다 보면 반사 이익 최대화의 가능성도 살짝 엿보인다. [편집자 주]
미중 패권 경쟁 속 불확실성을 대비하는 네 가지 전략
중국 내 현세대 메모리반도체 생산 비중 점차 줄여야
범용 메모리와 특화 메모리 시장 노리는 투 트랙 전략
첨단 파운드리 산업 경쟁력 확보, 중요한 전략 포인트
필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산업 역량 강화도 중요해
2022년 미국의 반도체법(CHIPS & Science ACT 2022) 통과 후, 각국의 반도체 업체들은 이 법의 실효적 적용 범위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특히 한국 반도체 산업은 메모리반도체 생산뿐만 아니라, 파운드리, 패키징, 소재와 부품, 그리고 장비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생태계의 거의 전 분야에서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이 법의 세부 조항이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는 좁게는 중장기 투자 전략의 수정부터 넓게는 차세대 반도체 기술 로드맵과 팹(제조 시설)의 신설 계획을 재편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국 반도체법의 두 가지 셈법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의 반도체법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통과된 법안이다.
표면적인 목적은 그동안 미국이 글로벌 반도체 분업화 기조 속에 주로 동아시아 지역으로 분산시켜 왔던 반도체 제조 역량의 일부를 다시 자국으로 회귀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인텔이나 마이크론, 글로벌 파운드리 같은 자국의 반도체 제조 업체뿐만 아니라 삼성전자나 TSMC 같은 해외 업체들의 투자도 촉진하는 보조금 정책 등을 세부 시행 사항으로 설치하는 산업 정책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미국은 반도체 제조, 특히 첨단 반도체로 불리는 차세대 메모리반도체와 10nm 이하급의 로직반도체의 제조에 주안점을 두었는데, 메모리반도체의 경우 삼성전자를, 로직반도체의 경우 TSMC를 타깃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TSMC 양사는 경쟁적으로 미국에 팹을 증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며, 양사가 발표한 계획대로라면 미국의 애리조나, 그리고 텍사스에는 동아시아 지역에 버금갈 수준의 메가팹 클러스터가 들어서게 된다.
두 번째 목적은 경제 안보 혹은 기술 안보적 관점에서의 반도체 공급망 안정성 확보다. 특히 미국은 자국의 국가기간산업망에 필요한 반도체 칩과 더불어 국방, 통신 및 무기 시스템에 필수적인 반도체 칩의 공급망이 동아시아 지역에 쏠려 있는 반도체 생산에 의존하는 정도를 완화하고자, 반도체법 지원을 통해 자국에서의 필수 칩 생산 기반 시설을 확보하고자 한다.
지속되는 불확실성, 대책은 있다
이러한 미국의 반도체법은 자국의 반도체 공급망 안정성과 자급도를 제고하는 동시에, 중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해서는 기술 발전과 점유율 확장을 제동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특히, 미국의 반도체 정책은 중국에서의 첨단 반도체 생산을 직접적으로 견제하는 다양한 장치로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에 위치한 한국 메모리반도체 업체들의 팹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시안 팹(3D 낸드플래시), 하이닉스의 우시 팹(DRAM)과 다렌 팹(3D 낸드플래시)은 직간접적으로 생산 증산 규모와 다음 세대로의 기술 업그레이드를 위한 필수 장비·부품 반입에 많은 제약이 걸린다.
한국은 미국 반도체법 통과 이후, 중국에 있는 한국 반도체 업체들에 대해 미국의 제재 조치를 한시적으로 유예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 유예 기간은 현재로서는 올해 10월 초순으로 종료된다. 유예 기간 연장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10월 중순부터는 사실상 중국 내 한국 메모리반도체 팹의 증산과 업그레이드, 그리고 테스트 팹 설치 등의 계획에는 큰 차질이 발생한다. 한국 반도체 업계와 정부는 작년 하반기부터 유예 기간 연장을 위한 협상 노력을 지속하고 있으며, 유예 기간은 적어도 1년 이상 연장될 가능성이 높아지고는 있다. 문제는 매년 1년씩 유예 기간이 연장되는 것 정도로는 메모리반도체 업체들의 사업 구상과 투자 계획의 불확실성이 해소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의 급변은 미·중 간 첨단기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패권 경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패권 경쟁이 끝나지 않는 한, 한국을 비롯한 대만, 일본, 유럽 각국의 반도체 업체들의 불확실성 대비 전략은 계속 변수가 추가될 수밖에 없다. 최근에 있었던 미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 및 고위급 회담에서 언급된 디리스킹(de-risking)은 양국 간의 화해 무드의 신호라기보다는 미국과 중국 모두, 앞으로도 패권의 경쟁을 놓고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재확인에 불과하다. 그 경쟁 속에 필요 없는 출혈은 양국이 굳이 같이 감수하지 않겠다(즉, 완전한 디커플링으로 인한 lose-lose game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는)는 입장을 명확히 서로 확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전히 미국은 중국으로의 첨단 반도체 생산 장비 반입과 인공지능 반도체 수출을 허가할 계획이 없고, 중국은 반도체 굴기 정책을 포기할 계획이 전혀 없다. 중국은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 같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에 대중 반도체 제재 동참으로 인한 후과에 대해 끊임없이 거친 언사로 경고하고 있고, 최근에는 마이크론 같은 미국 회사의 중국 판매를 일부 제재하는 맞불 작전을 보이고 있다. 미국 역시 대중 반도체 제재 조치의 범위 확대를 통해 경쟁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계속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반도체 산업 입장에서는 결국 미·중 첨단기술 패권 경쟁이 당분간 상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그동안의 글로벌 분업화와 자유무역주의에 기반을 두었던 산업 정책과 경제 안보 로드맵을 국가와 기업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이러한 불확실성 대비가 필요한가?
1. 중국 공장을 로우테크 제품 생산 기지로 천천히 변환
우선 중국에 있는 한국 메모리반도체 팹들의 위험 분산 전략이 구체적으로 입안되어야 한다. 이미 개별 기업 차원에서는 전략적인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기업 차원을 넘어 한국 기업들의 중국 내 비즈니스 환경에 중국 정부로부터의 정치적 압박과 견제가 가해지는 것에 대해 한국 정부 역시 구체적인 대비책을 준비해야 한다.
메모리반도체 팹은 그 공정 특성상 다른 제품을 생산하는 팹으로 전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DRAM 같은 메모리반도체는 이전 세대의 레거시 반도체(예를 들어 DDR5를 DDR4로 다운그레이드)나 CMOS 이미지 센서, 심지어 패키징 공정 전용 팹으로의 전용이 가능하다. 중국 내 한국 메모리반도체 팹의 업그레이드와 증산이 실질적으로 어려워질 경우, 결국 이러한 전용 전략을 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는 자국 기업으로 대체가 불가능한 일부 메모리반도체 생산에 대해 자국 내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한국 메모리반도체 팹의 전용 시도를 불허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따라서 급작스러운 전용보다는 시간을 두고 조금씩 현세대 메모리반도체 생산의 비중을 줄여 가는 연착륙 전용 전략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충분한 시간이란 3~5년 정도의 시간인데, 이는 중국이 아닌 다른 지역, 특히 한국(평택, 용인, 이천, 여주 등 경기 남부권)이나 미국(텍사스주 오스틴 혹은 테일러시)에서 팹을 신설하여 운영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중국에서 생산하던 메모리반도체 물량의 대부분이 한국이나 미국에서 생산되기 시작하면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에 의한 중국 내 사업 불확실성 요소가 완화될 수 있다.
2. 메모리반도체, 일반용과 인공지능용 등 특화 반도체의 투 트랙 생산 준비
두 번째 위험 분산 전략은 메모리반도체의 투 트랙(two-track) 전략이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 전략을 논할 때, 메모리반도체 일변도의 산업 생태계를 비메모리반도체를 포괄하는 방향으로 다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늘 있었다. 그렇지만 메모리반도체 자체의 시장 전략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시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국이 세계 최정상급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기술 경쟁력과 제조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메모리반도체는 그 자체로 한국 반도체 산업의 강력한 레버리지가 될 수 있으며, 이제 이 레버리지를 적어도 두 개 이상 가져가는 전략을 설계하여 메모리반도체 전략 다변화를 통해 위험을 분산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까지 DRAM이나 NAND 플래시 같은 메모리반도체는 일명 코모디티(commodity) 반도체(표준화된 반도체)로 불릴 정도로 양산 공정과 기술 표준이 잘 확립된 반도체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최근 인공지능 반도체가 본격적으로 반도체 업계의 주요 이슈로 작용하기 시작하면서 메모리반도체의 일부 시장은 인공지능 반도체 전용으로 방향이 갈라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랩톱이나 대용량 서버 등에 공급되는 표준화된 DRAM 혹은 SSD용 낸드 플래시 같은 메모리반도체와 달리, GPU 같은 인공지능 가속기 전용의 메모리반도체는 칩렛(Chiplet, 개별 칩을 이어 붙여 하나의 반도체로 만드는 방식)의 개념에서 접근하여 설계되어야 하는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엔비디아 같은 미국의 인공지능 반도체 전문 회사가 설계하는 인공지능 반도체는 단순히 한 기판에 GPU와 메모리를 따로 장착하여 작동시키는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같은 칩렛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설계 단계부터 집적과 연결, 전력 배분과 레이아웃 최적화를 필요로 한다. 이는 인공지능 반도체 전용의 고대역폭(high-bandwidth)과 고속, 대용량 데이터 저장·전송·처리가 가능한 고성능 DRAM에 대한 수요가 점점 증가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메모리반도체는 HBM-PIM으로 불리는데, 설계 단계부터 인공지능 가속기 칩렛 설계 업체들과 같이 제품을 설계하고 양산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2010년대 후반부터 HBM 개발에 착수해 왔으며, 하이닉스의 경우 엔비디아와 지속적인 협력을 통해 인공지능 반도체 전용 HBM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다른 팹리스 업체들과 더불어 HBM뿐만 아니라, 아예 메모리의 일부 영역에서 데이터 처리가 가능한 명령어 셋을 작동시킬 수 있는 구조로 PIM 구조를 같이 만들고 있는데, 이러한 메모리반도체들은 기존의 코모디티 메모리반도체와는 확실히 구분된다. 표준화된 양산과 달리, 인공지능 반도체 전용의 메모리반도체는 각 팹리스 회사들의 설계에 대해 설계-공정 최적화(design-technology co-optimization, DTCO) 접근 방식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며, 따라서 양산보다는 주문자 특화 고성능 반도체로 바뀐다. 즉,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앞으로 양산 위주의 코모디티 메모리와 인공지능 등의 산업특화 고부가가치 메모리로 나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특히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이 급성장할 경우, 코모디티 메모리보다는 산업특화형 고부가가치 메모리의 수익성이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일반 서버용 64GB급 DDR4 디램의 경우 GB당 1.5달러 정도로 시장가가 형성되지만, 엔비디아의 H100 같은 GPU 서버에 탑재되는 80GB급 하이닉스 HBM3는 GB당 15불 가까이 시장가가 형성된다. 즉, 10배 가까운 수익률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범용 메모리와 특화 메모리 두 시장을 동시에 노리면서 지배력을 공고하게 다질 수 있는 메모리반도체 투 트랙 전략이 더 정교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3. 위탁 생산 능력의 증대를 위한 정책적 지원
세 번째 위험 분산 전략은 파운드리(foundry, 외부 업체가 설계한 반도체 제품을 위탁 생산하는 업체) 산업으로의 자원 배분 전략이다. 현재 한국의 첨단 파운드리 산업은 사실상 삼성전자가 단독으로 주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대만의 TSMC에 비해 상당히 뒤처지는 상황이다. 기술력 면에서는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왔지만, 생태계의 규모와 생산 캐파(Capacity), 그리고 고객사 네트워크를 비교해 보면 한국의 파운드리 산업은 여전히 경쟁력이 충분히 확보된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반도체 산업의 발전 방향은 점점 다품종 고성능 반도체로 기울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인공지능 반도체뿐만 아니라, 향후 광컴퓨터, 양자컴퓨터, 신경망컴퓨터 등의 새로운 컴퓨팅 하드웨어 전용의 반도체 칩을 위해서라도 첨단 파운드리 산업의 경쟁력 확보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포인트다. 한국 반도체 기업의 위탁 생산 능력을 높이자는 얘기다.
대만의 파운드리 산업이 TSMC뿐만 아니라 UMC 같은 2인자 그룹 등으로 계열화를 이루며 첨단과 레거시 로직반도체 생산의 점유율과 생태계 모두 경쟁력을 확보한 것처럼, 한국의 파운드리 산업 역시 제2의 삼성전자에 버금가는 새로운 파운드리 기업들이 등장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파운드리 산업은 그 특성상 초기 자본 투자 비중과 고객 생태계 확보가 매우 중요한데, 레거시 파운드리 제품에서 시작해 첨단 파운드리 제품으로 넓혀가는 시차 전략이 중요하다.
파운드리 생태계의 형성은 무엇보다도 고객사들의 네트워크가 촘촘해지게 만들 수 있는 디자인하우스(반도체칩 내부의 전자회로, 즉 IC를 설계하는 회사)의 확충이 중요하다. 설계와 제조의 경계면에서 반도체 칩의 생산 최적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디자인하우스의 특성을 고려할 때, 다양한 반도체 칩의 라이브러리를 커버할 수 있는 디자인하우스가 더 많아질 필요가 있고, 이들은 한국의 팹리스 업체뿐만 아니라, 해외 업체들과도 연결될 수 있을 정도로 개방되어야 한다.
4. 첨단 반도체 제조 전용 소부장 기술 확보
네 번째 위험 분산 전략은 필수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의 역량 강화다. 한국은 글로벌 주요 반도체 제조 국가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첨단 장비의 자급도가 매우 낮다는 현실이 있다. 한국은 2010년대 이후 정부와 기업이 합심하여 반도체 소부장 생태계의 성장과 점유율 강화, 자급도 제고를 위한 R&D 프로그램 확충, 정책적 지원책을 지속해 오고 있으나 여전히 미국, 일본, 네덜란드의 주요 선두 업체들과의 기술 수준과 점유율 격차를 유의미하게 좁히고 있지는 못하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이제는 부가가치 창출의 최적화에서 공급망 안정성 확보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건대, 첨단 반도체 제조 전용 소부장 기술의 확보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의 지속 가능성과 안정성, 그리고 안보적 차원에서의 공급 연속성 확보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두 가지다. 첫째는 지금까지 지속해 온 국내 소부장 업체들의 기술 수준 상향을 위한 연구개발정책 강화다. 특히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소재, 부품, 장비 테스트베드를 확충하여 각 반도체 클러스터에서 연구기관과 중소기업들이 수시로 활용할 수 있는 국가팹센터의 현대화와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두 번째는 해외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의 국내 투자 활성화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기술 제재 조치가 지속되면서 외국의 주요 반도체 장비 업체들의 중국 수출 비중은 계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로 인해 이제 가장 중요한 반도체 생산 장비 시장은 한국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한국의 경기 남부권에 신설될 메가 클러스터에는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는 반도체 생산 장비 전체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그리고 더 고가의 장비가 대량으로 공급되어야 한다. 이는 외국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로 하여금 한국으로의 수출을 넘어, 아예 한국에서의 생산, 선행 연구개발, 장비 유지보수센터의 확충, 한국 연구기관이나 대학과의 협업 프로그램 확충을 통한 고용 인력 규모 확대 등이 뒤따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한국은 이러한 외국 주요 선진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이 한국의 반도체 생태계에 편입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을 마련할 필요가 있으며, 특히 한국에서의 첨단 반도체 생산이 앞으로의 반도체 소부장 기술 로드맵의 레퍼런스가 될 수 있는 방향으로 기술 선도의 포지션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속되는 패권 경쟁, 반도체 산업 지형 변동은 적응해야 할 현실
미·중 간의 반도체 패권 경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반도체 시장을 꾸준히 타깃으로 삼아 수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한국 반도체 산업 입장에서, 지금의 글로벌 반도체 산업 지형 변동은 극복해야 할 장애가 아닌, 적응해야 할 현실이다. 바뀐 현실 속에서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정책, 미국의 반도체 리쇼어링 정책 등을 모니터링하면서도 산업 지형의 변동이 가져올 다양한 위기와 위험 요인을 분석하여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는 다층위의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좁게는 메모리반도체의 투 트랙 전략부터, 넓게는 산업 생태계의 다변화와 팹 전용 전략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전략들은 종합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분석되고 입안될 필요가 있다. 잘 준비된 위험 분산 전략은 예상된 위험 요인에 의한 피해 규모를 최소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뿐더러, 예상하지 못한 위험에 대한 보험 역할, 나아가 변동성에 오는 기회의 창을 먼저 확보할 수 있다는 기능이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이제 디커플링, 디리스킹의 프레임을 넘어, 위험 분산과 관리, 그리고 그것의 활용으로까지 시야를 넓히면서 전략적 판단과 사려 깊은 대응책을 더욱 적극 개발하여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